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승의 스승을 추모했던 자리
지난 6월 12일 북산 최완택 목사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분들이 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민들레교회(북산 목사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과 손길이 모아져 에덴기도원 자리에 에 모여 목사님의 귀천 4주기를 기억하며 추모예배와 추모문화제를 연 바 있다. 1주기 추모제 때 북산 최완택 목사님의 시 ‘민들레 예수’에 곡을 입혀 세상에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되어 북걷사(북산을 걷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고, 3주기 추모제부터는 추모문화제를 인도하게 되었다. 이번 4주기 추모문화제에는 북산 목사님의 짧은 시 ‘피리’를 굿거리 장단을 입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어 모인 이들과 신명난 어깨춤과 함께 노래하면서 북산 목사님을 기렸다. 이때 추모예배 설교를 이정배 선생님께서 해주셨다. 나의 삶에 있어 스승으로 여기며 제자된 마음으로 그 고귀한 뜻을 품고 살게 해주신 소중한 분들이 계시다. 북산 목사님은 말할 나위 없고, 이정배 선생님 또한 나의 삶에 좋은 길을 안내해주신 둘도 없는 선생님이시다. 추모모임을 마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정배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슬쩍 건네셨다. 막 나온 책이라며 당신의 신학 여정에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던 분들을 떠올리며 쓰신 책이라 하셨다. <스승의 손사래>. 선생님께서는 책을 내실 때면 잊지 않고 의성으로 보내주시곤 한다. 제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부족한 제자에게 보내주시는 선생님의 사랑이 크고 귀할 뿐이다. 후에 책을 읽으며 안 사실이지만 책에 소개된 31명의 스승 가운데 신학의 지평을 넓혀주신 분으로 북산 목사님을 소개하시면서 두 분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기술하셨다. 지난 북산 목사님 4주기 추모일은 스승과 제자, 그리고 스승의 스승이 함께 만난 뜻깊은 자리였다. 이런 자리야말로 참으로 귀한 자리가 아니던가!
2. 그 스승에 그 제자
책을 건네받고는 지금의 선생님을 만들내신 스승들의 면모가 참으로 궁금했다. 책을 펼쳐 들고 31명의 이름의 면면을 살펴보니 한국사회와 교회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분들이셨다. 꼭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 삶으로 진실하게 진리를 구현해내셨던 분들이셨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31명의 이름을 다 알 수는 없었으나 선생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절로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정배 선생님과 31명의 스승들이 운명처럼 만나 맺은 깊은 인연과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되면서 스승은 제자를 알아보고, 제자는 스승을 알아보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를 알아보는 안목과 통찰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진리를 향한 진지한 태도와 그것을 구현해내려는 의지를 공통분모로 가질 때 비로소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난 이정배 선생님과 스승님들의 만남을 우연이라 보지 않는다. 진리를 향한 간절함이 서로를 만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스승에 그 제자인 것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 이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좋은 스승이 된다.
3. 선생님과의 인연을 반추하다
<스승의 손사래>을 읽으면서 이 책을 내신 이정배 선생님과의 인연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을 하고 1년이 지난 어느 채플 시간(95년도 기억하고 있다)에 이정배 선생님께서 설교단에 올라와 계셨다. 신학과였던 나는 종교철학과를 담당하시던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날 채플을 경험한 이후 이정배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각인이 되었다. 선생님은 설교 중에 일본 가톨릭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소개하셨는데, 거의 울먹이듯 떨리는 음성으로 설교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난 채플이 끝나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깊은 강>을 사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부터 난 신 앞에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었다. 이후 선생님의 강의를 찾아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과목이 '한국종교사상가론'이다. 거기서 류영모 선생님, 함석헌 선생님, 그리고 김흥호 선생님을 만났다. 이정배 선생님의 인연으로 김흥호 선생님의 책을 사 읽고, 그분의 강의 <주역>을 들었다. <스승의 손사래>에도 김흥호 선생님이 소개되어 있다.
