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27일 *
4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3일동안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솔뫼를 시작으로 순교하셔서 묻히신 곳까지 모두 돌아보았으나, 제주도 용수성지는 멀고 가족들의 배려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부활 주간에 순례를 마치고 싶은 마음에
박수자 루피나 자매와 상의하여 3박 4일(27일~30일) 일정으로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대정(정난주 묘)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용수성지로 향하다가 이정표에서 먼저 안내하는 정난주 마리아 묘에 먼저 방문했습니다.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였고,
이 박해로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정난주의 유배지가 곧 제주였기 때문입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종과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이며,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입니다.
황사영은 백서 사건으로 순교하게 되고, 부인 정난주와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귀양길에서
다시 헤어지고 모슬포에서 37년 동안 노비로 살면서 굳건한 믿음과 신앙을 증거 하다가 66세에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두 살 난 아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노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지~~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책. 난주)
성모 마리아여 ! 저희도 정난주 마리아를 본받아 굳건한 믿음과 신앙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나가도록 도와주소서.
용수성지(성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성당)
드디어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지막 목적지인 용수성지에 도착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던 중 3일 만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용수포구에 표착하였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용수리 해안을 성지로 선포하고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일행은 이곳 용수리 해안에서 고국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셨을 것으로 여겨진답니다.
왼쪽 하얀 건물이 기념성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기념관입니다. 이곳 주임 신부님께서 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일행의 목적지는 한강 마포나루였지만, 당시 조선의 대외 강경책으로 서울 주변 경계가 강화되고 강에 들어오는 모든 배를 아주 세밀하고 엄하게 조사하고 있었는데 라파엘호는 상해에서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여 며칠이면 닿을 길을 한 달여 표류하다 하느님의 섭리로 표착한 곳입니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서한에서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시기에 바로 서울로 갔으면 붙잡혀 처형을 당했을 것"이라 하였답니다.
그들은 곧 배를 수리하고 떠나 전라북도 금강 하류의 나바위로 무사히 입국하였습니다.
제주교구는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라파엘 호'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사진 뒤쪽 우측에 계신 성모상은 김대건 신부님이 항해 중에 간직했던 '기적의 성모 상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성모상이랍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는데 화요일과 주일 저녁 8시에만 가능하다고 하여 성체조배만 하고 나왔습니다.
기념관에는 성 김대건 신부 유해 공경실이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를 이해하기 쉽게 상세하게 전시해 놓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옥중서한과 복제된 턱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한컷.
이곳 제주도에도 순교지가 7곳이 있는데 정난주 묘와 용수성지를 제외한 5곳의 성지는 내일과 모레 이틀간 돌기로 하고 루피나의 오랜 지인 부부가 정착해 살고 있는 서귀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부부가 정성껏 준비해 주신 흑돼지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내일의 일정을 꿈꾸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4월 28일*
새미 은총의 동산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이시돌 목장내에 조성된 성 이시돌 성지로 출발하였습니다.
이시돌 목장은 1950년대 중반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 패트릭 맥글린치 (임피제)신부가 한림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그 당시 가난한 제주 농민들을 돕기 위하여 외국의 원조를 얻어 넓은 목장을 확보하고 축산업을 발전시켜 제주도뿐 아니라 한국의 목축업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종교사업과 많은 사회사업도 펼쳤습니다.
맥그린치(임피제) 신부는 1991년 이시돌 경내의 가장 아늑한 장소에 야외 순례와 기도를 위한 '삼뫼소 은총의 동산'을 조성하고 2009년에는 '새미은총의 동산'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이곳에는 삼나무 숲과 억새로 둘러쌓인 묵주기도의 호수와 성모동굴,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고, 대형 야외성당. 피정과 연수를 위한 성 이시돌 회관, 청소년 수련원인 젊음의 집, 노인 복지 요양원, 말기환자 구호 병원 등이 모여있어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에게도 종교적이고 박애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피제 신부님의 묘지에 왔어요. 이곳은 평생 자신이 머문 이시돌에 세워진 글라라 수녀원 묘지랍니다.
이시돌 목장의 설립자 임피제 신부님은 1954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제주도에 오셨을 때 한국전쟁과 4.3 사건으로 가난과 고통을 받고 있던 지역 사람들의 자립과 성장을 위하여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여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고, 복지 사업으로 확장하여 성 이시돌 목장을 설립하고 64년간 경로당, 양로원, 요양원, 유치원 청소년 교육시설, 병원등을 설립하고 제주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사시다가 2018년 4월 23일 90세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앞으로의 생을 어떻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과 함께......
제가 복음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서구절은 마태오복음 26장 39절의 "아버지 하실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입니다.
간절하게 청하면서도 아버지 뜻에 맡기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의 길을 실제 인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동상들은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따라 걸으며 묵상할수 있도록 잘 배치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 안수도 받고.....
