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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무석,소주,상해를 가다 2011.9.23~9.26 (상)
노대홍선생이 인솔하는 논어.한자반 학생들의 해외학습- 금년엔 중국 남쪽 옛 오(吳)나라 땅 으로 역사탐방을 하게되었다. 안양,평촌,서울 강남,송파 등 각반의 학생들이 모이니 모두 57명이란다. 친구 네명이 의견합치를 보아 이번 여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해외여행의 경우는 한번 다녀 온 여행지는 참여키가 선뜻 내키지 않는 법이다. 상해와 소주는 여러차례 다녀온 일이 있으나, 남경과 무석은 첫 여행이라 약간의 설렘도 있었다.
대치동 구민회관 앞에서 버스가 대기하여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주니 편리했다. 인천대교와 송도 신도시를 지나 공항에 도착하니 10시반. 아직 여행사 직원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안양.평촌팀은 비행기가 중국동방항공이고 서울팀은 아시아나 라고 한다. 그쪽 수속을 끝내주고 우리 서울팀 수속을 하려다 보니 예정보다 늦었다고. 마음맞는 친구 네명이 같이 가니 아마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일차 난찡(남경 :南京) <중산릉/영곡사/장강야경> 정확히 12:30 예정시간에 출발한 비행기는 난찡의 도착시간도 정확하였다. 13시30분이니 시 차 한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 비행한 셈이다. 공항에서 두명의 현지 가이드와 미팅후 두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첫날 여정이 시작되었다. <난찡:南京> 먼저 난징(南京)에 관해 알아본다. 즉 중국 역사상 6대고도(六大古都)의 하나이다. 6대고도란 200년이상 역사를 가진 중국 국가 일본은 청과의 전쟁으로 만주에 이어 장강을 넘어 최후의 저항도시 남경에서 30만명의 대도 1968년에 중국인 단독기술로 건설된 철로와 도로 2층구조로 장장 6.7km나 되는 장강대교(長 江大橋)도 유명하다.
쑨원(孫文)의 묘 중산릉(中山陵) 늦여름 더위가 대단하다. 짧은 팔의 티셔츠로 다녀야 했다. 남경은 봄,가을이 거의 없는 도시 제당이 있고 그 뒤에 묘실이 있다.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그리고 지하에 관이 안치되어 있다. 비정을 벗어나면 선생의 유체가 있는 제단이 보인다. 3개의 타원형 문 위에 각각 민족,민권,민 생이라는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양나라 때 지은 수려한 영곡사(靈谷寺) 다. 관광사진이 붙어 있다. 30여분이 걸려 영곡사에 도착했다. 영곡사는 자금산(紫金山)풍경구에 있는 사찰이다. 514년 양무제 때 건축된 사찰로 원래는 개선 사, 북송 때는 태평흥국사로 불렀으나 명 홍무제 때 태조 주원장의 효릉을 건설하기 위해 산 동 쪽으로 옮기고 영곡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영곡사는 사찰이라기 보다는 공원화가 되었고 일본과 싸운 전사,열사들의 무덤이 같이 있는 개 혁기념탑 영곡탑이 60m,9층 높이의 동탑으로 우뚝 서 있다. 영곡사의 대표적인 건물은 무량전 과 영곡탑이다. 한 때 천여명의 승려가 수도하였으나, 태평천국의 난으로 모두 소실되고 무량 전만 1381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현존하는 중국 무량수전 중 가장 크다고 한다.
영곡사 입구의 두마리의 돌사자상은 용의 아홉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왼쪽은 암컷으로 왼발로 새끼를 밟고 있고 오른쪽은 숫컷으로 오른발로 지구를 밟고 있다. 새끼는 다산을 지구는 권력 을 상징한다. <용의 아들들은 모두 9마리.구룡九龍子라고 하는데 각각 성격과 특기가 제 각각이다.
안으로 들어서 가는 좌우에 팔손이나무가 큰 손을 벌리고 반긴다. 남반구에 많이 자라는 나무 내부 전시장에는 중국 혁명의 과정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영곡탑 가는 풀밭에 "천리향"이라는 큰 계수나무가 서 있다. 중국에서는 계화나무라고 한다. 영곡탑 입구 8면에는 成仁,成功,有志竟成, 그리고 精,忠,報,國 등 호국정신을 되새기는 글귀들 이 새겨져 있었다. 9층의 영곡탑을 걸어서 올랐다. 249계단을 원주 중심으로 돌아오른다. 치는 좋게 마련이다. 난간에 조각된 잡상(雜像)이나 아름다운 꽃문양의 원기둥 조각이 시선을 끈다.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풍경도 영곡탑 9층 꼭대기에 보는 감회가 멋지다.
영곡사 관광을 마치고 시내 한복판인 부자묘 거리로 갔다. 그곳에 식당을 정했단다. 러시아워에 걸려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제대로 관광도 못하고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설계와 건축기술로 건축한 상하 복층의 6,772m의 엄청난 크기의 다리이다.
