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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법사
우유
“야, 이거 먹어.”
슬며시 자신의 우유를 내게 내민다. 은근한 관심의 표현인가? 희영은 나보다 한 살 어린 깜직하고 예쁘장한 여자 동기다. 여전히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는데 나에게 무슨 호기심이라도 생긴 것일까.
같은 날 늘푸른보육원에 맡겨진 그녀와 나.
나는 생김새도 그렇고 거리를 떠돌다 끌려 와 지저분하고 험악한 놈이었는데, 나와는 달리 어디 부잣집 아이처럼 말끔한 그녀가 여기 원생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그래서 금새 어울릴 줄 알았더니 항상 외톨이였다. 아이들이 말을 붙여도 간단한 답변을 하고 얼굴을 돌린다. 사람을 경계하고 꺼리는 것이 분명하다.
나 같으면 말붙이기 무섭게 아이들과 어울려 사고치기 다반산데 말이다. 벌써 창가에 놓인 화분을 여러개 깨어먹었다.
나는 이것저것 세상을 떠돌며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날조하며 애써 친구를 늘렸던 것인데, 분하게도 그 아이는 노력조차 하지않고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렇게 도도하던 아이가 나에게 말을 붙이다니. 지금 나의 예상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그 우유가 무엇이길래.
“우와, 내가 먹어도 돼?”
다른 녀석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말문이 이제야 트인 것처럼 이것저것 그녀에게 묻는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껴들지 말라고, 너 내가 장미꽃 접어줄까.”
한 덩치 하는 무한이가 애들을 밀친다. 녀석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장미꽃을 접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엉터리 사랑꾼이다.
“야, 비켜봐 나에게 준거잖아.”
난 다른 아이들을 제치며 그녀를 바라다본다.
“영훈아, 나 너희 아빠 본 적이 있어.”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내가 꼬깃꼬깃 지갑에 넣어두었던 사진을 흘낏 본 모양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걸까.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애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니, 그렇게 당기지 말고. 네 아빠, 우리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봤단 말이야.”
아! 그렇구나. 아버지가 살아계신 게 아니라 사진에서 봤단 소리였군. 나는 괜히 심술이 났다.
“네 깠게 무언데 우리 아빠를 알아! 꺼져, 꺼지란 말이야.”
나는 괜히 그녀에게 무섭게 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제길, 나는 돌부리를 걷어찼다.
우리 아버지는 탐험가다. 지구의 반이 날아가 사라지고 그곳에 몬스터가 사는 세계가 들러붙었다. 지구의 정상들이 모여 반쪽 지구를 탐사할 대원들을 뽑았다. 생명공학자이자 의사인 아버지가 대표로 뽑혔고, 나는 외가에 맡겨졌다.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른들은 다들 거짓말쟁이다. 이틀밤을 자고 나면 온다더니 몇달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몬스터웨이브가 일어나 난 가족을 모두 잃어야 했다. 그랬던 것인데, 그녀도 나와 비슷한 걸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울상짓는 모습에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으로 가득찬 것일까. 그녀는 고아원 앞 감나무 가지위에 올라가 먼 곳을 주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감나무는 가지가 연해서 부러지기 쉽다고, 오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놨다.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둘러싸고 오르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돌아서곤 했다.
성장기에는 항상 먹을 게 부족하다. 그래서 간식이라도 나오면 모두들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난 그녀에게 관심이 생겨, 아니 단지 아버지의 일이 궁금해서다. 그래서 애들에게 부탁해서 먹을 것을 모아 그녀에게 주었다.
“이거 먹을래.”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본채 만채 자리를 떠났다.
참으로 도도하기는.
"흥."
나도 너따위에는 관심 없다고. 다만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할 뿐이라고.
그래서 그녀를 따라가려던 참인데 원장이 길을 막았다.
“남은 거 다 먹고 가렴.”
이 고아원 원장은 참 좋은 양반이다. 살기도 어렵고 고아들이 넘쳐나는 이 시기에 조그마한 지원금이나마 혼자 가로채서 꿀꺽해도 모자랄 참인데, 아이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 참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인데.
“이것 놔줘, 이것 놔 달란 말이야!”
“김영훈! 남은 거 다 먹고, 식탁은 치우고 가야지.”
내가 붙잡혀 있는 동안 아이들이 하나둘 다가와 내가 마련한 간식들을 하나씩 집어간다.
'도둑놈들' 먹일려는 아이는 먹지않고 아끼던 구슬을 주고 마련한 간식들을 죄다 집어가다니.
“제길”
“그런 나쁜 말 하면 못써요. 오늘 수업시간은 복도에 나가서 반성하도록 해요.”
나는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저건 제건데요."
"이렇게 많은데 나눠먹어야지요. 영훈학생."
"네."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몇 주가 지나자 다시 새로운 원생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시호는 나보다 한 살 많은 8살이었는데 키도 크고 잘 생겨서 여아들이 따랐다. 시호는 우리보다 먼저 초등학생이 되어 보육원에 있을 때보다 학교에 있는 때가 많았다. 학교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 세상 밖은 새로 생겨난 헌터 탓에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세상이 마나에 휩싸이고 능력자들이 생겨난 뒤로 아이들에게 능력자들은 우상이 되었고, 시호는 자신이 능력자가 된 듯 세상 모든 몬스터들을 물리치는 영웅이 되었다. 무한이도 드레이크라는 몬스터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만은 인간으로 남으리라고 버티다가 몬스터가 된 아이들에게 잡아먹혀 좀비가 되었다. 나는 아니라고 왜 너희 멋대로 놀이를 정하는 건데라고 따지다가 따돌림당했다.
“쳇.”
그런데 이상했다. 여태 말없이 홀로 지내던 희영이 시호의 말을 잘 따랐다. 오히려 시호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희영이었다. 그녀의 가족들도 나처럼 몬스터들에게 희생당했을 텐데, 같은 처지인 나를 두고 시호를 따르다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여간 얼굴이 허여멀겋게 잘 생긴 녀석들은 아무것도 안해도 인기가 높은 건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결국 나에게 정적이 생겼다. 시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나는 녀석이 싫었다. 당분간 녀석에게는 말도 안붙이라. 하지만 시호는 성격도 좋아 아이들이 잘 따랐다.
“희영아, (나 너 좋아해가 아니라 나 너 싫어해도 아니라) 그냥 우리 친구 하자.”
“왜?”
여태 입을 열지 않았던 희영이 멀리 떨어진 시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난 시호 오빠가 좋아.”
“.......”
묻지도 않은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괜히 나 좋아한다고 애들한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호오빠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세상 무너지는 듯한 느낌은. 희영은 자신의 할 말만을 이야기한 채 나를 떠나갔다. 그녀를 쫓아가서 이유를 따져묻는다는 게 얼마나 추한 일이란 말인가.
“저기 나도 할 말이 있어.”