신학교에서 이정배 선생님은 나의 신학 형성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당시 조용히 학교를 다니던 성격이어서 따로 선생님을 찾아 뵌 적은 없었다. 그저 학교에서는 물론 학교 밖 선생님의 삶의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며 그 말 없는 가르침을 배워왔을 뿐이다.
그렇게 목회를 나가게 되었고, 선생님의 꾸준한 연구의 결과들이 책으로 나올 때면 사서 읽어보며 선생님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해갔다. 목회를 하던 곳이 전남 고흥, 경기 이천 장호원 등 지방에 있던 터라 서울에서 활동하시던 선생님을 만나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 창천교회 부목사로 부임을 하게 된 이후 선생님과의 접점이 하나둘 생기게 되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세월호였다. 그 누구보다도 세월호 사건을 아파하며 신앙적으로 의미화하셨던 분이 선생님이셨다. 학문 속에 계시던 선생님을 거리의 신학자로 나오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세월호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셨고, 항시 거리를 지키고 계셨다. 나는 당시 부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빠짐없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 목 놓아 진실을 외치곤 하였는데, 거리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부목사라는 제한적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매주 광화문에 나와 집회를 이어가던 제자를 선생님은 어여삐 보셨다. 그동안 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셨던 선생님은 비로소 내 이름을 기억하시게 되었다.
2016년 2월 선생님은 30년간 몸담았던 정든 교정을 떠나 은퇴하셨는데, 이후 본격적인 거리의 신학자로 자기정체성을 삼으셨다. 학생들과 동문들이 마련한 은퇴식에서 선생님은 감신대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불의함에 대해 거침없이 일갈하셨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진지한 포부를 밝히기도 하셨다. 은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으시겠다고 하시면서, 존 웨슬리 목사님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말을 인용해 ‘이제 세상이 나의 교회가 되었다’고 선언하셨다. 선생님은 말씀대로 실천하셨고, 이제 선생님과는 2천년 전 예수의 삶의 현장이었던 고통과 슬픔과 희망과 웃음이 뒤섞여 있는 땀내 나는 치열한 현장에서 자주 뵐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부쩍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2017년 4월 부암동 현장아카데미에서 선생님은 세월호 작은 도서전을 여셨다. 많은 이들이 찾아와 책을 둘러보고 세월호의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모인 이들이 여럿이었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모임의 의미를 더해줄 순서를 만들어 주셨다. 그때 세월호 1주기를 기념해 만든 세월호추모곡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정호승 詩)을 사람들 앞에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후 세월호 집회에서 만날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좋은 노래를 계속해서 만들어줄 것을 당부하셨다.
2017년 10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 교계 이곳 저곳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들을 벌이고 있을 때, 한국교회가 이를 그저 숫자로 기념하고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시며, 선생님은 실질적이고 새로운 반란과 개혁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이에 뜻을 둔 19명의 신학자들이 그동안 토론하고 숙의한 결과물인 <종교개혁 500년, 以後신학>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출판기념회에 선생님께서 초대를 해주셔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을 노래하였는데, 당시 이 곡은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일상을 묵묵히 일구던 어느 목사님이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고, 쫓겨나듯 떠나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은 2천년 전 환영받지 못한 이단아 예수와 중첩되어 예수 없는 지금의 교회들을 생각나게 하는 곡이어서 선곡하였다. 이정배 선생님과 이은선 선생님은 당시 곡을 들으시고는 노래가 깊은 울림을 주었노라 말씀해 주셨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한반도에는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1년이 지난 2019년 4월 27일에는 1주년을 기념해 모처럼 조성된 한반도 평화무드 속에서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만들어낸 평화축제 행사가 열렸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50만명의 시민들이 평화의 땅 DMZ 500km를 손에 손잡고 거대한 인간띠를 만드는 뜻깊은 이벤트였다. 당시 이정배 선생님은 추진위원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셨는데,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를 하셔서 평화인간띠잇기 행사 주제곡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하시면서 제자를 끌어들이셨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미력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어 기꺼운 마음으로 <봄소풍 가요>란 노래를 만들어 선생님께 전해드렸고, 결국 행사 주제곡이 되어 행사 당일 DMZ에는 이 노래가 울려펴졌다.
