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던 엄마가 그립다 / 박명숙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선선하다. 온열병으로 쓰러진 사람이 많았던 이상 기온 날씨도 자연의 순리 앞에 드디어 무릎 꿇었나 보다. 마당가 풀밭에서 귀뚜라미가 자기 영역을 알리느라 지칠 줄 모르고 소란스럽게 울어 댄다. 여름 내내 나와 마주하며 정담을 나누던 무궁화도 찌든 더위에 지쳐서인지 올해는 일찍 자취를 감추려고 채비하는 모양새다.
마음이 스산하다. 딸들이 오기만 온몸으로 기다리다 지쳐 힘이 빠져 있을 친정어머니가 눈에 밟혀 아침부터 손발이 바빠진다. 입맛이 없다고 음식을 삼키지 않으려 하니 평소에 좋아하시던 걸 가지고 가 봐야겠다. 빨대로 쪽쪽 빨아 맛있게 드실 어머니를 애써 상상해 본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꿀물에 오곡 미숫가루를 듬뿍 넣은 병을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엄마, 저 왔어요. 어젯밤에 편히 주무셨어요? 허리는 아프지 않았나요?” 하며 안색을 살핀다. “와 줘서 고맙다. 내가 딸 복은 있제.” 세상 부럽지 않을 표정으로 반긴다. 외부인 목소리를 듣고 병실 어르신들의 눈이 일제히 내게로 쏠린다. 간병인이 있는 간호통합병동에 나란히 누워 있는 분들은 대부분 노환이고, 치매 환자들이다.
입원 신청할 때 간호사가 물었다. 낙상 위험이 있는 환자라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안전하게 묶어도 되는지를. 다치면 책임지지 않는단다. 골절로 고생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허락했는데 막상 손과 발이 끈으로 칭칭 감겨 있는 걸 보니 어머니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너무 미안했다. 침대 난간에 손목을 빠짝 묶어 꼼짝도 못 하게 단단히 해 놨다. 가려우면 긁을 수 있게, 한 손이라도 조금 느슨하게 해주라고 간호사에게 말했더니 “귀신같이 알고 풀어 버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했다.
병실로 가니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어르신들이 애절하게 나를 불러 댄다. “침대 조금만 높여 줘 봐.” “베개를 위로 올려 줄랑가?” “옷 좀 바르게 입혀 줘 보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환자들의 부탁을 못 들은 채 가만히 있는 게 더 불편해서 간단한 건 도왔다.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는 분은 고맙다고 인사했고, 그럴 기운도 없는 사람은 눈만 깜박거렸다. 그런데 몸이 꼬여 있는 어르신은 엄두가 안 났다. 간병인들이 쉬고 있는 방에 가서 상황을 알리니 싸늘한 대답만 돌아온다. “엄마만 챙기고 가세요.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 신경 쓰지 마요.” 한다. 늘 그래 왔다는 듯 반응했다. 냉정하기 그지없다. 말벗이 돼 달라고, 관심 받고 싶어 부른다는 걸 자기들도 아는데 일일이 대꾸해 주다 보면 버릇돼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 나빴다. 간병인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묻고 싶었으나 앞으로 1주일은 더 병실에 있어야 하는 엄마 보호자로서 미운털이 박힐까 봐 꾹 참았다.
코로나19 전염병 후유증으로 밥은커녕 죽도 넘기지 못했다. 걷지 못해 휠체어로 움직이는데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우리가 '참는 달인'이라고 할 만큼 잘 견디는 어머니인데 얼마나 고통스럽기에 저럴까 하여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봐도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의심스러워 한 군데 더 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정형외과 검사 결과에서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말로만 듣던 코로나 후유증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불청객처럼 어머니에게 찾아와서 괴롭히고 있다. 작년에는 격리 기간이 끝날쯤 증세도 좋아져 일상으로 빨리 돌아와서 이번에도 잘 넘어가겠지 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몸은 갈수록 처졌다. 점점 기력이 없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식사를 거부하니 요양원에서도 입원하여 치료하는 게 낫겠다고 해서 병원으로 모셨던 거다.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된 내 어린 시절의 어머니는 하루도 집에서 노는 날이 없었다. 온종일 들에서 일하다 어두워져야 일손을 놓고 귀가했다. 키 150센티미터, 몸무게 40킬로그램의 여리고 작은 체구로 별의별 농사를 다 지어 봤다. 무와 배추는 기본이고, 대파, 딸기, 토마토, 목화를 몇 마지기씩 가꿨다. 손수레가 없던 시대라 무거운 것도 머리에 이고, 들고 다니던 때였다. 허리가 휘도록 일만 했으니 당신 몸 거들떠볼 새가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어려운 살림에 조카들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큰집 식구들까지 극성스럽게 챙겼다. 우리도 평소에 먹어 보기 힘든 비싼 음식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1년에 몇 차례씩 대접하는 인정도 넘쳤다. 사서 고생한다고, 퍼 주기 좋아하는 이런 엄마에게 불평이 많았다.
“엄마, 왜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놀고, 게으름도 피우며 적당히 일 하시지요.” “그땐 너희들 키우려면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지금은 맨날 논다.”
걸어 다니던 엄마가 그립다.
첫댓글 우리 어머니도 풍 때문에 잘 걷지 못한답니다.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앞으로 우리 자화상이라 더 슬프네요. 아마 집집마다 당면한 문제일 겁니다. 건강한 노후를 목표로 삼고 살아야겠어요.
그러게요. 쉬어 본 기억이 없는 그 시대의 어른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막상 쉬는 날이 주어져도 그 여유를 온전히 즐기시질 못하시더라구요.
우리들의 어머니는 왜 다들 그럴까요?
죽어라 일만 하다가 이제는 편히 쉬실 수 있을텐데 그러면 또 이렇게 병마가 찾아오니.
그래도 예쁜 딸이 곁에서 지키니 좋으시겠네요.
힘내세요.
글 정말 좋네요.
누워 계시는 어머니라도 계셨으면 하는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위안 삼으시길요.
어리광 부릴 정신도 있으시고요.
그래도 마음이 아리는 글이네요.
슬픕니다.
병원에 계시는 어르신들 모습이 눈에 선해서 가슴 아프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선한 모습을 꼭 닮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이고. 병원에서는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래요? 손발 묶이는 건 너무 참담할 것 같아요. 의식 없는 분도 아니고...
요즘 병원, 그렇게 불친절하게 하면 안 되는데.
제 맘이 다 아리네요. 속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