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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화요일에 음성버스를 보고 인사하려고 광장에 나갔다. 수녀님이 내리고 수사님
과 형제들이 먹을 것을 잔뜩들고 내렸다. 서로 반기었다나는 수녀님과 먹을 것과 초를 들고 서울역 쪽방촌에 갔
다. 한 형제님의 문을 똑똑 두드리니 술에 잔뜩 취한 도미니코 사비오라는 형제가 배에 링거를 꽂고 누워 있었
다. 당뇨합병증이란다. 술을 못끊어 연실 마셔대면서 배에 주사기를 꽂으며 인슐린을 투입했다. 징그러웠다. 수녀님이 그형제에게 기도해주시고 "김창호 도미니코 사비오 형제님, 붕어빵 장사해서 꽃동네 어려운 이웃들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
다." 꽃동네 '천사의 집에 다달이 붕어빵 팔아 돈을 부친것이다. 수녀님이 마련하신초를 드리며 "형제님, 기도 열심히 하세요~"하며 말씀하신다. 그후로 창호형제님집에 자주 찾아가 기도하고 서로 의지가 되어주었다. 나는 파를 썰보 오뎅도 꼬치에
끼우고 붕어빵 반죽과 팥속을 날랐다. 가스가 떨어지면 가스집에 전화해 가스를 교체했다. 형님과 꿍짝이 잘맞
았고 재미도 있었다. 어느날형님이 길건너 비영리단체'사랑방'에 인도해 주셨다.사랑방은 간사 한명과 복지사 두명이 사무를 보고 쪽방 어르신들이나 어려운 이웃에게 통장을 만들어 저축을 하는 곳이다. 회원은 200명이넘었고 누구든지 대출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시면 장사도 지내고 제사도 지내며 장지까지 가서 뼈를 묻어준다. 해마다 기억하며 제사를 지낸다. 환
자는 병원에 입원, 퇴원시켜주고 새벽마다 마을처소도 한다. 사랑방이 운영하는 '식도락'이라는 식당이 있는
데 화, 금마다 반차라눔도 하고 매일같이 쪽방어르신이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나도 뭔가
돕고싶은 마음이 우러났다. 처음 신발을 벗고 식도락에들어가 500원을 돼지저금통에 넣고 식사를 부페식으
로 담아서 먹었다. 소박했고어르신들과 장애인, 어려운이웃들은 표정이 천사같았다. 그냥 이건 식구나 다름 없었다. 나는 밥을 먹고 그냥 가기가 뭐해서 설겆이를했다. 칼도 갈고 청소도 하고 어르신들께 꼬바고박 인사를 했다. "어르신, 맛있게
드셨어요? 건강하세요." 난그 이후로 매일같이 식도락 에 출근했다. 그리고 중식주방장이 술에 취해 안나오
는 바람에 내가 본격적으로음식을 만들었다. 어르신들이 식사를 마칠 때면 사무실직원들이 들어와 식사를 한
다. '공룡'이라는 박정아 복지사와 '바람'이라는 별명을가진 복지사가 있다. 둘다 여자다. 바람이란 여자는 56살, 공룡이라는 여자는 45살이다. 둘이 환상의 콤비를 자랑하며 어르신들께지극정성이다. 공룡은 투잡으로 요양보호사 일도 한다.
사무일을 아침 일찍 끝내고남산을 올라가 찍고 내려온다. 공룡은 능력지다. 바람은 컴퓨터를 제대로 못한다.
공룡한테 배워가며 익히고 있었다. 어느날 한 달 가량 되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마티아'로 불렸고 마을 사람들
도 마티아라고 불렀다. 내이름이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금요 반찬을 만들어 시장에서 재료를 사오고 공룡과 함
께 반찬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애호박 새우볶음과 비엔나 소세지 볶음, 김치, 동치미 등을 만들어 포장을 했다
나와 공룡, 그리고 동네 할머니가 거들어주셔서 집집마다 음식들을 배달을 했다.
