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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신할머니 2) 계룡산 - 노인(魯認), <계룡산을 보며>(見鷄龍山) - 윤증(尹拯), <신도>(新都) 3) 정도령 4) 암수 용추 5) 신도안 6) 암소바위 |
1) 산신할머니
계룡산 신원사 방향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육중한 무게의 바위가 신기하게도 층층이 쌓여 있고, 흔들면 흔들리기도 한다. 이 바위는 누룩처럼 생겼다고 하여 누룩바위라고 불리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계룡산 산신 할머니가 치마폭에 바위를 담아서 쌓아놓고 갔다고 한다. 산신 할머니가 치마폭에 바위를 담아가지고 오면서 바위틈에 숨어있는 가재를 동쪽으로 버렸다. 그래서 동쪽방향에 있는 신도안 방향 개울가에는 가재가 많다고 한다. 서쪽으로는 ‘게’를 버려서 지금도 상월면 지경리 쪽으로는 게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10월 2일, 늦은 밤 11시에 산제당에 모여 계룡산 산신 할머니께 제사를 지낸다.
2) 계룡산
=> 계룡산은 공주시 계룡면과 계룡시에 걸쳐 있는데, 최고봉 천왕봉과 신도안이 계룡시에 속하므로 여기서 다룬다.
계룡산은 신라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이다. 조선시대에는 삼악(三嶽) 중 중악(中嶽)이다. 계룡산이란 명칭은 산의 형국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즉 “금닭이 알을 품고,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다”고 한 데서 계(鷄)와 용(龍)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鄭鑑錄) 같은 비기류(祕記類)에서는 한양을 이을 도읍지라고 한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새 도읍지를 물색하다가 계룡산 신도안 일대가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도읍지로 삼고자 하였다. 직접 신도안에 내려온 이성계는 궁궐 자리를 정한 뒤 작업을 서둘러 주춧돌까지 다 마련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웬 노인이 나타나서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고, 정씨가 팔백 년 도읍을 할 자리니 물러가라”라고 했다. 노인이 바로 계룡산신이었다. 이성계는 할 수 없이 신도안을 포기하고 물러가서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였다. 신도안에서 도읍 건설을 할 때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흙을 한곳에 모아서 털었는데 그 흙이 쌓여서 산이 되어 신트리봉이라 불린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말채찍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살아나 나무로 자라나 말채나무라고 불린다.
조선왕조가 망한 뒤 계룡산에 새로운 도읍을 세울 사람은 정도령이라고 한다. “해도정출(海島鄭出)”이라 해서 정도령이 바다에서 나온다고도 하고, “육대구월(六代九月)에 해운개(海雲開)”나 “계룡석백(鷄龍石白)하고 초포행선(草浦行船)이면 세사가지(世事可知)”와 같은 참언들도 전해진다. 공주시 계룡면의 무네미고개가 터져 물이 흐르게 되면 계룡산 형세가 산태극ㆍ수태극이 되어 도읍지가 될 것이라고도 한다.
=> 계룡산이 신이하다고 하는 갖가지 전승이 있다.
⊙ 노인(魯認) <계룡산을 보며>(見鷄龍山)
朝發公城過孔巖 아침에 공주성 떠나 공암에 들렀다가
爲憐山色卸征驂 산 빛이 너무 좋아 말안장을 풀었네.
騰身安得凌雲頂 어찌하면 구름 위로 이 몸 올려다가
突起空看萬仞巉 높이 솟은 만 길 산을 하늘에서 볼까
=> 말안장을 풀었으니 오래 머문다. 계룡산의 아름다움을 조금 말하고 많이 상상하게 한다.
⊙ 윤증(尹拯) <신도>(新都)
石在稱宮礎 돌은 궁궐의 주추라 하고
川防號御溝 내를 쌓은 둑은 어구라 하네.
道僧山記妄 도승이 남긴 산 기록 망령되고,
齊野夢言浮 시골에서 하는 말 허망한 꿈이다.
聖祖千年地 성스러운 선조가 잡은 천년의 땅,
神京漢水洲 신령한 도읍은 한강 가에 있네.
