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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아빠수업(이 시대 부모와 자녀를 이해하기 위한 아빠학 교과서)
저- 오광조(의학박사. 상담심리학 공부)
출-미문사
독정-2018년 12월 31일
ㆍ1만 시간의 법칙: 어떤 일이든 1만 시간만 집중하면 전문가가 된다. 서당 개도 3년이념 풍월을 읊는다. 오랜 시간 한 분야 몰입에 몰입하면 익숙해진다.
ㆍ군대를 다녀오면 더 이상 미성년자라고 핑계 댈 수 없다. 세상에서 도망칠 동굴의 문이 닫힌다. 꿈이 풍선이라면 아이는 족쇄가 된다. 꿈을 쫒아 하늘로 날고 싶던 남자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세상에 착륙한다. 잘 살았는데 왜 남자의 꿈이 생각나고 못한 일에 미련이 남을까.. 아빠도 남자도 꿈에 도전하는 남자다. 남자는 사자가 되고 싶다. 갈기를 휘날리며 초원을 호령하는 사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사자가 되려면 혼자가 되어야 하고 외로움에 익숙해야 한다. 혼자 될 자신이 없으면 사자가 되고 싶은 꿈은 버려야 한다.ㆍ
ㆍ사자가 없거나 사자와 떨어진 초원도 있다.. 초식 동물도 우아하고 편안하게 삶을 사루 있다. 집단에서 가장 빨리 달리면 평생 잡아먹힐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풀은 사방에 있다. 힘들게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몇 시간씩 먹이를 노리고 숨어 있을 필요도 없다. 먹이를 잡으러 전력 질주할 일도 없고 사냥에 실패할까 걱정도 없다. 먹이를 못 잡아 굶주릴 일도 없다. 고개만 숙이면 먹이가 있다. 초식 동물의 삶이 더 안정적일 수 있다.
사자의 삶은 항상 위험하다. 사자를 공격하는 동물은 없고 먹이는 사방에 있다. 그러나 사냥을 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한다. 사냥에 실패하면 굶는다. 실패의 반복은 죽음이다. 사냥에 성공하면 그때는 행복하다. 그러나 다시 배는 고프고 먹이를 구해야 한다. 사냥감을 찾아야 한다 방금 전까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그 많던 초식동물은 자사가 몸을 일으키자 일제히 자취를 감춘다. 이제 사냥 준비를 한다,. 저 멀리 먹잇감이 보인다 .몸을 최대한 숙이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면서 뛸 준비를 한다. 평안은 짧고 배고픔은 길다. 풀은 도처에 널렸지만 사냥감은 도망갈 줄 안다. 사자의 삶은 주체적으로 사는 삶과 바꾼 배고픔이다. 사자는 굶어도 풀을 뜯지 않는다. 육식과 초식을 다 하는 잡식이라면 생존에는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육식과 초식을 다 하는 곰을 아무도 동물의 왕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다 먹는 곰은 훨씬 살아남기에 유리하다. 사자보다 덩치도 더 크다. 그래도 왕은 아니다. 단지 동물계의 강자 중 하나일 뿐이다. 육상 동물 중 사실상 최고 강한 동물은 코끼리다. 사자도 가볍게 한 방에 날아간다. 진정한 동물의 왕이다. 거대함 몸 자체로 위압감을 준다. 덩치에서 나오는 힘을 상대할 동물은 없다. 동물 탱크라는 코뿔소도 가볍게 날려버린다. 그렇지만 그에게 왕의 모습은 없다. 그는 풀과 과일을 먹는다. 다른 동물은 먼저 공격할 일이 없다. 그래서 겁이 나지 않는다. 물론 그가 화가 나면 피해야지만 평상시에는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무리로 살고 무리로 다닌다. 왕은 절대 무리로 다니지 않는다. 왕국에서 그는 혼자다. 왕은 외로워야 한다.(사람도 기관장은 외롭다. 반경 30cm 근방에는 사람들이 앉지 않는 걸 보면 안다-선.)
코끼리는 털이 없다. 가죽이다.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다. 해를 등지고 서도 칙칙한 회색이다. 사자는 황금빛이 우아하다. 그래서 석양에는 눈부시다. 바람에 갈기가 날리고 햇빛에 털 한 올 한 올이 빛난다. 황금은 왕의 상징이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궁전과 장식은 왕의 특권이다. 사자는 왕이다. 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석양을 등진 모습은 눈부시다. 초원에 홀로 우뚝 서서 지평선을 응시하는 진정한 군주다. 그는 항상 혼자다. 고독을 운명으로 알고 외로움을 참아낸다. 세상을 혼자 지배하고 대가 되면 물러난다. 그리고 혼자 삶을 마친다. 그래서 왕이다.