희영이 나를 바라보더니 무시하고 지나쳐간다.
'엉!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희영에게 잘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녀 곁에서 웃음지으려 노력했지만 바보같은 표정만 나왔다. 내내 웃지않은 얼굴에 갑자기 웃음을 짓자 표정이 괴상망측했으리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그녀에게 웃음을 주고자 엉덩이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럴때마다 그녀는 나를 벌레보듯 하였고 나에게서 멀어졌다. 오해는 깊어지고 한숨만 나왔다.
아! 어쩌란 말인가.
여아들 사이에서 희영의 소문이 나쁘게 퍼졌다. 행실이 나빠서 동시에 여러 남자를 꼬신다는 어린 나이에 다소 얄궂은 소문이 났다. 물론 내가 소문을 낸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보육원생들에게 퍼지고 있었다. 제 소문은 가장 늦게 듣는다고 희영은 별일 없이 시호를 따랐지만, 주변의 여아들에게 희영은 먹잇감이었다. 그녀 모르게 시호나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그녀의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남자 원생들에게 희영의 소문은 더욱 부풀려졌고 그들도 행실이 지저분하다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호는 희영을 감싸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여아들에게 희영은 안 좋은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녀가 그 소문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다른 여아들을 본보기로 혼내줬을 때였다. 자신 때문에 싸움이 난 줄도 모르고 싸움을 바라보고 있다가 사실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갔다.
“제길.”
어째서 나는 그녀에게 상처만 줄까. 시호 녀석이 괜스레 미워졌다. 자신은 얌전한채 그녀를 달래주기만 했을 뿐이니까. 이번 일로 난 원장실로 끌려가 무려 1시간동안이나 무릎꿇고 벌을 서야했다.
"영훈아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니."
난 원장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다고 소리질렀지만 신뢰감 없는 내 말보단 여아들의 말을 들어준 것 같았다.
"왜 애들을 괴롭히니, 녀석아. 그러고도 사내자식이라고 변명같지도 않은 네 말을 내가 믿으란 말이냐."
원장은 돋보기 안경을 올려쓰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힘든 티를 내며 머리 위로 올렸던 손을 꾸물거리며 슬쩍 내리려 했다.
"똑바로 손들고 벌서요. 영훈학생."
나는 속에서 욕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팔을 바짝 귀에 붙였다.
이내 나는 풀이 죽어 떨어지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네"
원장이 흘러가듯 말을 덧붙인다.
"소문은 그냥 두면 저절로 사라져요. 괜히 희영이 상처나 입지않았는지 걱정이네요."
원장은 내가 꾀병을 부리고 손을 내리려는 걸 눈감아 주려고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고아원 건물 앞 감나무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다본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거친 파도와도 같이 출렁였다. 한날한시 보육원에 들어온 그녀가 어느새 나에게는 삶의 원동력이자 운명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그녀를 크게 신경썼는데 왜 그녀가 내 눈에 그렇게 밟히는지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 온통 그녀의 모습만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내 시선에 닿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녀는 크게 앓았다. 모든 고아원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그녀의 흉을 보던 녀석들조차 그녀의 야위고 힘없는 모습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앓는 동안 그녀는 부모를 애써 찾았다고 들었다. 이런 때도 시호 녀석은 하나 도움이 안 된다니까.
한동안 출입이 뜸하다가 그녀가 야윈 모습으로 밖으로 나왔을 때.
감나무 아래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모님 복수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내가 너를 지켜줄게.”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고 도망쳐 버렸다.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조차도 힘겨워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시절, 원생들 틈바구니에서 버거워하기만 하던 그녀가 어느덧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되었다. 식사시간 내게 건네었던 우유 한 잔이 그 시절 나에게는 힘이 되었고, 의식하지 않았지만 갚아야 할 채무가 되었다.
희영
아이들은 꿈을 먹고 자란다. 꿈이 없는 아이들은 꿈을 꾸는 아이들을 항상 동경한다. 그 당시 꿈을 지닌 아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보육원으로 온 대부분의 아이는 한결같이 꿈을 잃어버렸다. 다시 꿈을 그리며 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는지. 보육원은 부모와 가족을 잃고 떠돌던 아이들이 사는 곳이다.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데, 꿈은 사치인 것이다. 당시의 우리에겐 희망이란 없었다. 희영, 시호, 그리고 나 정도를 제외하면 삶이란 하루 하루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의미가 강했는데 그때의 우리는 삶의 의욕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희영을 지키겠다는 나를 제외한다면 꿈이 있는 사람은 희영과 시호등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이들이 얼마나 빛이 나던 존재였던지.
보육원은 단체생활을 하는 곳이라 청결을 중요시했다. 어려운 시기기에 아프면 손해라고 주말마다 원장의 손에 이끌려 대청소를 해야만 했다. 침대며 가구, 상자들을 치우고 나면 우리는 물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아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남자아이들은 상자에 곤충을 담아 좋아하는 여아들의 침대보 밑에 놓아두었다. 그날은 귀엽기만 하던 희영이 당첨이었다. 이때의 나는 희영을 외면해야 했는데, 당시 아이들의 연대감이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어서 나도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그 일에 동참해야만 했다.
"캬아악."
이불보를 들추자 놀란 여아들이 자지러졌다
"깔깔깔"
"하하하."
"희희."
우리는 그걸 보며 한바탕 낄낄거리거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리곤 곧 우리들이 나타나 곤충을 잡아주는데, 그날따라 희영의 그 당당하던 모습. 예쁘장하고 고운 희영이 남자아이들 보라는 듯, 벌레를 붙잡아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다시는 이런 일로 놀라지마."
여아들을 돌아보며 이런 일로 놀림받지 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녀 자신도 놀라리만치 대담한 행동이었다. 여아들도 그때야말로 희영의 편이 되어 우리를 밖으로 내쫓았다.
거리를 떠돌던 개가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먹이를 주었는데 꼬리를 치며 우리를 잘 따랐다. 그러나 우리는 개를 키울 권한이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주인이 없어서 때만 되면 먹이를 주는 우리를 찾아와 꼬리치며 먹이를 받아먹었다. 갈수록 털이 더러워지는 것이 예전 거리를 떠돌던 나와 같았다. 털빛이 바래고 더러워질수록 사람의 손길이 더욱 필요한 법인데 사람들은 점점 강아지를 외면하게 된다. 한 가족이었다가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고 떠돌다 우리에게까지 온 것인데, 우리는 받아줄 형편도 못되고.
“가여운 것,”
희영이 강아지를 안아 든다. 모두가 희영을 말렸는데.
“혼나더라도 내가 혼날 거야. 걱정하지마.”
희영이 강아지를 끌어안듯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으며 말한다.
“내가 널 지켜줄게.”
그날 희영은 원장에게 혼났지만 기어이 강아지를 지켜냈다.
