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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연복전(延福殿)
정의
창경궁·경희궁에 있는 진종(眞宗)과 그의 비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연복전은 일반적인 혼전과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진종과 효순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으로 훙서하였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이들을 왕과 왕후로 추존하였다. 추존된 뒤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이들의 혼전으로 삼은 곳이 연복전이었다.
내용 및 특징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정조는 곧바로 영조의 뜻을 이어받아 영조의 맏아들이자 자신에게 백부가 되는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시기로 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세손이 죄인의 자식으로서 대통을 이을 수 없었기에 영조가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들어가게 했고, 정조가 1776년(정조 즉위) 즉위하자 양부모인 효장세자와 현빈(賢嬪)을 진종과 효순왕후로 각각 추숭하였다.
1776년 3월 19일 추숭하는 날에 혼전의 전각명을 ‘연복(延福)’으로 정하고[『정조실록』 즉위년 3월 19일], 종묘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연복전은 창경궁에 있는 효순묘(孝純廟)의 옛 혼전에 마련하였다.
1777년(정조 1) 7월 28일 존현각(尊賢閣)에 도둑이 들면서 혼전 자리에 변동이 있었다. 이틀 뒤인 7월 30일 정조는 8월에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겠으니 영조의 혼전인 효명전(孝明殿)을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으로, 진종의 신위를 경희궁의 위선당(爲善堂)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8월 3일 진시(辰時)에는 연복전을 경희궁의 위선당에 임시로 봉안하고, 미시(未時)에 휘령전(徽寧殿)을 연복전으로 옮겼으며, 8월 6일 오시(午時)에 효명전을 창경궁으로 옮긴 뒤 연복전을 당일 태령전(泰寧殿)으로 이안(移安)하기로 하였다. 1778년(정조 2)에 부묘할 날이 가까워지자 진종의 신위를 창의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겨 봉안한다는 기사를 통해[『정조실록』 2년 4월 9일], 신주는 경희궁에서 창의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경희궁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1778년(정조 2) 5월 2일 영조와 정성왕후(貞聖王后)를 종묘 정전 제13실에 부묘한 뒤 진종과 효순왕후를 제14실에 각각 부묘하였다. 연복전은 정조가 즉위하여 그들의 신주를 봉안한 때부터 1778년 5월 2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연복전이 있었던 경희궁은 고종대까지 존속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참고문헌
『진종효순왕후추숭도감의궤(眞宗孝純王后追崇都監儀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27, 2011.
연은전(延恩殿)
정의
경복궁에 있던 덕종(德宗)과 인종의 위판을 모신 원묘.
개설
원묘(原廟)는 ‘원(原)’이 ‘이중’, ‘거듭’이라는 뜻으로 이미 정묘(正廟)인 종묘(宗廟)가 있지만 다시 세운 사당을 말한다. 조선초기에는 혼전(魂殿)이 그 역할을 다한 뒤 폐지되지 않고 ‘원묘’로 성격이 바뀐 경우도 있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내용 및 특징
연은전은 성종이 생부 의경세자(懿敬世子)를 덕종으로 추숭한 뒤 그의 위판(位版)을 봉안한 원묘이다. 명나라에서 그에게 내린 시호 ‘회간(懷簡)’을 따라서 그를 회간대왕(懷簡大王)이라 일컬었고, 별전(別殿)을 연은전이라 칭하였다[『성종실록』 6년 10월 14일]. 경복궁의 옛 세자궁에 연은전을 건립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덕종이 예종과 형제이고, 덕종이 왕위에 즉위한 적이 없어서 문소전에 들어갈 수 없기에 별도로 신무문(神武門) 안에 연은전을 건립하여 향사(享祀)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 뒤 1547년(명종 2) 9월 16일 인종의 혼전인 영모전(永慕殿)에서 위판을 받들어 내어 다음 날 9월 17일 연은전에 부(祔)하였다.