모두들 기쁘게 반겨해주셨다. 2016년 마흔 두살에 마흔 다섯 먹은 공룡과(박정아 소피아)같이 남산운동을
했다. 산에서 내려와 공룡은사무실로 가고 나는 주방으로 왔다. 아침 일찍 스타렉스로 시장을 보고 그날그날
의 메뉴도 내가 정하였다. 어떤 음식이 어르신들 입맛에 맞으려나... 매일 음식 걱정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
다. 공료의 운동화를 보니 많이 달았다. 그래서 남대문시자에가서 빨간 운동화를 사다 줬는데, 공룡이 나보고 다른 사람 눈도 있으니까 저녁에 단둘이 있을 때에 달란다. 저녁에 만나 신발을 건네 주었는데 공룡도 뭔가를 가지고 왔다. 열무김치를 가
져와 서로 교환 하였다. ㅎ~내가 음식 만들 때 내옆에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르신들이 드실거니까 아주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준비를 하고 칼질을 했다. 고등어도 조리고 불고기도 재
우고 깎두기도 담그고 겉절이도 그때그때 무쳤다. 그런나를 보고 '반했단다." 한 세달이 흘러 어느날 공룡(소피
아)한테서 전화가 왔다. "마티아~나한테 이사올래?" 나도 흥쾌히 수락했고 다음날 짐을 싸서 이삿짐 센터를
불러 소피아한테 이사를 갔다. 과거에 딸 둘 낳고 이혼한 여자도 소피아인데 이사람도 소피아다. 소피아집에
짐을 풀고 가구들을 배치했다. 소피아도 이혼녀이다. 소피아(45 소띠),나(42 용띠) 우리는 새벽마다 산을
오르고 내려와 소피아는 사무실로 나는 주방으로 갔다우리가 같이 산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날 소피아가 용산구청에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오겠다고 한다. 선간사가 눈치채더니 공룡도 알아버렸다. 동네
으르신들도 우리사이를 알게 되었다. 솦아는 구청에서태극기를 선물받아 집에 가져왔다. 어차피 다 알게 된
거니까 자신감이 더 생기고당당했다. 한 달 후 제주도에 계신 장인,장모께 인사를드리러 가자고 내가 말했다.
비행기표를 끊고 비행기에 올랐다. 해안로에 사시는 장인,장모님은 연세가 많으셨지만 건강하셨다. 소피아가 외동딸이란다. 장인어르신은 중소기업 회장님 출신이시고 장모님도 대단한 분이셨다. 큰절을 올리고 2층 우리가 잘 방으로 어머님이 인
도 해주셨다. 큰 창문 넘어 한라산이 우뚝 솟아있었고해변가엔 갈매기떼와 파도소리가 잔잔히 스치운다.
어머님이 밥먹으러 내려오라신다. 가정부가 한분 계셨고 주방일을 살피신다. 아주머니가 내놓는 음식들은 차
리고 차려도 멈추질 않았고상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생전 처음보는 음식들이잔뜩 펼쳐져 있다. 장인어른
이 소주는 못한다시며 내게 맥주를 권하셨다. 아버님의카리스마는 엄숙했다. 경상도분이시라 말도 없으시고 숱가락, 젓가락 소리만 잔잔히 들릴 뿐이었다. 다음날에아버님 차를 가족이 타고 해안가를 돌고 횟집, 돌솥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조랑말들
이 있는 곳에 가서 아버님의이야길 듣는다. 뒤끗이 없으신 분이어서 나름 편안했다.장모님도 나처럼 이웃을 돕
는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호로 계신 어르신댁에 가서 식사도 함께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린단다. 소피아가 장
모님의 피를 이어 밪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은 조금씩 풀리고 아버님 차로 우리
를 공항에 태워다 주신다.서울 집에 와서 난 곰곰히 생각했다. 강원도 내 고향엔 피붙이가 아무도 없지만 엄
마의 산소가 있고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는 곳이다. 이젠 그만 고향에 내려가고 싶
었고 소피아한테 의견을 이야기했다. 소피아도 조금 생각하더니 그러자고 뜻을 모아주었다. 다음날 우린 강원
도 홍천 내촌면에 내려가서 엄마 산소에 가 먼저 인사를드리고 내에 집을 얻을 곳을찾아다녔다. 차부집아줌마가 깨쁫한 빈집을 소개해주셨다. 집을 가서 보니 정말깨끗했고 방도 네개나 되었다. 내촌에 사는 선배에게 도배를 부탁하고 서울로 올