원장에게 혼나며 한목숨 지켜내던 그 완강하던 희영의 모습은 백의의 천사처럼 보였다.
부식창고 털기
밤에 우리는 작당하고 부식창고를 털기로 했다. 누가 앞장서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다. 먼저 몸을 빼면 멍텅구리 바보로 낙인찍힐 것이다.
덜떨어진 우식이가 망을 본다. 인기척이 있으면 고양이 울음을 내기로 했다. 근데 걔가 고양이 울음을 지을 줄 아나?
우리는 울타리가 있는 창고의 우측을 맴돌아 가장 허술한 개구멍을 공략했다. 올해 여름 비가 많이 내리칠 때 목재가 썩어들어가던 곳이었다. 모두 손으로 흙을 파고 있었다.
"무한아 이곳을 주먹으로 내리쳐봐."
시호가 신호를 주자 무한이 돌을 든 손으로 썩어들어가던 나무를 내리쳤다.
"퍽."
쉽게 널판지가 뒤로 꺾어지며 구멍이 커졌다.
"우와."
사실 창고에는 별게 없었지만 그때의 우리들의 눈에는 먹거리로 넘쳐났다.
몸이 날래고 재빠른 정렬이 먼저 구멍속으로 몸을 넣었다.
우리는 차례로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여아인 희영과 소희가 나중에 들어오고 나서야 무한이 구멍에 몸을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냐아옹, 냐아옹,"
우식의 소리가 들려온다.
"욘석들 뭐하는 짓이야."
우식이의 귀가 하늘로 당겨졌으리라.
"아야. 아. 아. 아."
들킨 모양이다."
"딸랑. 딸랑. 딸랑."
앞에서도 무언가 걸린 모양이다. '제길 창고에 무슨 방울이람.'
"아무도 움직이지마."
내가 동작을 멈추고 아이들에게 지시했다.
곧 방울 소리가 멈추자 들려오는 발자국소리.
"저벅. 저벅. 저벅."
우리의 가슴은 쿵쾅쿵쾅 콩알만해졌다.
"철꺽."
"끼이익."
"딸깍."
불이 밝혀지자 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하게.
정렬은 방울소리가 나는 줄에 걸린 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고 여아들은 남자원생들의 등뒤에 숨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무한이는 개구멍에 몸이 끼인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빨리 빠져나가라는 원생들의 성화에도 무한이의 몸은 구멍에 꽉 끼어있었고, 우식이는 귀를 붙잡힌 채 여기까지 끌려 걸어들어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죠."
원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는지 얼굴이 붉으스름했다.
나는 오들오들 떠는 희영을 보곤 원장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모두를 꼬드겼습니다. 죄송해요."
나는 원장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시호도 덩달아 이야기한다.
"여아들은 사실 우리들을 말리려고 사건에 말려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호는 아직까지 여아들에게 잘보이려고 하는가 보다. 밉상이다.
"쳇."
"다들 원장실로 따라와요."
그날 우리들은 호되게 욕을 먹었다. 그러나 하나 아프지 않았다. 내가 아픈 건 희영의 시호에 대한 눈길이다. 여아들이 모두 시호의 말에 감동받았나보다.
'난 뭔데.' 눈길하나 주질 안냐고.'
꿈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고 사물의 차이를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남들과 다름에서 오는 차이 또한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서로 비교 대상이 된다.
내가 가장 많이 절망하는 것은 사회계층에 대한 편협한 눈초리.
이미 결손가정이고 보육원 출신이라는 명패가 초등학교 시절 달려있었다. 가정조사를 왜 이렇게 공공연하게 시행하는 것인지, 선생님의 눈감고 손들라는 말에 차라리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차라리 국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속으로 부르짖고 싶었지만 이런 도움조차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대물림되리라.
또래의 아이들은 외견상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경제력의 차이에서 오는 아이의 여유있는 태도와 기도가 반장과 부반장을 만들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교육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정이라면 반장과 부반장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함에 보육원 출신으로 반장과 부반장은 거의 될수가 없는 일인데 시호와 희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진 자의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던지.
“행실이 나쁘잖아요. 보육원 출신은.”
“그 부모가 누군 줄 알고.”
모르는 사람들은 보육원 출신이 뭐 반장, 부반장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부당한 시선들과 맞서 싸우며 자신의 그릇을 지켜야 하기에 이미 그들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함을 넘어서는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했다. 난 그때도 어중간했는데, 보육원 아이들은 그 시기쯤 해서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사회의 기대대로 잘 커 준 아이들이 있는 반면, 어긋나 어둠의 세계로 발을 딛는 아이도 있었다.
“너 망 잘 보고 있어라.”
나보다 한 살 많은 정렬이 편의점에 들러 물건을 훔친다. 한호가 CCTV 화면을 가리며 나더러 편의점 형의 동태를 살피란다.
미러의 앵글로 편의점 형이 슬쩍 정렬이 있는 쪽을 바라다본다.
"형 이건 얼마에요."
난 눈치껏 가격을 묻고 난 뒤 돈이 모자라다는 듯 다시 제자리에 물건을 놓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난 처음으로 이들을 따라 학교에서 귀가하며 편의점에 들렀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훔친 물건을 건네받았을 때, 이렇게 아이들이 범죄에 물들어 가는구나 생각했다.