변천
연은전이 있었던 경복궁은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왜적이 궁궐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었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연제(練祭)
정의
사망한 뒤 첫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
개설
연제는 왕의 초상 날부터 윤달을 계산하지 않고 13개월째에 지내는 제사로 흔히 소상제(小祥祭)라고도 부른다. 만약 왕의 생전에 왕비의 상이 발생할 경우 상기(喪期)가 기년상으로 줄기 때문에 11개월 만에 연제를 지낸다. 연제 때에는 상복의 웃옷에서 수질(首絰), 부판(負版), 벽령(辟領), 최(衰) 등을 떼어내고, 관도 부드럽게 손질한 삼베로 만든 연관(練冠)을 쓴다. 이것은 3년상의 절반이 넘으면서 상주(喪主)의 의무가 가벼워졌음을 나타내는 절차인데, 이때부터 산릉(山陵) 및 혼전(魂殿)에서 아침·저녁에 상식(上食)할 때 곡(哭)을 하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 최초의 국상은 1396년(태조 5) 8월 13일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사망으로 시행되었다. 이때 세자 이방석(李芳碩)은 유교의 3년상에 따라 상복을 입었지만 백관들은 불교식의 백일상을 시행하되 달[月]을 날[日]로 바꾸는 역월제(易月制)에 의거하여 열흘 만에 상복을 벗었다. 따라서 이때에는 연제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연제의 기록은 1408년(태종 8) 5월 24일 태조가 사망하면서 나타났다. 이때 아들인 태종은 역월제에 따라 27일 담사(禫祀)를 지내고 상복인 요질(腰絰)을 벗었지만 다음 해 5월에 이르러 혼전인 문소전(文昭殿)에서 연제를 시행하였고, 27개월째에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였다. 즉 역월제를 시행함에 따라 소상(小祥)의 시기와 연제가 일치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방식은 정종이 사망했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1420년(세종 2) 7월 10일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사망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당시 아들인 세종은 11개월 후에 연제를 시행하였고 13개월째에 이르러 길복을 입었다. 이때 처음으로 역월제를 벗어나 명실상부 기년상을 바탕으로 연제가 시행된 것이다. 이어 2년 후 태종이 사망했을 때도 세종은 13개월째에 소상제를 시행하였고, 27개월째에 이르러 태종과 원경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세종대의 의례 시행으로 연제의식은 국상의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연제는 소상 날에 지내는 제사로 확립되어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준수되었던 것이다.
절차 및 내용
연제의 의식은 왕의 3일간 재계(齋戒)를 거친 뒤에, 제사 1일전부터 당일까지의 준비과정을 거친 후 시행되었다. 이때 재계는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을 행했다. 연제의 의식은 크게 2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신주에 선왕의 칭호를 쓰고 왕 이하가 상복을 바꿔 입는 역복(易服) 단계이다. 먼저 혼전에 이르러 왕이 곡(哭)을 하고 4번 절한다. 그러면 제주관(題主官)은 연주(練主)를 꺼내어 ‘아무개 대왕[某號大王]’ 혹은 ‘아무개 왕후[某號王后]’라고 쓰고 광칠(光漆)을 하고 영좌(靈座)에 안치한다. 이후 왕은 연관을 쓰고, 수질과 부판, 벽령, 최 등을 떼어낸다.
2단계에서는 본격적인 제사가 시행되었다. 제사는 먼저 왕이 영좌 앞에 북쪽으로 향해 꿇어앉아 3차례 향을 올리고[三上香] 찬을 잡아 술을 땅에 뿌리는[執瓚灌地] 의식을 시행된 뒤 삼헌례를 거행되었다. 삼헌례는 왕이 신위에게 술을 올린 뒤 축문을 읽는 초헌례(初獻禮)가 시행된 뒤 다시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가 이어졌다. 삼헌례가 끝나면 왕은 곡(哭)을 하고 4번의 절을 한 뒤 재전(齋殿)으로 돌아간다. 이후 집사자들이 신을 들이고[納神] 이후 축문과 폐백 등을 예감(瘞坎)에 묻으면서 모든 제사가 끝났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주자가례(朱子家禮)』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연구』, 일조각, 1991.
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정종수, 「조선초기 상장의례(喪葬儀禮)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연주(練主)
정의
첫 기일인 연제(練祭) 때 다시 쓴 신주.
내용
연주를 혼전(魂殿)에 모심으로써 조상의 혼령은 우주(虞主)에서 연주로 옮겨 깃들게 된다. 이 연주는 3년상의 마지막 절차인 담제(禫祭)가 끝난 후, 종묘의 시향 때 종묘로 옮겨 모셔졌다. 이를 부묘(祔廟)한다고 한다.