라와 짐을 쌌다. 사무실과 식도락 정리를 하고 소피아와 나는 어르신들을 일일이찾아다니며 시골내려가서 산다고 인사를 했다. 우는 어른신도 계시고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이미 마음이 떠났으니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이삿짐센테를 통해강원도 홍천 내촌까지 짐들이 운반되었고 우리도 따라 내려갔다. 제주도 장모님이 아주 큰 냉장고와 자전거 두
대를 선물로 보내셨다. "장인 장모님 소피아랑 잘 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설레이는 마음으로 우리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고 통닭과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내촌에는 공소가 있다. 신자는몇명 안되는데 가족같아서 재미있었다. 소피아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옛날 내촌중학교 시절 소풍갔던 강가로 놀러가서 다슬기와민물조개를 잔뜩 잡아와 아욱을 넣고 된장국을 끓여 먹
었다. 가가 맥히다. 우리는 한번씩의 이혼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더욱 단단해짐을 느꼈다. 우린 너무나 서로 사랑했고 눈에 콩꺼풀이 낀건지 어떤건지 몰라도 그렇게 하루하루가 기뻤다.성산성당은 차로 30분거리이다. 산을 열개는 넘어야 갈 수 있다. 주일마다 성산성당을 다녔고 나는 성가대에 뽑혀서 성가를 불렀다. 소피아도 시골이 너무 좋다
며 신기해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우리는 여섯달을 그렇게 자연과 놀았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
데 지붕을, 온 마을을, 산들을 모두 하얀색으로 색칠을했다. 소피아는 즐거워하였고 아이처럼 뛰놀았다. 이렇
게 많은 눈은 처음 본다며 연실 날뛴다. 나뭇가지에 맺힌 한뭉치씩의 눈송이들은 정말 예술작품이었다. 소피아는 연실 사진을 찍어대며 "여보! 이리와봐, 나랑 이렇게 찍어!!! 우린 서로 여보 당신하며 자연스럽게 호칭을 부르게 되었다. 봄이 오고 농사철이 시작될 시기에 성산성당 주임신부님이 배추농사를 크게 하신다고 들어 신자들이 모두 모여 밭을 갈고 갈퀴질을 하며 검은 비닐을 씌우고 배추를 심었다. 내촌 공소와 다른 공소두개를 짓는 사명을 받으셨다. 세개의 공소를 짓기 위해 절임배추로 팔 모양이셨
다. 신자들의 도움으로 한 해에 수억씩 장사매출이 올랐다. 신부님은 장군같이 생기셨고 등치도 크고 막걸리도 잘드시며 장비같았다. 삼년을 고생하셨고 공소 셋을 다 지으셨다. 얼마나 큰 사명에 큰 은총이란말인가!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안나온
다. 소피아가 운전면허증이 없다. 손이 근질근질 하대서 일이 하고 싶구나 생각하고동네 팀장 아줌마한테 "고추
따는 일을 한번 맡겨주세요"
했더니 아침 일찍 도시락을 싸고 소피아는 팀장님의 고추밭에 가서 하루종일 고추를 땄다. 난 속으로'힘들텐데...' 저녁에 소피아가 오더니 오늘 일당 갇았다며 좋아했다. 일이 너무 재미있단다나도 그때부터 인삼 캐는곳,더덕 캐기, 고추따기 등 안
다니는 데가 없이 잘 다녔다소피아는 이화여대 나오고예술대학을 나왔다. 소피아가 몸배바지나 입고 장화신
고 품팔이를 하는 것을 보니옛날 엄마생각이 자꾸나서 눈물이 맺혔다. "여보, 이제 농사일 그만"다녀 당신은 배
운게 너무 만찮아? 다른거해, 시골은 차가 없으면 도저히 꼼짝할 수가 없다. 홍천 시내는 버스로 한시간 거
리이다. 소피아가 알겠다고하며 인테넷으로 검색해 일을 알아보고 있다. "마티아여보! 홍천에 노인요양원이
있는데 거기나 가서 일해볼까? 어때?" 나는 "우리 차가 없고 버스도 하루 몇대 안다니는데 어떡하려구?"
운전면허 자격증을 따보라고 나는 권유했다. "난, 운전대만 잡아도 간이 작아져, 정말 따야해?" 나는 "어쩔
수 없어, 걸어다닐 수도 없잖아..." 소피아가 드디어 면허증을 따겠다고한다. 한 달후 면허증을 받아와서는 "처
음엔 후둘거렸는데 자꾸 해보니까 괜찮은거 같애"하고 말을 한다. 그 주에 면접을 보고 와서는 모래부터 일을 간다고 한다. 나는 하루전에 소피아랑 차를 보러 갔고 태우고 집에 왔다. 다음날부터 나는 운전기사 노릇을 했
다. 태우고 갔다가 저녁에 데리러 갔다. 소피아 비번 날에 소피아에게 운전대를 주고 도로주행을 시켰다. 첫째는 자신감과 자신의 사각지대 위치를 대각선으로 익히는 것이다. 한달 후 소피아가 혼자 가보겠다며 홍천시내로 운전해 갔다. 난 가
슴이 조마조마해서 전화기를 손에 쥐고 이제나 전화올까 저제나 올까! 진땀이 다난다. 한시간이 더 지난 듯..