난 다시 이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난 몬스터도 싫지만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되어선 안된다고 다짐했다. 덕분에 그들에게 둘러싸여 바닥을 뒹굴러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난 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한 우등생 부류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시호와 희영은 앞날을 대비해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반장과 부반장을 맡으며 일을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살았다. 그들은 어릴적 목표인 헌터가 되어 몬스터를 사냥하는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헌터가 되는 동안 사회에서 버틸 자금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시호와 희영은 마나를 느낄 정도였지만, 아직 각성을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각성자들은 대개 이렇게 마나를 느끼다가 어느 순간 각성을 하곤 하였다. 이게 일반적인 현상이고 갑자기 발현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난 이들과 가까이 하고 싶고 희영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내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타 차원이 지구에 결합함으로써 지구에도 마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마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인 공기처럼 느껴지지만, 가공 방법에 따라 형태를 바꾸기도 하였다. 마나에 의지가 결합하면 끈끈한 하나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그것을 사용자의 발현능력에 따라 날카로운 속성을 검에 씌우면 검기가 되는 것이요, 덩어리에 속성이 결합하면 마법이 되는 것이었다. 현대의 무기가 왜 몬스터들에게 통하지 않는가를 따져보면 몬스터들이 화기의 폭발력을 그 끈끈한 마나의 덩어리로 감싸 소멸시키면 되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마나를 가공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양각색의 능력들이 존재하지만, 기본은 그것이다. 마나를 느끼고 마나에 의지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각성자의 최소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면 마나에 의지를 부여하는 능력의 크기에 따라 각성자의 능력치를 예상할 수 있게되고 몬스터의 등급을 부여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발명될 고글처럼 생긴측정기를 사용하면 대개 그 공격력과 능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마나를 느낀다는 것, 그것만으로 각성은 예정되어있는 것이다. 시호와 희영은 축복받은 케이스였다. 아직 이런 마나에 대한 개념이 알려지기 전이어서 그렇지, 그렇지않았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시호와 희영을 데려가려고 줄을 설 것이었다. 아마 지금이라도 그 가능성에 투자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느덧 보육원의 맏이가 되었다. 무한이는 어수룩하고 식탐이 강해 아이들과 여전히 다투기도 했지만, 보육원의 리더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젠, 꼬마 아이들의 맏형으로 아이들의 말썽을 해결해야 했고, 다툼을 말리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희영은 보육원의 최고 언니로서 아이들을 돌보곤 했는데, 그녀의 말이라면 아이들도 잘 따랐다. 책임감도 강하지만, 그 나이대의 아이들을 이해하기에 그녀만큼 적합한 인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육원의 살림이 원장님 이하 봉사자의 노력으로 그나마 겨우 운영되던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화기가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였고 아직은 능력자들이 많이 개화하지 않은 개도기였기 때문이었다. 몬스터의 침공과 공격으로 나라에서는 지원금이 줄었고 개인과 기업의 후원금도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호는 그 이전에 양부모를 만나 떠난 시점이라 보육원의 어려움을 알게 된 건 남아있던 우리부터였다. 그때부터인가 희영은 보육원을 떠날 마음을 먹었던 것같다. 한 사람의 입이라도 줄여야 했고 합류할 헌터 무리에게 자신의 몸값을 제시하여 보육원의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난 그녀의 그러한 생각을 전혀 짐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직 어리고 검증이 되지 않아 각성 후 차차 몸값을 정하기로 하고 그 일부를 복지원에 부쳐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곧 그녀는 원장과 상의를 하였고 떠날 날짜를 정하였다. 자신이 몸담았던 복지원을 떠나자니 그녀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나보다. 배식을 할 때조차 아이들의 그릇에 자신의 몫까지 듬뿍 담아 주었는데 이곳에서의 마지막이란 걸 스스로 예감하였나보다.
정렬과 한호는 복지원 내에 자신들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이미 복지원을 떠날 나이가 되어 먹고 살 준비를 하여야 하건만 마을 건달들과의 알음알음으로 어둠의 세계로 진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렬은 희영이 눈엣가시였다. 막상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준능력자인 희영에게 맞서야 하는데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또한, 그녀를 따르는 무리가 복지원 내에 많았으므로 그녀와의 충돌은 바라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그녀의 험담만 늘어놓았는데 최근 그녀가 복지원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복지원 내에 떠돌자 원생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그러나 그녀는 그런 말들을 모두 무시하였고 원장도 요즘은 그녀를 열외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시기에 자신만 잘살겠다고 떠난다니 퇫.”
“원장이 잘 키워놨더니 이기적이었네.”
“능력 좀 있다고 우린 하찮은가 보지.”
"아니야, 아니라고."
난 그들에게 그렇지않다고 일침을 가한 뒤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나의 의구심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정렬 패거리들은 이렇게 뒤로 그녀의 험담을 하며 불만이 생긴 아이들을 자신의 세력에 끌여들였다. 원생들도 이번 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의 진심을 모른 체 그녀를 다그쳤다.
“왜 떠나려는 건데.”
“더는 날 찾지 말고 잊어버려.”
“그게 무슨 말인데,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되겠니.”
"난 널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날 잊어. 단지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애들을 잘 지켜주길 바라는 것 뿐이야."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난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결정을 두고 곡해할 뻔하였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난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놓아줄 용기도 그녀를 지켜줄 능력도 없었다.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는데 그녀를 지켜주고픈 내 꿈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녀가 떠나는 날이다.
복지원 건물 앞 감나무에 앉아 그녀를 바라다본다. 떠나려는 그녀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 것인가.
어린 원생들과 이제는 그녀를 대신하여 그들을 돌보게 된 동기들이 그녀를 배웅하고자 건물 앞에 나와 있다. 그녀는 간소하지만 손에 익은 자신의 물건들을 짐 속에 꾸리더니 복지원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을 찾아온 파티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떠나기 전 무리에 없는 나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녀를 떠나보낼 용기가 없는 나는 그녀 앞에 나설 수 없었다.
나는 괜히 감나무 둥치를 발끝으로 두드렸다
곧 그녀는 일행을 따라 전장으로 떠났고 나는 더이상 서 있을 힘마저 없어서 감나무에 기대어 앉아 떠나가는 그녀를 그려보았다. 해가 저물고 저물도록 그렇게 앉아만 있었는데 물기가 두 눈에 머물다 흩어졌다.
그녀를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짐꾼으로라도 그녀를 따라 나서야 했는데. 언젠가 어디서 다시 만나지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이렇게 보낼 일이 아니었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난 그녀가 오르던 감나무에 올라 떠나간 거리를 헤아려 본다. 이미 눈으로 헤아릴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왜 그녀가 나무에 올라 먼곳을 응시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감나무에 올랐던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함으로써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녀의 앞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능력이 모자란다 해도 더이상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도야 간다. 그녀를 구하러 나도야 갈것이다.
화장실에서 얼굴을 닦고 나오는 나에게 정렬과 한호가 다가왔다.
“이야, 이제 끈 떨어진 연이네. 영훈이 너도, 무한이도.”
정렬이 이제까지 다물었던 이빨을 그제서야 드러낸다. 이젠 자신의 세상이 왔다고 여기는 모양.
“형은 아직도 희영이 못마땅한 겁니까. 이제 떠난 사람이에요. 그만 좀 하세요.”
나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그래도 심사가 복잡한데 귀찮은 사람을 만났다.
“그래 다들 살기 어려워졌지. 저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난 아이다. 넌 그렇게 계속 두둔하고 싶니.”
“형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형 무서운 줄은 아냐.”
“왜 그 얘기가 나오는 건데요.”
“너희들이 날 무시하잖아. 난 아이들을 위해 길을 여는 중인데. 이젠 너희도 날 좀 도와라.”
“형이 하는 일은 범죄입니다. 원장님이 우릴 그렇게 키웠나요. 아닐 겁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라고 항상 말하지 않았나요.”
“누군 모르는 줄 아냐, 그렇다고 우릴 세상이 알아봐 준데, 너도 알잖아. 세상이 우릴 어떻게 버렸는지. 어지러울 때다. 지금이 그 기회야.”
“형은 아이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겁니다. 조직에 인정받으려고요.”
“니가 뭘 아는데.”
정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정렬이 눈치를 주자 한호가 길을 막는다.
“방해만 하지 마라. 이젠 이곳은 내가 접수할 테니.”