남자는 수사자를 흠모한다. 존경하고 흉내 낸다. 그러나 대부분 거기까지다. 거의 초식 동물의 삶을 산다. 되지 못한 꿈이기에 더 간절하다.
인류 역사를 보면 모계 사회로 출발했다. 여자를 중심으로 군집 생활을 하면서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양육을 책임졌다. 사냥은 위험한 활동이고 치사율이 높다. 남자가 중심이 된다면 우두머리의 잣은 부재로 그 집단은 유지되기 힘들 것이다. 비록 부족장은 남자가 맡더라도 여자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고 남자는 사냥을 해서 먹이를 잡아오고 사냥 중에 사망하면 바로 집단원이 보충을 하는 방식이 집단이 생존하고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여왕벌 한 마리를 수많은 일개미들이 보호하는 형태다-선) 육체의 힘도 세고 먹이를 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더라도 남자는 집단의 주역이 되기 힘든 구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자가 어떻게 집단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남자 가장 한 명에 가족이 위지하기는 너무 위험이 큰 시절에 여자를 중심으로 집단이 굴러가는 것이 필연이자 현명한 선택이다. 남자가 역사 정면에 나선 것은 문명이 발생한 뒤 한참 뒤 일이다. 사냥에서 죽을 위험이 줄어들고 농경에서 가축과 육체의 힘이 중요해지며 경제에서 남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었다. 10대조 20대조 조상님의 피가 이어진다는 말도 우습다. 계속 모계의 피가 섞여 부계의 피는 흔적도 없는데 조상님이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정신적 위안일 따름이다. 더구나 양자도 많이 들이고 전쟁 중에 족보도 흩어졌는데 애써 가문을 찾는 일은 안스럽다.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더라도 5대조 10대조 조상과 내가 유전자 검사를 하면 일치율이 얼마나 될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람종이고 한민족이라는 정도 일치율일 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말은 부질없는 욕심이다.
여자에게 지는 건 자존심 문제다. 겉으로 참아도 속으로는 언젠가는 뒤집으리라 칼을 간다.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되면 게임 률이 바뀐다. 둘 사이에 아이가 끼어든다. 둘이 마주보는 삶이 아니라 아이를 보는 삶이 된다., 마주보고 달리면 충돌이 생기고 싸움이 나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달리면 부딪힐 일이 없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고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둘은 한 팀이 된다.(하느님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아이를 주셨다-선) .아내의 남편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새로 자리를 잡는다. 항상 어깨에 가족을 태우고 산다. 모든 판단 기준에 가족이 제일 우선순위다. 제멋대로 살던 삶에 목표와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긴다. 가족이 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이고 외풍을 막아주는 담이자 지붕이다. 세상의 풍파를 맨 앞에서 먼저 맞고 문단속을 한 뒤 가장 늦게 방으로 들어온다. 남편은 책임이자 의무다.
남자는 약점을 드러내길 싫어한다. 낯선 길을 갈 때도 묻기보다는 스스로 찾으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나이 반도에서 몇 십 년을 헤맨 이유가 모세가 자존심 때문에 길을 물어보지 않아서라는 농담도 있다. 여자는 모르면 묻는다. 남자는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독립된 인격의 존재를 인정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신혼 초에는 ‘자릿함과 신선함이 있다. 아직 연애 감정도 있고 상대에 대한 어려움과 존중감이 있다 서로 맞추려 노력한다. 그러나 신혼의 신선함은 잠간이고 바로 투쟁의 시간이 온다. 관계 주도권을 잡으려는 공식 비공식 투쟁이다. 수십 년간 집 밖으로 다투는 소리가 한 번 들리지 않고 산 부부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비결을 묻자 아내가 말했다. 신혼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탄 낙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이 조용히 ’하나“하고 낙타를 끌었고 낙타는 계속 고집을 피웠다. 그러자 남편은 말릴 겨를도 없이 총을 꺼내 낙타를 쏘아 죽였다. 아내가 남편에게 항의하자 남편이 조용히 ‘하나’했다. 