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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치료를 원하시는 하나님 / 호 7:1-16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큰 관심 중에 하나는 건강일 것입니다. 자신이나 배우자, 또는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서, 많은 돈을 투자하고 정성을 기울입니다. 심지어는 연세가 높아서, 우리 생각엔 곧 돌아가실 것 같은 분들에게조차, 천 만원대가 넘는 수술비를 들여서라도 수술을 하는 경우를 보면서, 건강한 삶을 위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치료를 좀 받아야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갈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병들었음을 인정할 때입니다.
질병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치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병원을 찾은 환자는 전문적인 의료진을 통해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런 다음에 구체적인 치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환자들은, 의사가 그냥 일상복을 입고 진료하는 것보다,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있을 때, 훨씬 더 신뢰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흰 옷이 주는 이미지가 환자에게는 심리적으로, 의사를 신뢰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오히려 냉소적이고 반응이 냉담합니다. ‘우리는 치료 받을 것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몸이 아파서 병원에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면, 아픈 증세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꾸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면, 의사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요즘은 의료기기가 워낙 발달해서, 대충 이야기를 듣고 종합검사를 해보면, 어느 곳이 문제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원까지 와놓고서도, 의사에게 아프지 않다고 말하고, 한사코 아픈 곳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상태가 심각한데도, 여유를 가지고 엉뚱한 소리만 말하면, 의사도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어떤 죄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으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특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어려움을 호소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부분은 빼놓고 엉뚱한 것만 가지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미 그 사람의 속은 너무 타버려서,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바로 그렇다고 말씀했습니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밝혔으면, 설사 징계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죄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양심은 완전히 시커멓게 타버려서, 고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모르니 자신이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 리가 만무합니다.
1절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결국 이런 사람은 치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뿌리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사실상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큰 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지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찾긴 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 소리를 듣고 막상 찾아와서 보니까, 그들의 부르짖음 중에 정말 부르짖어야 할 내용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기도해야 할 것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며 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들은 다 감추어 두고, 원인과는 거리가 먼 작은 어려움들과 좀 힘든 것들을 가지고 와서 “죽는다”고,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입으로만 예수 믿는다고,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면 될 것 같으냐는 말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그들은 회개를 하면서, 여전히 거짓을 행했습니다.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기만했습니다. 또한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학대하고, 빽 없는 사람을 사기 쳐, 땅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에 발린 소리로, 하나님 앞에 우는 소리를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라, 청승 떠는 것입니다.
2절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문제는 하나님이 안 속아준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속이는데 속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머쓱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성경은 한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그들이 마음에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포장하지 않은 실제로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화장을 지운 민낯을 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자신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갑니다. 무엇을 위해 바쁜지도 모르면서, 바쁘게 살면 무조건 좋은 줄 알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생각하는 게 두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마음에 생각하기를 싫어합니까?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그들의 악한 행위가 완전히 둘러싸여서,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에 포위되어서 아무것도 쳐다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을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뭘까요? 잘 먹고 잘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3절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실종되고 없습니다. 의와 거룩은 출장 가고 없습니다. 그저 왕과 지도자들은 뇌물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본문에서는 왕과 지도자보다는 백성들을 더 책망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지도자만 탓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백성들더러 지도자의 잘못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내 잘못입니다. 내 탓입니다. 지도자가 저렇게 된 것은 순전히 제 기도가 부족한 탓입니다”라고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백성을 둔 지도자는 잘못 될 수 없습니다.
5절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여기서 ‘우리 왕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생일이나 즉위일을 의미합니다. 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다 빼앗아서,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와 똑같이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서로 기뻐서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지도자들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술독으로 병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날 정도입니다. 술이 알코올이지요? 실제로 도수가 높은 술은 불이 붙기도 합니다. 이런 술을 마셔대니, 그 뜨거움으로 위장병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술의 뜨거움으로 간에 화상을 입어 간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일차적인 문제는, 이스라엘과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의 특징이 있는데, 세상의 원리가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세상처럼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말씀이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왕이나 지도자들은 리더에 불과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여기 저기 몰려다니면서, 자기의 것을 챙길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모두 강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은 아무도 여기에 살아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자들 때문에, 강한 자들까지 은혜를 주십니다. 약한 자들이 마음껏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까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들이 있을 수 없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치료할 가치가 없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몇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4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첫째가 달궈진 화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 간음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걸 비유로 마치 과자를 만들 때 사용하는 달궈진 화덕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달궈진 화덕”은 죄지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화덕은 늘 불을 피워놓습니다. 그래서 항상 달궈져 있습니다. 그 위에 밀가루 반죽만 올리면 즉각 과자를 구워낼 수 있습니다.
6-7절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죄지을 준비를 완벽히 갖추고 있다가, 기회만 오면 죄의 과자를 만들 태세입니다. 본색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욕정과 탐심을 언제까지 감추고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달궈진 화덕을 식혀야 합니다. 그래서 죄의 과자를 구우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구워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문제는 달궈진 화덕이,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통제하고, 자기를 조절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누구 한 사람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궈진 화덕이 재판장들을 삼키고 왕들을 엎드러지게 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혀만 끌끌 찼지, 아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망할 때 보면,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기도해야 하는데, 몇 사람은 고사하고 한 사람이라도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망합니다. 유다도 망할 무렵에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도성을 살리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 성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 기도 안 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나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도 기도하자.” “나부터 기도하자.”