정렬의 주먹이 명치로 날아든다. 한호가 망을 보고 정렬이 나를 때려눕힌다. 난 그를 막아보지만 그럴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무한이가 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덩치가 남들보다 한 뼘은 더 큰 무한이는 힘이 장사였다. 아둔한 편이지만 몸은 날래었다.
“영훈아 이제 우리 어떻게 해.”
“뭘.”
“아이들 말야. 정렬이 형에게 맡겨도 돼?”
“이 복지원이 어떻게 지켜진 건데.”
“....”
“너도 알잖아.”
그날 일이 떠오른다. 정렬과 그 패거리가 물건을 훔치다 걸려 경찰서로 송치되던 날. 주인과 주민들이 복지원에 찾아왔다.
체격이 작고 셈이 빠를 것 같은 한 사내가 말했다.
“아이들을 깡패로 키울 거라면 나랏돈을 받지 말던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방치할 거면 그냥 애들을 헌터에게 맡기라고. 일손도 부족하다던데.”
군복을 작업복으로 입은 우람한 사내가 말을 받는다.
“안 그래도 몬스터 때문에 살기 어려운 판인데 복지원 지원할 돈이 어디 있냐고, 안 그래도 이 새끼들 사건만 일으키는데.”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끈 주민이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원장, 나오라고 해. 이참에 복지원 없애버리게.”
마을 사람들이 복지원 원장실로 몰려들었다. 원장은 경찰서에서 아이들 일을 처리하느라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우린 서로 손을 붙잡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아저씨들 우리에게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뭐라!”
짧은 스포츠형 머리의 사내가 희영을 노려보았다.
“우리 아빠는 사람들을 대신해 몬스터 조사나갔다가 실종됐어.”
“그래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고아가 된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
“아저씨들은 자식도 없어.”
“이 어린애가 뭘 안다고 재잘거려.”
집값 떨어진다고 호들갑 떨던 뚱보 아줌마가 희영의 입을 막는다.
“어리다고 저희에게 막 대해도 되나요.”
시호가 희영을 막아서며 말한다.
“꼬마 녀석이 어른들 말에 꼬박꼬박 대드는 거봐. 이래서 가정교욱이 중요한 거야. 한번 혼나볼테야.”
“저희가 힘이 없어 참는 줄 아시나봐요.”
시호가 마나를 끓어 올리자 주변의 대기가 진동하였다. 그는 마법에 소질을 보였다.
“어머나, 어른한테 하는 짓이 뭐람. 그러니까 고아라 흉보는 거지.”
뚱보 아줌마가 일갈한다.
희영과 시호, 그리고 나머지 원생들이 그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며 눈가가 아른거렸다.
“저기요, 여기 어른들 아무도 없어요. 경찰서에 가셨는데 거기 가서 어른들과 얘기하세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한마디씩 하더니 각자 갈 곳으로 돌아갔다. 괜히 여기서 싸움이라도 났담 아이들에게 망신이라도 당했을 것이다. 나는 눈시울이 불거진 아이들을 바라봤다. 잘 참아냈다. 울컥하던 아이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정렬 일행이 보육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아이들에게 화풀이했다.
“아이씨 뭘 봐.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사회가 우릴 이렇게 몰아세운 거라고.”
저들이 죄 없다고 말하지만, 보육원 원장은 경찰서에서 그들을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 것이다. 그들도 무안하기에 더는 입을 놀리지 않았다.
사건
밤에 도둑이 들었다. 보육원 원장실이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저기 어질러지고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 되는가 싶었는데 경찰들이 보육원 원장실로 압수수색하러 왔다. 혐의는 공금횡령. 원장은 착실하게 적어놓은 장부를 내밀었지만 이상하게도 위조된 이중장부였고 원장이 돈을 착복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장은 그렇게 경찰서로 끌려갔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도둑과 위조장부는 함께 연결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로 보육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질 예정이었고 다른 곳으로 가기 싫어하던 아이들은 모두 정렬의 조직으로 흘러들어갔다. 희영의 마지막 부탁마져 들어줄 수 없어서 나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 내게 남아있던 무한이 진지하게 나에게 물어온다.
"앞으로 어떻게 할거니."
"글쎄, 나도 모르겠다. 우선 정렬이 형에게 가봐야겠는데, 자신이 없다. 넌 어떻게 할래."
"그 형들 널보면 이젠 그냥두지 않을 거야. 어쨌든 나도 널 따라갔으면 해. 의리남 아니겠냐."
"그 의리 두번 지키다가 몸이 성하지 못할텐데."
"어차피 우린 갈 곳도 없다."
"......"
갈 곳이 있다는 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인데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야말로 몸으로 부딪쳐야 할 때다.
우린 정렬이 형이 아이들에게 오라고 하던 나인델프 클럽을 찾았다. 간혹 가다 삐끼들이 우리를 보더니 그냥 지나쳐간다. 아직 새파란 청춘인 걸 아는 모양이다. 혹 삐끼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아직 일을 맡기기에는 어리고 어리숙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헌터들에게 팔려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나인델프 입구에 다가서자 기도가 우리의 출입을 막는다.
"애들은 가라."
우리의 복장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저흰 정렬이 형이 불러서 왔는데요."
"지랄한다. 이젠 별 떨거지들을 다 데려오네. 지하로 내려가 복도 오른쪽으로 가봐라. 너희같은 새끼들로 넘쳐나니."
또 다른 기도가 말한다.
"너희도 복지원생이냐."
"그런데요."
"넘 늦게 왔는데, 걔네들은 이미 바위굴 애들이 데려갔는데 말야."
"아! 저흰 정렬이 형 보러왔어요."
"그래, 그럼 그리로 가봐라. 사고치면 국물도 없다."
"예. 그럼."
나는 두 기도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 오른쪽으로 돌기 전 무한이를 남겨놓고 나홀로 오른쪽 통로로 이동했다. 무한이 같이 가자며 졸라댔지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몰라 홀로 들어갔다. 오른쪽 통로에는 단 하나의 문이 존재했다. 문 앞에서 나는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 지키고 있던 인물들 서너명이 내가 들어가자 동시에 일어선다.
"넌 뭐야."
그들 주변에는 어린 아이들이 다들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전 정렬이 형이 보냈는데요. 형은 어디있나요."
"너도 얘네들과 같이 헌터들에게로 보내지는 거냐."
"아니요, 전 단지 형이 불러서 잠시 보러왔어요."
내가 일어선 녀석들의 면목을 잠시 살펴보았다.
하나는 털이 복슬복슬한 녀석으로 손에는 각목을 들고 있었고, 체육복 차림의 한 녀석은 야구배트를 들었다. 또 한 녀석은 체구는 좀 작으나 다부지게 생겼고 환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가장 상석이라고 해야하나. 그들 중에 의자에 앉아있던 녀석은 그냥 보통의 청년처럼 말끔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그 녀석이 나를 턱짓으로 가르키더니 내게 묻는다.