드디어 전화가 왔다. "여보!나 잘 도착했어. 그런데 주차가 이상하게 됐어~!" 휴~
'하느님, 감사합니다.' 크게 숨을 몰아쉬며 긴장을 놓았다. 그후로도 나는 더덕밭, 콩밭, 김매기등 매일 일을 다녀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일을 인정 받았고 여자보다는 삼,사만원을 더 받았다인삼밭에서 캐는 것은 남자13만원 여자8만원이다
그리고 도시락을 싸오지 말란다. 더덕밭도 마찬가지다.6년근 인삼은 가치가 엄청
나다. 더덕도 3,4년 된 것이가치가 비싸다. 행여나 아줌마들이 욕심에 가방에 집어
넣어 가져갈 수가 있으니 도시락을 싸오지 말란 소리다.주머니가 많은 작업복도 금지다. 일꾼들의 참을 아예 식당에서 시켜 먹인다. 소피아는 열심히 어르신들을 모시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요양원 이름은'방지거의 집'이다. 천주교 수녀님께서 운영하시고 원장으로 계신단다. '소피이가 인터넷 검색을 그래서 한거구나' 속으로 기뻤다. 점심 식후에는 전체 직원들이 묵
주기도를 드린단다. 소피아는 집에 와서도 나와 함께 묵주기도 5단씩을 한다. 우린 서로 일적으로나 삶의 질
적으로도 행복했다. 가을이 돌아오고 날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돈 쓸 일이 없다. 아랫동네 농사팀장
한테 배추를 스무포기 사왔다. 장독을 두개 사고 땅에묻었다. 열포기는 김장을 하하고 열포기는 백김치를 담
궜다. 소피아는 마냥 신나있었고 김장 담그는 것도 처음해본단다. 겨울이 오고 또 산과 들이 하얗게 뒤덮혔다.
난 겨울에 농사일이 없어 좀쉬려 했는데 이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겨울에 잣나무와 소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일좀 도와달라신다. "아, 네내일 괭이랑 가방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소피아는 연차를 내고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나는 나무를 심으러 봉
고차에 올랐다. 아줌마들이열분정도 되고 남자들도 열명정도 되었다. 남자 세사람이 산에 올라 나무 심을 곳
에 깃발로 표시를 해서 꽂고아주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등에진 포대에 묘목을 잔뜩넣어 표지목이 있는 곳에 정
확히 괭이로 파서 나무를 심는다. 산림소장은 저 아래에서 망원경으로 쳐다보고 지시를 한다. 나무를 심는 것
은 예전 산불이 났거나 산사태로 파손된 산을 더이상 망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목재는 간벌하여 자손
들이 재료로 쓰기때문이다.예전에 뱃일 한 것에 허리를다쳐서 지개로 묘목박스를지고 아줌마들한테 날라주
는 일도 남자들의 몫이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나 경사가 심하게 기운데는 입에서단내가 나도록 헉헉대며 땀
을 흘려야 했다. 허리의 고통이 엄청났다. 남자들이 힘든일을 하는만큼 일당도여자들보자 많았다. 그래도
저녁에 집에서 있을 아내가 기뻐할 생각을 하니 힘을 낼수 있었다. '우리 소피아 심심할텐데..' 저녁에 집에 도
착해보니 맛있는 음식들이 보였다. 소피아가 "여보 수고했어? 배고프지, 이거 내가 인터넷 보고 요리한거야!
막걸리도 세병을 사다 놓았다. 정말 꿈결같은 시간들이 다. 아내는 내 허리에 찜질팩을 사다 둘러주고 약도 받
아왔다. 허리, 다리를 주물러 주는데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모든 것이 넉넉 했고 우린 마흔셋, 마흔여섯
한창때였다. 장인장모님께도 자주 전화드리고 여름에는 찰옥수를 두박스씩 보내드렸다. "김서방, 찰옥수수
가 진짜 맛있네? 고마우이,정아랑 아프지말고 다투지 말고 잘 지내게나?"~ "어머니 아버님도 건강하세요. 내
년에 한번 내려갈게요."
첫댓글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