2020년 이정배 선생님께서는 종교개혁일에 즈음하여 다시 희망으로 일어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미있는 일을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셨다. 참회와 희망을 선포하고 다시 교회가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라시며 종교개혁일에 즈음하여 한국교회가 함께 부를 노래를 하나 만들어달라 부탁하신 것이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선언문을 읽고 되새기며 가사를 붙이고 곡을 써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종교개혁 503주년 즈음에 <절망의 끝에서 다시 신뢰의 그루터기가 되라>라는 곡이 만들어졌고, 선생님께서는 이 노래를 한국교회에 알리셨다.
2021년 선생님은 나에게 한 분의 스승을 소개해주셨는데, 그분은 선생님의 장인이셨던 이신 목사님이시다.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시기 전까지 이신 목사님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으나, 보내주신 자료들을 통해 이신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숨겨진 보물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신 목사님의 서거 40주기를 기념하여 그분의 고귀한 정신과 삶을 기리는 책을 만들기로 하셨고, 이에 11명의 저자들이 한 해 동안 치열한 논의와 공부를 진행하여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 – 슐리얼리스트 믿음과 예술>이라는 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은사이신 이정배 선생님의 제안으로 난 이 뜻깊은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다. 이신 목사님이 남기신 시에 곡을 입혀 노래로 만들고, 작곡 과정에 내 마음에 머물렀던 큰 울림을 글로 남겼다. 이신 목사님의 여러 시들 중에 6곡(불이 어디 있습니까 / 자유의 노래 / 침묵 / 이국의 가을 / 딸 은혜 상 / 예수님은 죽기까지)을 만들어 ‘짙은 그리움이 깊은 고요를 만나 – 이신의 시(詩)가 노래(歌)가 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고, 이 가운데 두 곡(자유의 노래 / 딸 은혜 상)을 출판기념회 및 추모예배에서 부르게 하셨다.
2021년 4월는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며 지으신 짤막한 선생님의 추모시에 곡을 붙여 선생님께 전해드렸는데, 그렇게 해서 이정배 선생님의 세월호 추모곡 <봄꽃이 피고 진 아픈 자리에> 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후 뜻깊은 자리에서 자주 선생님을 뵐 수 있었고 지금까지 제자의 삶을 지켜보시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계신다.
4. 뚜벅뚜벅 걷는 제자의 길
스승과 제자는 어떤 관계인가? 스승과 제자 관계의 가장 큰 핵심은 큰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스승의 뜻을 오롯하게 이어가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예수와 그분을 따르는 무리는 기본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크나큰 정신이셨던 예수를 담아내기엔 제자들의 삶의 역량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러나 부족하기에 제자이다. 복음서의 제자들의 면모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지만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보라. 스승의 삶을 그대로 재현해내지 않던가! 좋은 스승을 만나 갈고 닦여져 큰 정신으로 다듬어져 가는 것이 제자의 모습이다. 진리의 도상에서 헤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스승의 존재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바탕이 된다. 좋은 스승을 모시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가르치는 이는 많아도 진정한 스승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시대가 혼탁할수록 길잡이가 되어줄 참 스승의 존재는 절실해진다. 이정배 선생님의 사상과 삶을 다듬어주셨던 31명의 스승들을 책을 통해서나마 만나뵙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삶과 사상적 줄기의 어느 지점 그 언저리에 나도 있지 않을까? 그분들이 고민했던 것들을 나도 부여잡고 씨름해보고 싶다. 그래서 그 큰 정신과 마주하며 그 가리키는 바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제자이고 싶다.
- 이혁 (의성서문교회 목사, 평화교회연구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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