8절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둘째로 뒤집지 않은 전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었습니다. 순수성이 사라졌습니다. 영적인 순결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방신들을 혼합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필요에 따라 이방신을 찾았습니다. 성적인 만족을 누리고 싶으면, 여신 아스다롯을 찾았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바알을 찾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전병”은 얇게 구운 빵 또는 과자를 말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붕어빵, 호떡, 전 같다는 것입니다. 전병을 구울 때에는, 이쪽저쪽을 잘 익도록 구워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전병을 뒤집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쪽은 아직 익지 않아서 생 밀가루 그대로 있고, 다른쪽은 타서 새까맣게 됩니다. 그러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전병은 하나님께 바치는 떡으로서, 이스라엘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첫 곡식을 빻아서 전병을 만들어, 하나님의 전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상한 떡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떡이 앞뒤가 달랐습니다. 앞은 흰색이고, 뒤는 검은 색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분리된 것입니다. 앎과 삶이 믿음과 행위가 별개인 것입니다. 이 뒤집지 않은 전병은, 어디에도 쓸 수 없습니다.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은 불쌍합니다. 쓰임 받지 못한 신앙인은 비참 그 자체입니다. 쓰임 받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내가 주님께 쓰임 받고 있다면 행복해 해야 합니다. 사역이 많다고 불평하기보다, 내가 주의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9절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쓰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면, 이방인에게 삼켜집니다. 그래서 고생고생하게 됩니다. 사람이 고생을 심하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백발이 무성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기 상태를 모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10절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이스라엘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아직은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 입에 밥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건 쓸데없는 고집입니다. 괜한 객기입니다. 더 크게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돌아와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돌아온다’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제로(zero)상태에 놓고,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무슨 권리가 있고, 무슨 체면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창피를 무릎쓰고,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지위나 체면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가장 큰 힘이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제로(zero)로 놓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셋째로 어리석은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은 비둘기처럼 지혜가 없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센스가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곧 판단력이 흐리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는 두 가지 바보스런 짓을 잘 범하는데,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거의 백발 백중으로 걸려 듭니다. 또한 근시안성 때문에 새끼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앞의 먹이에 마음이 빼앗겨, 더 중요한 새끼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처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앞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기대서도 안 되고, 앗수르를 의지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확실히 책임져 주실 것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놔두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애굽에 가서 살려달라고 했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앗수르로 찾아갔습니다.
12절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사람에게 운명을 맡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우리 문제를 다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충분히 기도 후에 사람을 만나자.”
13절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돌아오라고 하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무척 화를 내십니다. “화 있을진저.” “패망할진저.” 결국 말씀대로 되고 맙니다. 기울어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상으로 돌려놓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계십니다.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받아주시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망하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그들의 회개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됐습니다. 당장 힘들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하지만, 회개에 거짓이 섞여 있었습니다.
14절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또한 그들은 건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성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쩌다 기도해도 곡식과 새포도주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 때, 기도 시늉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심으로 기도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요? 나부터도 건성으로 기도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식사기도 같은 경우 말입니다. 성심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15절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하소연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가 마음껏 쓰실 수 있는 도구로 삼기 위해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하나님께 악을 꾀하고 있습니다.
16절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마지막 비유는 속이는 활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장에서 구부러진 활로 쏘면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없습니다. 쏘는 화살마다 빗나갑니다. 그게 조롱거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 말씀을 하실 때, 근본적인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진찰대에 누워서 정확하게 진단을 받아, 수술할 것은 수술하고,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수술권유를 들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호세아 선지자의 이 경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다가, 길게는 60년, 짧게는 30년 뒤에, 앗수르에게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냉정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진찰대에 누워서, 검진을 받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거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던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돈이 여러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보다,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이 세상의 잘못된 철학의 영향을 받아, 마치 뒤집지 않은 전처럼 한쪽은 설익었고, 또 한쪽은 새까맣게 탄, 이상한 혼합주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묘한 말로 자신을 위장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근본적으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찰대에 누우시고, 그 말씀에 따라 여러분을 진단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지금 당장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밝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성심으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힘 있게 쓰임 받는 선한 도구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활이 되어 과녁을 명중시키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세계에서 언약적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 앞으로 전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교만함과 완악함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속에서, 오늘 우리의 현 주소를 알게하시고 새롭게 하옵소서. 오늘 이스라엘의 몇 가지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달궈진 화덕, 뒤집지 않는 전병, 어리석은 비둘기, 속이는 활, 이같은 모습이 조금이라도 나의 삶에서 발견된다면, 하나님께 내어놓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내 삶을 순간순간 말씀에 비추어 뒤집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내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하나님보다 세상 더 의지하다가 세상의 힘에 삼키우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정직한 화살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제 높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