"뭐하러 왔는데."
"그냥 형 만나러 왔는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녀석은 따까리중 따까리인데 여기가 무슨 자기가 전세낸 술집인줄 알아! 오란다면 올 수 있는?"
"그치만 불러서 왔는데요."
"너도 이리로 와서 얘네들 옆에 앉아있어. 내 무슨 일인지 알아볼테니."
나는 이러면 안되는데 다른 방도는 없나 눈을 희번뜩였다.
"희찬이 너는 정렬이 있음 데려오고, 없으면 전화해서 튀어오도록 해."
털이 많은 녀석이 문을 열고 나간다. 나가면 무한이와 부딪칠텐데 걱정이다. 좀 있으려니 문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하다. 무한이의 황소 주먹에 나가떨어진 모양이다. 다시 앉아있던 녀석이 턱으로 문을 가르키니 다른 두 녀석이 함께 문을 열고 나간다. 난 혼자 남은 녀석을 보곤 이때다 싶었다. 내가 시작하면 아이들이 돕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말끔한 청년에게 덤볐던 것인데.
내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 의자에 앉은 녀석의 발이 내 상체를 걷어찬다. 나는 뒤로 굴러 넘어지고 아이들은 여전히 무엇이 무서운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무언가에 결박당한 것처럼 기우뚱거리며 다시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무한이 무언가에 얻어맞아 멍이 든 채로 내 옆에 꿇려있었다. 나는 내 몸을 살펴봤지만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다만 모든 뼈마디가 부러졌는지 움직일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쓸만한 것 같으니 나두고, 망가진 녀석은 개미굴 녀석들에게 보내."
무한이 녀석은 나를 살린답시고 그들에게 굴복한 모양이다. 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체념한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정렬이 그 녀석은 당분간 뺑뺑이 돌려서 정신 좀 차리게 하고."
"넵."
말끔한 청년이 나를 바라보다 문을 열고 나간다.
"병신아! 뭘 바라봐."
"퍽."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고 다시 쓰러졌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나는 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렸는지 부러진 곳들이 뒤틀려 멍이 들고 아파왔다. 난 한 병동안에 갇혀있었는데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 금새 눈치 챌 수 있었다. 난 실험용 쥐였다. 그들에게 난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개미굴이란 이름은 우리가 개미1호, 개미2호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여기선 개미128호가 내 이름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개미 128호
나는 모르모트가 되어 누워있다. 뼈가 붙으면 망치로 부수고 다시 약을 투여하는데 생전처음보는 인간들이 나타나 주문을 외운다. 그러면 나의 뼈는 다시 아무는데 그때마다 처절한 고통이 따른다. 나의 눈동자는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난 희영을 생각하며 참아내는데 피부가 터지며 고름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죽은 피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가끔은 식사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자기가 담당한 일만을 묵묵히 할 뿐이다.
"저기요. 날 언제까지 여기에 두는지 알 수 있나요."
"날 풀어주기는 하는 걸까요."
"이 실험이 끝나고 나면 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난 그들에게 무언가 끊임없이 물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얻을 수 없었다.
뼈가 이상하게 붙었다. 제 장소가 아닌 곳에. 난 약을 투여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그들은 내 몸을 살펴보곤 차트에 체크만 하더니 냉큼 사라졌다.
내 몸을 철저히 망가트리는 연습을 하는 것인가?
저희들끼리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무슨 세균도 투입하고 독성의 이물들을 잔뜩 몸속에 주입하기도 한다고도 했다. 나는 몸에 수포가 나거나 거품을 물고 쓰러질때도 있었으나 주문을 외는 인간들이 나타나면 곧 그 아픔이 가시기 시작했다. 용케도 살아남은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입하는 주사기를 빼앗아 놈들을 몸에 꽂아 넣기도 했고, 그럴때면 여지없이 폭력이 행사되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팔뼈가 부러져 살을 뚫고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 뼈를 놈들의 목울대에 찔러 넣기도 했는데 나를 담당하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팔다리가 묶인 채 다시 실험에 투입돼곤 했다. 여태까지 나처럼 잘 버틴 사람이 있었을까? 다른 병동 사람들의 침대는 자주 시트를 갈아대고는 했다. 짐작해 보면 내 옆 병실의 사람과 나 이외에는 계속 죽어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124호와 나는 밥을 먹을 때마다 호명되는 것을 보면 기적적으로 우리 둘만 살아남은게 아닌가 싶다. 점점 더 큰 실험들이 시작되고 있다. 내가 살아남아 적응력이 높아질수록 더욱 위험한 실험들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여보게, 자넨 괜찮은가. 난 온몸에 화상을 입었네. 더이상 버터낼 자신이 없네."
124호와 난 밤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실험은 다시 내게 행해지는데 더욱 많은 표본을 얻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좀더 버텨보세요. 그들이라고 실험대상물이 쉽게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난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몰골이라네.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거야."
"저도 뼈들이 이미 잘못 붙어 사람 형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사는 수 밖에요. 살아남아 저들을 응징하지 않는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질거예요."
"난 이미 틀린 것 같네. 내가 내일 아침 소란을 부릴테니 그때 자네가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네."
"......."
아침이 되자 그가 예고했던 소동이 벌어졌고 나를 감시하는 인원마저 124호에게로 몰려갔다. 아마 내가 발광하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아저씨 좀만 더 버텨주세요.'
사람이 죽는 일인데 난 나의 욕심만을 내세우고 있다. 내가 잘못된 것인가. 내 인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좀더 살아남아 내 탈출시간을 벌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난 나를 지키던 마지막 경비를 떠 밀었다.
"철푸덕."
그를 무릎으로 찍어 누르고 문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자 나의 탈출을 대비하는 사이렌이 울린다. 아마도 내 몸 어딘가에 전자칩이 심어져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를 쫒는 사람은 없었다. 124호가 제대로 난동을 부린 탓이리라.
난 달리고 달려서 병실 카운터로 갔다. 거기에 상주하던 간호사를 쓰러뜨리고 이제서야 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병원건물을 나서려는데 마지막으로 대기하고 있던 무장한 대원에게 걸렸다. 아마도 나인델프에서 봤던 이들과 비슷한 능력자들인 것 같았다. 난 다시 그들에 의해 쓰러졌고 병실로 옮겨졌다. 내가 깨어났을 때 무심결에 124호의 탈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날 이용했던 것이다. 적당히 발버둥치다 내가 탈출 소동을 벌였을 때를 이용하여 그가 봐두었던 탈출로를 통해 도망친 것이다. 그렇다. 누가 자신의 목숨을 가벼히 여기겠는가.