연주의 재질은 밤나무이다. 체제는 뽕나무 신주인 우주와 동일하다. 신주에 글씨를 쓰는 제주(題主) 절차는 연제의(練祭儀)에 포함되어 있다. 연주의 규격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길이가 1척, 방(方)이 5촌, 윗부분 지름이 1촌 8푼, 사상(四廂)을 1촌 1푼을 깎고, 사우(四隅)를 각각 1촌을 깎으며,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이 통하도록 9푼의 구멍을 낸다고 했다. 그리고 ‘모호대왕(某號大王)’이라 개제한다고 했지만, 실제 종묘 열성(列聖)의 신주에는 ‘모조(某朝) 증시(贈諡) 모호(某號) 모조(某祖) 모휘호(某徽號) 대왕’이라고 썼다.
용례
禮曹啓曰 練主改題 日期已迫 五禮儀練祭儀 只稱某號大王改題云 宗廟列聖神主則書以某朝 贈謚某號 某祖 某徽號大王 而各祭祝文 則無某朝贈謚四字 只書某祖某謚號某徽號大王矣 今從何例改題乎[『효종실록』 1년 5월 3일]
영경전(永慶殿)
정의
창덕궁·창경궁에 있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장경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영경전은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의 혼전이다. 장경왕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경(永慶)’으로 정하고[『중종실록』 10년 3월 7일], 윤달(윤4월)을 포함하여 3개월 뒤 희릉(禧陵)에 장례를 치렀다. 15개월에 지내는 담제를 마친 뒤 중종의 혼전인 경사전(景思殿)으로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영경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15년 3월 2일 장경왕후가 경복궁의 동궁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시신을 봉안한 빈전(殯殿)을 어느 전각에 마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3개월 뒤 윤4월에 희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중종실록』 10년 윤4월 4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영경전이다. 영경전을 어느 전각에 마련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영경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졸곡제(卒哭祭), 소상(小祥), 담제를 지낸 기록만 확인된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산릉에서 장례를 치르고 신주를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중종의 혼전인 경사전(景思殿)으로 장경왕후의 신주를 옮겨 함께 봉안하였다[『인종실록』 1년 2월 9일]. 그때부터 영경전이라는 혼전명은 사라졌다.
경사전은 처음에는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에 마련하였고, 중종의 졸곡이 지난 뒤 국상(國喪)을 주관하는 인종이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옮겼다. 혼전의 전각이 바뀌더라도 혼전명은 그대로 경사전이라 일컬었다.
1547년(명종 2) 1월 12일 중종과 장경왕후의 신주를 경사전에서 모셔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경전은 장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15년(중종 10) 윤4월 4일부터 경사전에 봉안한 1545년(인종 1) 2월 9일까지 설치한 혼전이다. 이후 장경왕후의 신주는 1545년 2월 9일부터 1547년 1월 12일까지 경사전에 봉안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경전이 마련된 위치는 알 수 없고, 경사전으로 장경왕후의 신주를 옮겼던 전각만 언급하면 창덕궁의 선정전과 창경궁의 문정전이다. 선정전과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종묘의궤(宗廟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영모전(永慕殿)
정의
창덕궁에 있던 인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
개설
혼전(魂殿)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영모전은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의 혼전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모(永慕)’로 정하고[『명종실록』 즉위년 7월 12일], 4개월 뒤 효릉(孝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0실에 부묘할 때까지 영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45년(인종 1) 7월 1일 인종이 경복궁 청연루(淸讌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승하하자 사정전(思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4개월 뒤 10월에 효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10월 15일]. 이때 창덕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영모전이다.
혼전 장소로는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서연청(書筵廳), 창덕궁의 동궁 저승전(儲承殿)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든가 3년 동안 시사(視事)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영모전이 경복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모전은 인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영모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영모전에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다른 혼전과의 차이라면, 초우제·졸곡제·연제 등에 명종이 친행(親行)하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상제와 담제를 지낼 때에는 영모전에 나아가 친행하였으나 종묘의 부묘제(祔廟祭)는 섭행하였다. 그 밖에 명나라에서 내린 제사를 받는 의절은 혼전에서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선정전이 좁아 경복궁의 사정전에서 거행하였다.