我來尋古迹 나는 여기 와서 옛 자취 찾고,
取次作秋遊 차례대로 가을 유람 하려고 하네.
=> 조선왕조의 도읍을 계룡산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그만둔 일을 말한다. “道僧山記”는 <<정감록>>(鄭鑑錄)이고, 승려가 지었다고 여겼다. 도읍을 옮기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곳을 신도안이라고 한다. 이 시는 오늘날 서울을 세종시로 옮기려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3) 정도령
<<정감록>>에서 계룡산은 장차 정도령이 도읍할 곳이라고 한다. 정도령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하면서, 그 가능성을 부인한다.
아주 먼 옛날, 나라 임금이 주색에 빠져 있어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들끓었다. 옥황상제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신하를 계룡산 신도안 정도령에게 보내 “그대는 후덕해 만백성이 우러러 보고 따를 것이다”고 하고, “계룡산에 단을 쌓고 천일기도를 하면 내 세상을 다스릴 비법을 전해 줄 것이다”고 했다.
정도령은 좌우에서 보필하는 남녀 두 사람을 데리고 계룡산 천황봉에 단을 쌓고 천일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하늘로 통하는 문인 문다래미 앞에 무릎을 꿇고 같이 기도를 드렸다. 두 남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정도령의 태평성대가 시작되면 혼인하기로 했다.
999일의 기도를 마치고 하루만 더 기도를 드리면 정도령은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할 비법을 옥황상제에게서 전달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도령이 장차 옥황상제의 자리를 탐한다는 간신들의 거짓 간언에 옥황상제가 진노해, “정도령과 두 연놈이 두 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도록 동물로 만들리라.”고 했다. 정도령은 범이 되고 두 사람은 개와 두꺼비로 환생했다. 원통하게 여긴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 흘러 암수 용추를 만들었다.
4) 암수 용추
암수 용추 이야기는 다르게 전하기도 한다. 신도안 지역에 있는 두 개의 못에 용이 살았다. 한 곳에는 암놈이 살고, 다른 한 곳에는 수놈이 살았다고 한다. 둘은 사이좋게 살다가 굴을 뚫고 나와 함께 하늘로 승천했다. 암용추와 수용추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데 밑에서 서로 연결돼 있어 암용추에 물건을 넣으면 수용추로 나온다고 한다.
5) 신도안
이성계가 도읍지로 삼으려고 했던 곳 신도안은 <<정감록>>의 예언을 근거로 좋은 세상을 열려고 하는 여러 신흥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도령 출현신앙뿐만 아니라,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단군 신앙, 개신교의 재림신앙 등의 교단이 다투어 들어섰다.
1975년 8월 정화작업이 있기 전까지 종교단체의 수는 100여 개나 되었다. 1983년 8월부터 1984년 6월 30일까지 계룡대 이전사업이 극비로 실시되어, 신도안의 모든 민간인이 밀려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종교인들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르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6) 암소바위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국운을 빌기 위해 개태사(開泰寺)를 세웠다. 승병 3천명을 두어 유사시에 군사력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세월이 흘러 고려 중엽이 되자 승병들이 인근 주민을 괴롭히는 약탈자가 되었다. 나라에서 토벌하려고 하자 최일이라는 장군이 자진해서 나섰다. 최일이 군사를 이끌고 개태사로 가자 안개가 끼어 접근할 수 없었다.
들에서 소를 몰고 밭을 가는 노인이 말했다. “이놈의 소가 최일만큼이나 미련하구나.” 최일이 듣고 무슨 말인가 물었더니 노인이 말했다. 지금의 계룡시 금암동 산 위에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찾아가서 칼로 베라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바위에서 피가 났다. 그러자 날이 개여 개태사 승병을 토벌할 수 있었다. 암소바위라고 하는 그 바위가 지금도 갈라져 있다.
=> 고려 태조가 절을 세운 뜻이 사라지고 개태사 승려들이 약탈자가 되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왕권과 불교, 이 둘에 대한 반감이 복합되어 생긴 이야기 같다. 암소바위를 칼로 치자 날이 개였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무상사 대웅전>
*<무상사 산신각>
*<계룡산 무상사> 무상사에서는 예불도 외국어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