중산능원풍경구 중산능원 입구
박애(博愛)
중산릉으로 가는 관광인파
392계단길
계단 끝에 오면 天下爲公의 아취형 3문이 있다.
중국 국민당葬 총리 손선생에 이곳에 묻히다.
三民主義 民族 民生 民權
강남논어반 일행
여행단 일행
국민혁명군진망장사공묘
일행이 모이기를 기다리며--
영곡사 입구
밟고 있는 새끼는 다산을, 지구는 권력을 상징한다. 팔손이나무 중국국민당 청천백일 휘장 아래 大仁大義가 시선을 끈다.
만지면 건강과 행운이 온다?/석거부기 무량전(无梁殿: 无는 無의 간자체이다)량 무량전으로 -- 국민혁명열사지영위
손문선생 밀랍인형/중화지광-신해혁명풍운록 여행단 일행
銘鼎垂勳/송풍각(매점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영곡탑이 나타났다.
입구
성인/상공/유지경성 영곡탑에서 내려다본 경관
원추형 껓문양 조각/잡상
계화나무 천리향/深松居(스님들의 식사제공) 남경의 공부자묘 거리 야경
식당가/가로수가 차에 받혀 깎여있는 모습 남경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2일차 남경대학살 기념관 여행시 늘 아침산보하는 습관이 있어서 룸메이트와 잠깐 호텔주변을 산책했다. 에서는 어디서나 흔히 보는 풍경이다. 아침식사에는 필수적으로 네가지가 포함된다는데 죽,만 두,찐빵,짠지가 그것이다. 죽은 저녁에 밥을 보온병에 넣어서 만든다고-- 중국인의 식사습관을 빗댄 말로 "아침은 쥐처럼,저녁은 소처럼"이라고 한다. 8시에 버스로 첫 방문지인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마당에 13개의 위령비가 서 있다.조각작품으로서의 감상보다도 처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념관 정식 이름은 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亂同胞記念館이다. 1985년에 처음 설립하고 1995년 에 새로 단장했는데 학살자 유골을 모아놓은 기념실,일본군 침략사 전시실,일본군 만행 전시실 이 있다. 일본군은 남경 진격 중에 약 30만명의 인명을 무참히 학살하여 그 잔인성을 만천하에 보였다. 2백8구의 뼈 무더기가 7층으로 쌓여있는 만인갱유적지도 있었다. 당시 죽은자의 이름 이 우난자명단장(遇亂者名單牆)에 깨알처럼 적혀 있다. 어린 소녀의 조각상이 애처롭다. 노란꽃을 손에 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평화를 강조한 공원 이다.
공부자묘(孔夫子廟) 속한다. 낮에는 부자묘를 찾는 중국인들로, 밤에는 야시장 구경을 나온 남경시민들로 북적인다. 이곳 식당 거리는 중국 전통요리로 유명한데 는 현지인들이 이용하기에는 비싼 편이라고 한다. 어제밤 이곳 번화가에서 저녁식사를 하였으나 역시 양,질면에서 불만이 많았었다.
부자묘로 입장하여 대성전(大聖殿)으로 가는 보도 좌우에 8명의 공자 제자의 조각상이 서 있다. 염경(冉耕: 字 伯牛),재여(宰予: 字 子我),단목사(端木賜: 字 子貢),염구(冉求: 字 子有), 대성전(大聖殿) 바로 앞에는 공자의 동상이 서 있다. 1993년에 세운 이 동상은 높이가 4.18m 무게가 무려 2.55톤이라고 한다. 대성전 안과 대명국자학(大明國子學)을 거쳐 예운종(禮運鐘) 과 성음고(聖音鼓)를 구경하고 뒤로 돌아가니 그 유명한 "學而不厭"<배우면서 싫어하지 않는 다>이라는 명필(朱熹 書)의 글씨가 시선을 끌었다. 논어 술이(術而)편에 나오는 말이다.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수 있었다. 중국어 시간에 배운 '꽃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남경의 우화석(雨花石)도 구 경할 수 있었다. 공자사당 관광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남경을 뒤로 하고 멀리 강소성 제2의 도 시 "우쉬(무석 无錫)"으로 달렸다. 무석은 이름이 말하듯이 주석이 없다는 뜻이다.
숙소 호텔/거리의 아침식사 장면
아침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조각작품을 구경한다. 사람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중일평화조약/전사자명단
일본군 만행에 희생된 분들
30만명의 대학살장의 평화를 기원하는 종 평화의 깃발을 든 여신상 자금화 여아/누군가 아이의 손에 노란들꽃을 쥐어주었다. 강남논어반 백월순여사 부자묘 미식가(식당거리)
부자묘 쇼핑상가/大照壁 부자묘 앞 호수에 유람선이 대기중이다. 호수에 드리워진 건물 그림자가 멋지다.