부묘하기 하루 전인 1547년(명종 2) 9월 16일 인종의 신주를 영모전에서 모셔와 다음 날인 17일에 종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모전은 인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45년 10월 15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547년 9월 16일까지 창덕궁의 선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영모전이 있었던 창덕궁의 선정전은 정조, 순조, 헌종, 철종 등의 혼전으로 계속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종묘의궤(宗廟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김동욱, 「순조즉위년의 창덕궁 선정전 혼전활용에 대하여」,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5.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영사전(永思殿)
정의
창경궁에 있던 인조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영사전은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혼전이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후일 원종(元宗)으로 추존되는 정원군(定遠君)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사(永思)’로 정하고[『효종실록』 즉위년 5월 15일], 5개월 뒤 장릉(長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1실에 부묘할 때까지 영사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49년(인조 27) 5월 8일 인조가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빈전(殯殿)을 어디에 마련하였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5개월 뒤 9월에 장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영사전이다.
인조의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였다. 『인조빈전혼전도감의궤(仁祖殯殿魂殿都監儀軌)』에는 ‘창덕궁’ 문정전으로 기록되었고,『증보문헌비고』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사전은 인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일반적으로 능에 장례를 치른 날 우주(虞主)를 받들고 궁으로 돌아와 혼전에서 초우제(初虞祭)를 지낸다. 인조의 경우는 능에서 장사지내고 산릉에서 초우제와 재우제(再虞祭)를 지낸 뒤 삼우제(三虞祭)부터 영사전에서 거행하였다. 영사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 의절을 모두 영사전에서 거행하였다. 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조대에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혼전에서 ‘조제(弔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인조의 국상에 처음으로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 영사전에서 ‘조제(弔祭)’를 행하였다.
부묘하기 하루 전날인 1651년(효종 2) 7월 6일에 인조보다 먼저 승하했던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숙녕전(肅寧殿)에서 태묘로 나아오게 한 뒤 다음 날인 7월 7일에 인조와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사전은 인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49년 9월 21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651년 7월 7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사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된 전각이다.
참고문헌
『인조빈전혼전도감의궤(仁祖殯殿魂殿都監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영소전(永昭殿)
정의
경덕궁·창경궁에 있던 숙종의 첫 번째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
개설
혼전(魂殿)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인경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영소전은 숙종의 첫 번째 비 인경왕후의 혼전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1680년(숙종 6)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소(永昭)’로 정하고[『숙종실록』 6년 11월 2일], 5개월 뒤 익릉(翼陵)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부터 1720년(숙종 46) 숙종이 승하하고 3년상을 치를 때까지 영소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자 융복전(隆福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인 1681년(숙종 7) 2월에 익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그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숙종실록』 7년 2월 22일]. 이때 조성한 혼전명이 영소전이다.
영소전은 처음에 경덕궁 계상전(啓祥殿)에 마련하였다. 반우하고 신주를 봉안한 곳이 계상전이었다. 그 뒤 숙종이 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영소전을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1701년(숙종 27)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고 그녀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을 문정전에 마련하기 위해 영소전을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 임시로 봉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0월 28일]. 1701년(숙종 27) 12월 15일에 인현왕후의 사우제(四虞祭)를 지내고, 이틀 뒤인 12월 17일에 영소전을 다시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2월 17일]. 혼전의 전각이 바뀌더라도 혼전명은 그대로 영소전이라 일컬었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덕궁(현 경희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소전은 인경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영소전에서 거행한 의식으로 우제(虞祭)와 졸곡제(卒哭祭)에 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 초우제(初虞祭)와 재우제(再虞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1681년(숙종 7) 8월 27일에 연제를 지내고, 그날 전작례(奠酌禮)를 영소전에서 거행하였다. 2개월 뒤인 10월 26일에 상제를 지내고, 다시 2개월 뒤인 12월 18일에 담제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8월 11일에 숙종의 신주를 혼전인 효령전(孝寧殿)에서 옮겨 와 태묘에 부묘할 때 영소전에 있던 인경왕후의 신주와 경녕전에 있던 인현왕후의 신주도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소전은 인경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81년 2월 22일부터 숙종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2년 8월 11일까지 경덕궁 계상전→창경궁 문정전→창경궁 명정전→창경궁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소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된 전각이다.
참고문헌
『인경왕후국장도감의궤(仁敬王后國葬都監儀軌)』
『인경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仁敬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