이곳은 올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곳입니다. 예전에 이시돌 자연 피정을 통해 아픈 몸이 회복되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음에 올때는 이곳에서만 하루 일정을 잡아야겠어요.
새미 은총의 동산을 돌고나니 점심시간이 되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존경하던 신부님이 가까운 곳에 계셔서 미리 약속한 시간에 방문하여 손수 끓여주신 커피를 맛있게 먹고, 신부님이 안내해 주시는 대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한라산 오름길을 걷고 저녁이 되어 모슬포 항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한뒤 숙소에 돌아와 단잠을 잤습니다.
*4월 29일*
아침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황사평 성지로 출발했습니다.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신축년에 일어난 민란) 떄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곳입니다.
조세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도로 인해 생긴 오해, 전교 과정에서 신앙과 위배되는 풍습에 대한 반대가 불러온 주민들과의 충돌로 민란이 일어나면서 300여명의 신자들이 희생되었고, 사태가 수습된 후 1903년에 교회는 조정으로부터 양도받은 황사평에 연고없는 28구의 유해를 모아 안장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리며 아름다운 성지로 가꾸고 있다 합니다.
제주에서 사목했던 외국인 선교사 공덕비가 있어서 성지의 거룩함이 한층 더해집니다.
제주도에서 은퇴하시고 성지를 가꾸며 오랫동안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시는 신부님을 만나 성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신부님과 함께 교우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오리 보양식을 먹고 4.3 평화공원으로 출발했습니다.
4.3 평화 기념관
평화 기념관은 문이 굳게 닫혀 들어갈수가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3년 전에 왔을때 전시실과 각명비. 위령탑, 위령제단. 위령광장을 돌아보며 4.3 사건의 참상을 확실히 알게 되었는데.... 코로나가 끝나면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입니다. 각명비(4.3 희생자의 성명. 서열. 당시연령. 사망일시, 장소가 기록된)와 다섯벌의 수의(어른 남녀, 청소년 남녀, 성별을 구별할수 없는 어린아이를 상징하는)로 4.3 당시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희생자들을 달래는 상징조형물 '귀천' 앞에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잠시 기도하고 내려 왔습니다.
황사평성지에 다시 돌아와 3시 미사참례를 하고 4시경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순교 현양비가 세워진 함덕리로 출발 하였습니다.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순교현양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작은 배를 타고 육지와 도내 포구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소규모 무역상으로 1857년 초 항해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성 해역에서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인도되어 조선 신학생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뒤 귀국하여 복음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형벌(장살형)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51세에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2014년 8월16일 동료 순교자들 123위와 함께 복자로 공경받게 되었습니다.
황경한 묘
황경한은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유배 과정에서 하추자도에 남겨져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황경한은 오씨성을 가진 어부의 아들로 키워졌고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과 태섭을 낳았는데 그 후손은 아직도 추자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황경한은 사망후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묘지가 있는 추자도에는 배가 뜨지 않는다 하여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습니다.
숙소에 가는 도중 수산시장에 들려 생선과 회를 떠서 숙소 주인 부부와 만찬을 한 뒤 잠을 청했습니다.
*4월 30일*
관덕정
아침 일찍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 비행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관덕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제주교구에서 발행하는 안내서에는 황경한 묘지와 관덕정은 빠져 있었습니다.
관덕정은 도로변에 있어서 주차에도 애로가 많았는데, 한블럭 떨어진 곳의 유료주차장에 겨우 주차를 하고 관덕정에 들어갔으나 너무 이른 시간이고 문은 굳게 닫혀있어서 성지 주변만 한바퀴 돌고 10시50분 비행기를 타고 청주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관덕정은 본래 조선 세종 때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군사들의 연무장에 세운 정자였는데 제주 신축교안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 관덕정에서 민란군에게 처형당했다 합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런 기행문은 써본 일이 없기에 소감문 쓰는 일은 엄청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때로는 설명이 너무 길어지고 어떤 사진을 올려야 될지 글, 그림위치, 모든게 힘들고 미숙하지만, 너무나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순례도중 날마다 빠짐없이 미사에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무한 감사 드립니다.
다음에는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책. '차쿠의 아침'을 먼저 읽고 출발하려 합니다.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지만 다른 이들과 잘 다녀 올수 있도록 협조해준 가족과, 제 일정에 기꺼이 동참해준 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주신 신부님과 가정 분과장님. 그리고 사무장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첫댓글 용수성지 뿐 아니고 제주의 성지를 많이 돌아보셨군요.
제주의 천주교 신앙 역사를 좀 더 알 수 있게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순례 완주 축하드립니다.^^
다시금 성지을 방문한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네요.
이 모든거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