부자묘 주변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다. 부자묘 입구/나무에 기도문이 수없이 달려 있다. 부자묘 앞 광장
입구에 사자머리 모양을 한 용의 아홉째가 다산을 의미하는 새끼를 줜력을 상징하는 지구를 밟고 있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줄지어 선 공자의 제자들/영경,단목사,재여
언언/민손/염구
염옹/중유 맹자와 증삼 대성전 앞 공자상 대성전 안 / 만세사표
대성전 내 곳곳에 글귀가 걸려 있다. 대명국자학 습례루각에는 청동의 예운종이-
법고/존경각건물에는 부자묘 민간예술대관원이 있다. 논어편에 나오는 학이불염
뒷편 마당 부자묘 상가거리
무석(우쉬 无錫)의 태호(太湖)와 여원(蠡园 리위엔) 무석(无錫)은 중국 제 3의 담수호인 태호(太湖)로 유명한 강소성의 남부에 위치하며,강소성 제2 의 도시이다. 3개 현과 6개 구로 구성되어 있고 총 면적은 4650평방킬로미터다. 본래 무석(無錫)은 주석이 많이 나오는 고장이라 하여 유석(有錫)으로 불렸으나 한나라 초기에 병기를 만들기 위해 모두 파내어 '주석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의 무석으로 바뀌었다. 발달한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동남 연해 장강삼협의 각주가 시장을 활발하게 하고, 동쪽으로는 상해, 서로는 남경, 남으로는 태호와 접하고 있다. 화동지역은 역시 장강3협을 끼고 있어 양식의 창고라 할만큼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중 하나이다. 또한 3000년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역 사도시로 현재 약 430만의 인구가 있다. 무석에는 계화꽃이 많은데 바로 시화(市花)라고 한다. 무석의 시목(市木)은 벌레쫓는 향이 나는 향장목이다. 무석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중국의 제3의 담수호인 태호(太湖)와 여원(蠡园 리위엔)을 찾았다. 태호(太湖)는 예전에는 바다였으나 양자강 어귀의 삼각주가 발달함에 따라 형성된 담수호이다. 남북 약 70km, 동서 59km의 마치 바다와 같은 엄청난 크기의 호수이다. 태호에서 양식하는 진주 도 유명하여 진주를 파는 매장도 관광객들에게는 인기이다. 태호는 3백(三白)이 유명하다는데 은어,하얀새우,하얀게가 그것이다. 중국요리는 세계적으로 그 종류나 요리법이 많기로 유명하여 지방마다 고유한 명품이 있기 마련이다. 계란과 같이 삶는 은어요리도 유명하고 무석단갈비(돼지갈비)도 유명하단다.
리위엔은 장쑤성 일대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로 중국의 절세 미녀로 손꼽히는 서시와 춘추시 대 월나라의 범려가 뱃놀이 등 평생을 같이 즐겼다는 전설로 유명한 정원으로 이를 기려 1927년 에 조성했다고 한다. 라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월나라의 인물 범려는 월왕 구천의 일등 참모였다. 월나라는 뛰어난 미모를 가진 서시를 오나라의 오왕 부차의 마음을 어지럽히는데 이용한다. 그리고 월왕 부천은 와신상담(卧薪尝胆) 인내 끝에 BC 473년 서시에게 정신이 팔린 오왕 부차 를 쳐부수는 데 성공하였다. 가장 큰공을 세웠던 범려는 부천과는 환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기 쁨은 함께 누릴 수 없음을 알고 사직을 하며 떠난다. 서시를 찾아가 평생을 이곳 리위엔에서 보 냈다고 한다. 범려와 서시의 사랑을 느끼며 아름다운 蠡园을 한가로이 산책하였다. 중국 역사상 4대미인으로 꼽히는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렸 다'는 침어(浸魚)라는 별칭을 얻었다. 참고로 서시 외에 4대미인은 한나라 때 왕소군(王昭君 :낙 안落雁기러기가 날개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삼국시대 초선(貂蟬 : 폐월閉月 달이 부끄러워 한다. 사진으로 누가 더 미인인지 감상하시길-- 내일은 이 곳 태호에 있는 삼국성(삼국연의 적벽대전 드라마 촬영셋트장)을 구경할 예정이다.
여원
5A급 관광구역/여호연록
여호연록/서시전설랑
西施(浸魚) 王昭君(落雁) 貂蟬(閉月) 楊貴妃(羞花)
태호의 일부가 여호이다.
여원의 돌조각
연밭/여원에서
한가한 노인
여원의 석조각
호텔 서원대주점
호텔내 벽에 걸려있는 왕희지의 명필 蘭亭序
다음 하편에 계속됩니다. |
첫댓글 "論語" 반 여행이라 고사가 풍성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