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 운영위원장 퇴임
2023년 2월 6일에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이하 공주복지관)에서 제1차 정기 운영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공주 복지관은 덴마크 출신 마렌 피터슨 보딩(保雅鎭, Maren Peterson Bording) 선교사가 조선에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여 시작되었다. 보딩 선교사는 1924년 유아복지사업을 위하여 공주읍에 중앙영아원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주복지관의 시작이다. 그 후 1957년 모자지도관, 1968년 공주기독교사회관, 1984년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으로 명칭이 바뀌고 오늘에 이르렀다.
보딩 선교사가 내한할 당시 공주(公州)는 충청남도의 중심 지역이었다.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한강이남 선교 거점으로 공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처음으로 공주에 찾아온 선교사는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박사였고, 스웨어러(徐元輔, Wilbur Carter Swearer) 선교사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경성을 근거지로 삼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선교활동을 했다. 공주지방에 공식 파송된 상주 선교사는 1900년 맥길(맥우원, William Bacon McGill) 박사다. 그는 미감리회에서 파송한 의사이며 의료사업과 전도활동을 병행했다. 1905년 샤프(Robert Arthur Sharp) 목사 부부가 정착하여 복음 선교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1903년 영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06년 윌리엄스(禹利岩, Frank Earl Cranston Williams) 선교사에 의해서 영명학교(永明學校)가 설립되었다. 맥길에 의해서 시작된 의료사업은 그가 떠난 1905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08년 밴 버스커크(潘福奇, James Dale Van Buskirk) 박사가 오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13년 그가 다시 세브란스 의학교로 간 뒤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1921년 노먼 파운드(Norman Found) 박사가 공주에 와서 약국을 개설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파운드 박사를 돕기 위해서 1923년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에서 보딩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보딩 선교사는 1878년 4월 20일에 덴마크 윌란(Jylland) 반도에 위치한 라스비(Lasby)에서 닐스 페터 페테르센 보딩과 크리스티안 라스무센 사이에서 출생했다. 1902년 간호사 훈련학교를 졸업한 후 1911년까지 이 학교와 병원에서 일했다. 1911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보딩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1915년 9월에 CTS에 입학하여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1916년부터 필리핀 간호선교사로 일했으며, 건강 때문에 조기 안식년을 보냈다. 건강을 회복한 후 보딩은 1922년에 쿠크카운티 병원에서 간호훈련을 받고 그해 10월에 조선에 들어와 공주선교회에 소속되어 노만 파운드 박사를 돕게 되었다. 덕분에 의료 선교사업은 지역에 순회 진료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했다. 보딩 선교사는 간호사 업무만이 아니라 파운드 박사와 지역 순회 진료도 함께 다니면서 유아의 영양실조 개선과 위생환경 개량이 얼마나 절실한 지를 파악했다. 보딩 선교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듬해 1924년 1월 초 유아복지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80명의 유아가 영아원에 등록했다. 영아들이 20명이나 아사(餓死)했다. 보딩은 영아살리기에 매우 힘썼다. 이를 위해서 최초로 우유보급 사업을 전개했다. 가난한 집에는 무료로 배급했다. 또한 우량아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부모들에게 영아를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40%에 달하는 영아사망률이 5%로 줄었다. 1928년과 1936년 안식년을 제외하고 보딩 선교사는 공주와 대전을 중심으로 영아 살리기, 건강 복지사업에 힘을 쏟은 후 1943년 4월 1일에 은퇴했다. 그 후에도 그는 의료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7년 9월 24일에 향년 7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날 정기 운영위원회에서 나는 운영위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직원들의 마음을 담은 공로패를 전달받았다. 필자가 공주복지관과 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3월에 공주 늘푸른교회(당시 중동교회)로 부임하면서부터다. 그 당시 복지업무는 국가가 여력이 없어서 개인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했다. 감리교회는 태화복지재단 산하에 서울, 인천, 공주, 대전, 부산에 복지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운영위원회는 복지관 운영에 직간접으로 관여한다. 복지업무가 정부로 넘어가기 전에는 운영위원회가 나름대로 복지관 업무 중 인사까지 개입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당연히 복지관 운영위원회는 감리교 목사를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로 구성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공주로 목회 임지를 옮긴 2005년에 운영위원, 2008년 운영위원장으로 피택되어 2023년까지 18년 동안의 임기를 마무리했다. 목회를 인천으로 옮긴 후에는 당연히 이 직무를 내려놓아야 했으나 운영위원장을 새로 보선할 여건이 못 되어 잠시 유지하기로 했다. 그 후 복지관장이 바뀌고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운영위원장 교체는 생각할 엄두를 못하여 불가불 이 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평창으로 임지가 바뀌면서 회의 참석이 더 어려워져서 2023년 4월 30일 임기 만료 이후 연임하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마침 정기회의가 열린 차에 미리 조촐하나 퇴임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2012년 공주를 떠난 이후 11년 동안 먼 거리에서 회의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던 주님의 사명이었다. 전혀 모를 뻔했던 복지 업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우리 주변의 소외 계층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이 일을 감당하면서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의 대부분이 전도와 치유 즉 복지활동이었다. 이런 일을 복지의 첫 글자도 모르던 100년 전 조선 땅에 감리교회가 처음을 열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올해 2023년은 보딩 선교사 선교 100주년, 명년 2024년은 공주 복지관 설립 100주년 되는 해다. 한국 감리교회가 우리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의 가까운 친구가 되어준 일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신앙유산이다. 이 일이 주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소금의 사명이다. 복지관 운영위원장의 임기를 마치면서 새삼 목회의 새로운 영역에 눈이 떠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시니라”(마태복음 14:14).
2023년 시무예배 설교(2023.1.2 공주기독교종합사회 복지관 강당)
시무예배를 마치고 태화복지재단 심정식 사무총장(우 2)과 함께
공주 복지관 한성욱 관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고(2023. 2.6)
공주복지관 운영위원들과 기념 사진
복지관 앞에서 박의현 부장(좌) 한성욱 관장(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