폭주
난 다시 병실에 누워 창밖을 바라다본다. 점차 삶에대한 의지가 꺼져간다. 희영의 모습도 희미하게 지워져간다. 그러나 하루하루 삶의 의지가 꺼져갈수록 과거의 기억만이 더욱 아련하게 떠오른다. 삶에 대한 자세가 어중간하였던 만큼 포기하기도 쉽다고 과거의 내가 나에게 말한다. 내 모습이 짐승처럼 바뀌면서 그녀와의 조우도 두려워졌다. 점점더 조그마해진 내 자아가 어둠속으로 숨어든다. 난 유일하게 병실에 살아남은 개미였다. 개미처럼 더듬거리며 삶의 조각들을 찾아 헤맨다. 내 기억이 사실과 부합한지 이젠 확신할 수조차 없었다. 실험은 계속되었고 상처에 내성이 생긴 내 몸뚱이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도 스스로 치유되었다. 위험을 느낀 병동의 원장이 내 몸을 더욱 단단하게 침대에 결박시켰다. 그러나 생체실험에 대한 고통은 여전하였는데 아픔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의 상처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으으..."
난 오래토록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으므로 성대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은 퇴화하고 난 더듬거리는 개미와 같았다.
"이봐, 이보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를 쳐다보았다. 원장이 말한다.
"이제 모든 실험이 끝났다네. 마지막으로 방사능 실험을 한번 해야겠는데 그러고 나면 자네와는 영 이별이네."
'그 실험으로 내가 살아남을 것 같은가.'라고 나는 말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나는 소리는 괴성뿐이었다.
"어쨌거나 자네한테는 미안하게 되었네. 실험이 끝나면 이 병실도 폐쇄해야하고 모든 걸 소각해야겠네."
"으으으."
"덕분에 많은 힐러들의 능력이 향상되었다네. 자네 도움이 컸네."
이 대화 이후에 난 방사능실험을 받았다. 처음에는 몸이 붕괴하다가 세포들이 재생하느라 거품이 일었고 다시 죽어나가고 다시 재생하고. 내 몸은 거대한 비누거품같이 부풀었다. 며칠간 붕괴와 재생이 동시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로는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한지 연구원들이 달라붙어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병실을 폐쇄한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으레 죽겠거니 생각했으리라.
내 몸은 처음부터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거품속에서 내 몸은 정상인과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 사실을 알지못했다. 잘못하다가는 거품에 있는 방사능에 피폭을 당할 수 있었으니말이다. 거품이 점차 사그라지고 제대로 된 내 모습이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새로운 연구대상을 찾은거나 다름 없었다. 방사능에서 살아남은, 아니 재구성된 내 몸은 그들의 연구과제로 남았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식사를 가져오는 사람 중 한명이 나에게 말을 한다.
"형, 나 지호야. 복지원 기억나. 우린 바위굴 사람들에게 끌려갔는데 모두 인성을 제거당하고 꼭두각시가 되는 수술을 받았어. 난 어느 순간 기억이 돌아왔지만...... 형 내가 풀어줄테니 복수를 해줬으면 해."
"으으으으."
난 눈물이 흘러나왔다.
"형이 못하더라도 시호형이나 희영누나에게 찾아가 복수해달라고 말해줘. 부탁이야. 이젠 나도 못 견딜 것 같아. 형 부탁이야."
지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꺼냈는지 지호의 손에 칼이 쥐어져있었다. 그 칼로 나를 힘껏 찌른다.
"윽."
나는 움찔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삼켰다. 지호가 말한다.
"형 발신장치는 내가 지금 빼냈어. 내가 갖고 있을께. 형 옷도 나랑 비슷한 걸로 챙겨왔어. 이곳을 나가면 누가 물어도 아무 말 하지말고 내가 온 곳으로 나가면 돼. 형 꼭 복수를 해줘."
지호는 자신이 온 길을 여러번 되뇌며 가르쳐줬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한 길을 기억해두었다.
난 발신장치가 빠져나간 몸을 바라보았다. 발신장치는 뼈에 감겨있었는데 이를 빼내 지호가 자신의 손목에 둘둘 감았다. 내 상처는 금새 아물었다. 난 지호가 준 옷으로 갈아입고 그를 바라본다.
'넌 어떻게 돼.'라고 묻는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지호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굳굳하게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아무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말이 백번의 말보다 더 나를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우리 복지원생들의 복수를 하러 나는 간다. 우선 정렬이 형부터 보아야겠다.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무한이 녀석도 되찾아야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난 꼭 죽음을 앞둔 병사처럼 비장해졌다.
음산한 병원을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만의 왕국으로 보이는 병원과 주변의 풍광, 시체를 아무렇게나 매장하였는지 그 주위에는 구덩이들이 여럿 보였다. 매장을 담당하는 이들이 보이기에 나는 지호가 말한 인부들에 슬쩍 끼어들어갔다. 간부가 지시하자 삽과 가래를 들었던 꼭두각시 일꾼들이 장비를 트럭에 싣고 그들도 짐칸에 올라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트럭의 뒤에 올라탄다. 아마도 실내에서 일하는 일꾼과 이곳에서 일하는 꼭두각시가 나뉘어있던 모양이다. 흙이 묻은 일꾼들과 피와 약품냄새가 진동하는 지호와 같은 자가 따로 있었다. 이 트럭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트럭에 실려있는 삽을 하나 움켜쥐었다. 트럭이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거기서부터 복수의 계획을 짤 생각이다. 혼자서 이들을 물리치기에는 나에게 너무 힘이 없었다.
트럭은 산속에 있던 병원을 빠져나와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난 위치를 기억하기 위해 차가 이동한 지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인가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트럭은 아스팔트가 깔린 길을 달리고 있었다. 상주로 통하는 길목인가, 이정표가 보이고 검문소를 통과해 우리는 상경하고 있었다. 검문소는 몬스터들이 활동하면서부터 생긴 인간의 보루였다. 우리나라의 지형도 많이 변해 바다가 있는 장소에도 대륙이 생겨나 붙어 있었다. 인간이 만든 길은 반대로 몬스터들이 올라오기 쉬운 길목이 되었고 그런 곳마다 검문소들이 생겨나 헌터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트럭은 헌터들과 어떤 접점이 있었는지 검문도 받지 않았는데 무사통과였고 그럴때마다 난 적들의 규모가 꽤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수록 복수심이 솟아오르면 좋으련만 점점 나 자신을 믿지못하고 위축됐다.
다시 시내 어딘가로 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 차가 멈추었을 때 난 그 길로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에 탄 간부 하나가 꼭두각시들을 향해 나를 잡으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와 동시에 인부들이 차에서 내려 나를 뒤쫓았다. 꼭두각시가 된 그들과의 싸움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들도 다 나와 같은 피해자니까. 거리는 이내 아우성이었다.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꼭두각시들은 다가오는 차에 치이거나 사람들의 인파에 섞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간부들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차에서 내려 그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나는 가까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몰래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다시 그들을 싣고 차가 떠나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중 떠나지 않은 한 간부가 내 위치를 알아차리고 편의점으로 다가온다. 삽 한자루만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그 녀석의 능력을 난 가늠할 수 없었다.
