"언니, 내일 출근해서 누가 물으면 천국에 갔다왔다고 말해야 될것 같애."
발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북한강을 암벽 가장자리에서 굽어보던 일행중 한명이 옆에 있던 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필자도 나즈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그럼 그렇고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가 엘도라도(Eldorado)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맞장구를 쳤다.
산바람의 유쾌하고 상큼한 맛에 취하고 조각칼로 예술작품을 빚듯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낸 산과 강, 하늘의 매혹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채 뒷쪽에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던 필자의 가슴 속에서도 이미 그렇게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시냇물 소리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클래식과 팝송이 들려 올때는 천국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달포 전부터 잡혀있던 일정대로 지난주에는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황매산으로 갔었고 이번주에는 필자가 있는 수도권 서쪽 끝 지점에서 수평으로 이동하여 동쪽으로 국토의 절반 이상되는 강원도 춘천의 삼악산으로 갔다.
진달랫과의 분홍색 산철쭉, 자주색의 큰붓꽃, 호리병을 빼닮은 병꽃등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고즈넉한 산길을 걸을때의 풍요롭고 여유있는 느낌은 위선과 중상 모략, 배신과 기만등 인간세계의 부정적 모습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계(仙界)의 경지였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진땀을 뺏지만 한고비를 넘기니 어김없이 찾아온 서늘한 바람과 나무그늘, 그리고 아름다운 자태를 숨김없이 뽐내는 이름모를 야생화들 사이를 유유자적(悠悠自適) 지나갈때는 무릉도원에 다다른 것과 다름 없었다. 지금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났다.
이름모를 꽃들이 만발한 자연 화원(花園)에서 굽이쳐 흘러가는 강을 발아래 굽어보고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의 숨결을 느끼며 밤새 냉동했다 막 해동되어 얼음이 섞인 캔 맥주를 들이킬때의 맛과 풍취, 그 감동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것은 단순히 맛의 유무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했다. 거의 신선의 경지에 오른듯한 풍족감과 여유가 온 누리에 충만해 있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으며 저 멀리, 그러나 우리 일행들의 발아래 무리지어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생들의 속세에서는 조석(朝夕)으로 진수성찬을 먹는다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황홀의 극치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부질없는 바람인줄 알지만 한가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이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 뿐 더이상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다. 더 채워졌으면 하는 부족한 것이 없는 최고 기분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며칠전 일행으로 부터 ITX 청춘열차를 탄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지방에 내려가기 위해 KTX나 SRT 같은 고속열차를 예매할 때 한번씩 본적이 있던 ITX 청춘열차가 무엇인가 하며 궁금해 한적이 있었다.
청춘들만 탑승 가능한 신세대 열차라서 꼰대 소리 듣기 알맞은 필자 같은 세대는 이용 불가능한 교통수단인가 하면서 호기심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일행의 도움으로 탈 수 있게 되어서 새로운 경험이다 싶어 즐거웠지만 청라역에서 7시 반 공항철도 지하철을 5분 차이로 놓치고 나서 난감한 상황에 빠진 이후로는 주도 면밀하게 확인하고 대처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아침부터 짜증이 났다.
엊저녁에 앱으로 확인 했을때 용산역에서 8시 45분 출발 청춘열차 출발 시간에 닿기 위해서는 청라역에서 7시 반 이후 한 두 개의 공항 철도 배차가 더 있었는데 아침에 집에서 차를 몰고 나오면서 확인하니 7시 반 이후의 지하철 탑승으로는 예약된 용산역에서의 청춘 열차 출발 시간을 무조건 맞출 수 없는 것이 아닌가.
1년 반쯤 전에 이곳 한반도 서북쪽 끝으로 이사 온 이후 여러번 산행을 위해 이른 새벽 집을 나서곤 했지만 그날 처럼 늦어서 타야 할 열차 시간을 놓친 경우는 없었다.
혼자가는 산행도 아니고 일행과의 약속이 있는데 하루 일정을 망칠 수는 없어서 기사에게 소요 시간을 물어본 후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달려가서 허급 지급 난생처음 타는 ITX 청춘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경험한 어느 열차 보다도 내부가 넓고 깨끗하며 쾌적하게 되어 있어서 좋은 이미지를 줬다.
강촌역에서 산기슭까지 가던중 방향을 잘 못 잡아서 갔던 길을 돌아와서 택시를 잠시 타고 등선봉으로 가는 들머리에 마침내 접어 들 수 있었는데 그 때 이미 강촌역 도착이후 1시간 반이 경과한 11시 반경 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갔다 왔다 헤매었지만 길가의 야생화를 감상하며 산책하느라 지루한 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산행 간다고 아침에 택시를 두 번 이용했던 것도 처음이었다.
육교아래 어렵게 초입(初入)에 진입한 이후로는 약 30~40분간 가파른 비탈길을 계속 힘들게 올라가서야 겨우 한 숨 돌릴 만한 바위가 있는 쉼터가 있었다. 인적이 드문 능선을 따라 등선봉까지 가는 도중 만났던 공룡 비늘 같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위를 지날때는 신비스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쪽 코스는 힘들어서 등산객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는 일행의 말처럼 등선봉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도권 대도시 인근 산들은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니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 투자를 많이 하여 등산로를 편리하고 안전하게 해 놓았는 반면 지방에 위치한 산들은 개발이 덜 되어 세련된 느낌 없이 조금은 투박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차이가 있는데 등산객 입장에서는 우월을 말하기 힘든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
언제나 너무 맛있어 즐거운 산에서의 중식시간을 등선봉에서 보냈는데 산행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평소 밥맛이 없거나 반찬 투정이 있는 사람은 산에 와서 식사를 하면 간단히 치유된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음식이라도 때와 장소, 분위기, 함께하는 사람,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따라 그 맛과 느낌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뿐만아니라 세파(世波)에 시달리고 가족, 직장 동료등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위축되어 삶 자체가 귀찮고 고달플때도 산을 찾아서 육체적 한계에 부딪힐 만큼 스스로를 몰아 붙여 산행하면 어떤 치유의 실마리,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청운봉을 거쳐 최고봉인 용화봉에 갔다가 삼악산 전망대를 둘러 본후 다시 용화봉쪽으로 와서 흥국사를 지나 등선폭포로 하산 했는데 들머리에 도착할 때까지의 아침에 빚었던 혼선과는 대조적으로 귀갓길에는 버스, 열차등 차 시간이 척척 맞아서 산행중 촬영한 풍경 사진들을 감상하는 중 긴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등산중 힘든 시간도 있어서 인내심을 필요로 할때도 있지만 산행후 집으로 오는 길은 십중팔구 미션(mission)을 잘 이행한 것 처럼 가슴 뿌듯하다.
ㅎ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