"휙"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서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인지 주인인지는 모르나 젊은 사람이 그를 보고 인사를 한다. 그는 점원의 말을 무시한채 나에게 다가와 말한다.
"다 도망간 겁니까. 어떻게 제 기억을 찾았는지 궁금하군요."
아직 나를 바위굴 사람으로 아는 모양이다.
나는 아직 제대로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너ㅎ ㅣ 들 이 그 ㄹ ㅓ 고 ㄷ ㅗ 사라 ㅁ이 ㄴ가."
나는 다급히 점원을 바라보았다. 어서 이 상황을 파악하고 경찰에 연락하라고.
그러나 점원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가 담배가 있는 가판대 밑에 놓인 라이터를 공중으로 부양시키더니 폭발시켰다. 점원이 그 폭발에 휩쓸려 쓰러졌다. 녀석은 염동력을 사용하는 능력자다. 선반위에 놓인 물건들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고 급기야 선반도 나를 향해 쓰러졌다. 그위로 무거운 물건들이 마구 쏟아져내렸고 그제서야 그가 다가와 무릎을 꿇고 나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도망칠 수는 없네. 괜한 짓을 했군. 곧 저 녀석처럼 저세상 구경을 시켜주지."
그렇게 말하곤 쓰러져있는 점원을 슬며시 바라다본다. 난 선반에 깔려 쓰러졌지만 재생능력 덕분에 원상태로 돌아왔다. 난 주변에 흩어진 사무용품 중 샤프를 발견하곤 있는 힘껏 녀석의 발등을 찍었다.
"악."
그가 발등을 부여잡고 몸을 구부리자 난 다시 녀석의 목에 샤프를 박아넣었다.
"끅."
피가 튀고 녀석이 쓰러진다. 난 선반을 치우고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ㅁ ㅗ드 ㄴ 거 시 너 ㅎ ㅣ뜨 ㅅㄷ ㅐ로 되 ㅈ ㅣ느 ㄴ 않 으 ㄹ 거 ㅇ ㅑ."
난 발버둥치는 녀석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편의점을 뛰쳐나왔다. 첫 살인이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손발이 떨려왔다. 복수를 하려면 이런 일을 무수히 겪어야 하는데 마음이 또다시 요동을 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먼저 시호나 희영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나약한 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잠적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 누군가 먹을 걸 나에게 거져 주지는 않는다. 복수하기도 전에 이런 삶이란 난관에 부딪혔다. 그들 눈을 피해 복수도 해야하지만 먼저 내가 살아남아야 복수도 할 수 있다. 난 떠돌이 아이들을 모았다. 그들은 어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당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에게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이 되어주고자 잡부로 일하며 세상 소식을 듣는다. 허름한 창고 하나 짓고 거기에 기거하며 아이들이 물고오는 세상 소식을 엿듣는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에게 잡혀 끌려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그들이 어떤 집단이며 어느 규모인지를 캐내고자 하였다.
"세현아 오늘은 무슨 소식 없었니."
나는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치다가 시호나 희영, 무한이에 관한 소식을 물었다. 그들이라면 어디에서건 두각을 드러낼테니까.
"형, 그런 건 모르겠고 몬스터 토벌에 관한 대대적인 모집공고가 있데,"
"그거야 능력자들을 뽑는 거니 우린 관련이 없을텐데."
나는 못을 입에 물고 있다가 꺼내어 판자에 대고 망치질을 했다.
"쾅.쾅"
나는 그런 공고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아무 능력도 없는 나에게는 꿈같은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세현이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늘어놓는다.
"형, 그런 곳은 말야 이미 핵무기에 노출된 곳이야. 형이야 말로 적임자라 생각하는데."
나도 가만히 세현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본다. 인간이 범접하지 못한 몬스터들의 서식처는 한때나마 인간들의 핵무기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마나에 익숙한 그들에게는 통하는 무기가 아니어서 오히려 인간이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 되고야 말았다. 체력과 저항력이 뛰어난 능력자만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난지가 되었다.
"형은 방사능에 무해하잖아. 그런 곳이야 말로 형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그럼 이곳은 또 어떻게 하고?"
나는 아이들이 걱정스러워 세현에게 물었다.
"이곳은 내가 맡고 있을께. 어쩌면 형이 도망나온 곳에서 형을 찾을 수도 있어. 방사능에서 살아남은 형의 매커니즘을 살펴보려고 쫒고 있는지도 몰라, 차라리 나라에 적을 두고있으면 그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거야. 그러다보면 형의 친우들도 만나게 되겠지. 안그래."
세현은 자신의 생각을 주저없이 말했다. 가끔은 세현이 이처럼 현명한 말을 해 주어서 나는 놀랄 때가 많았다. 정말 세현이라면 아이들을 잘 다독이며 돌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현을 만난 건 내가 그곳을 벗어나 무작정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난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이 길거리를 떠돌았다. 그런데 그런 거리에서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오들오들 떨며 먹을 걸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일거리를 찾아 주며 돈벌 궁리를 하는 아이가 바로 세현이였다. 비 오는 날이라 거리에는 사람하나 지나지 않았고 먹을 걸 쉬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구제한 건 다름 아닌 세현이다. 가게마다 들러 심부름 꺼리를 찾고 아이들에게 일을 나눠주며 먹을 걸 들려주던 아이. 인심 험악한 가게의 주인은 그런 세현이를 물 구덩이로 떠밀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지만 말이다. 난 이런 아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에 당분간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는 내 처지를 헤아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형 우선은 공고대로 모집장소에 가봐. 돼든 안돼든 손해볼 건 없잖아.''
''그만 해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
''형은 다 좋은데 너무 우유부단해. 그렇게 당하고도 억울하지도 않아."
"......."
"나라면 말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만회해서 그들에게 일침을 놓아줄테야."
"그래. 그들이 소규모 집단이라면 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해. 다 마음먹기 달린거라고."
"알았다. 이 잔소리쟁이야. 너야말로 아이들 잘 챙기고 잘 살아남아라."
"아이들 보기 전에 가는게 나아."
내가 아이들을 보고가려고 기다리려 하자 세현은 마음 약해질 나를 생각해 그냥 떠나기를 종용했다.
"알았어. 이 무정한 녀석아."
난 남은 돈을 꺼내어 녀석에게 쥐어주었다.
"잘 있어라."
나는 힐끔 녀석을 다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내가 자라온 곳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쩐지 그들도 같은 원생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돌보지 못했던 원생들에게 미안함이 남아있었나 보다. 헌터에게 또는 바위굴로 보내진 원생들을 떠올리며 모집장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