그길로 끝이었다. 아내는 일절 남편과 싸우지 않았다. 나도 ”하나“ 해보았다. 구박만 더 들었다. 남편은 여러 뜻이 있다. 사회적으로 부인의 반대말이다. 가정에서는 집안의 가장이다. 부인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듬직한 내 편이다. 사이가 나쁘면 남의 편이다. 결혼 직후 남편은 내 편이 아니다. 평소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내다. 퇴근 후 돌아갈 집은 익숙하고 포근한 엄마 집이 아닌 아직 낯선 여자가 버티고 있는 집이다. 엄마 집은 밥도 챙겨주고 청소를 안 해도 되고 전기, 전화 요금, 새금 안 내도 된다. 하지만 신혼집은 청소를 해야 하고 공과금도 챙겨 내야하고 밥값도 스스로 벌어야 한다. 아빠가 되면 달라지는 것은 일단 가족이 늘고 주민등록 서류를 떼면 없던 이름이 달린다. 나 다음으로 따라오는 이름을 보면 바짝 긴장 안 할 수 없다. .비로소 내가 아빠, 가장이 되었구나 현실감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말 뒤에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위로가 쏟아진다. 총각 때처럼 놀고 싶어도 잔소리가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만 기회만 되면 핑계를 대고 탈출한다. 제일 많이 동원하는 명분이 상가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의 부모는 다 사망 신고를 했다는 말도 나오고 잠깐 방심하면 죽은 사람 또 죽이는 일도 생긴다, 가기 싫은 학회도 꼭꼭 참석하고 당직도 기쁘다. 그렇게 싫은 예비군동원 훈련도 기다린다. 아이가 생기면 모든 게 바뀐다. 나를 닮은 조그만 생명체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아기가 가문에서 첫째거나 절실히 바라던 대를 이을 남자아이라면 흡인력은 블랙홀 급이다.
-나도 한때는 아들이었다.
발목에 파인 상처는 초등 들어가기 전 아빠와 산에 갔다가 깨진 유리병을 밟았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발목을 찔러 피가 철철 났고 놀라서 뛰어온 아빠 표정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아빠 등에 업혀 산을 내려옸다. 상처가 따듯하다. 아빠와 내가 가장 오랫동안 접촉한 기억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짝사랑할 때 아버지는 바쁘다. 밖에서 거인들과 싸우기에도 힘이 부친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쓰러진다. 힘을 비축해서 내일 또 전투에 나간다 ,아들은 아버지의 힘센 팔과 등에서 놀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는 피곤하다, 머릿속에는 내일 싸울 적으로 가득하다. 문을 닫고 불은 끈다. 아이는 엄마 손에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끌려 나간다. 그렇게 영웅은 가까이하기엔 먼 존재다. 시간은 흐른다. 아버지를 더 이상 올려다보지 않는다. 눈앞에서 본 아버지는 주름도 많다. 흰머리도 많다. 영웅은 죽어버렸다.
자식은 부모 마음에 못을 박으면서 자란다.. 행동으로 말로 표정으로, 부모는 자식이 박은 못을 가슴에 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킨다. 녹이 슬어 녹물이 벌겋게 흘러내리고 세원은 흘러 껍질이 못을 덮는다. 나중에 자식이 못을 빼도 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는 항상 괜찮다고 한다.
자식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에 바쁘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아이는 잘 자고 있다 했다. 통화를 마치려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너는 니 새끼만 걱정하냐? 보낸 어미 생각은 안 하냐?” 하셨다. 몇 년을 재우며 키운 손주를 보낸 어머니 마음은 얼마나 허전할까? 밤새 보고 싶어 눈물도 났을 것이다. 아버지 무덤은 생전 모습처럼 푸근하다. 생각할 추억이 있는 삶에 감사한다.
남자의 꿈은 셔터맨이라는 말이 있다. 아내가 돈벌이하고 자기는 아침에 출근, 셔터 올리고 퇴근길에 셔터 내리고 낮에는 노는 꿈. 무게가 없다면 사람은 지상에서 살지 못한다. 헬륨 가스처럼 둥둥 떠다닐 것이다. 바다에서 다이빙을 할. 때는 추를 달고 내려간다. 가다보면 물속으로 깊이 잠수할 수 없다. 인생도 무게감을 못 느끼면 붕 떠 있는 삶을 산다. 부초처럼 여기저기 안착하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결혼하고 아빠가 된 남자는 사라진다. 먼저 남자가 버는 돈은 남자의 것이 아니다. 가족의 돈이다 항상 모자라기 때문에 남자가 스스로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다. 또 아빠가 되면 돈을 쓰기가 아깝다. 술 한 잔 마셔도 밥 한 술 먹더라도 이 돈이면 우리 애들 과자가 몇 봉지인데, 아이들 삼겹살을 먹일 수 있는데 계산을 한다. 여자는 더하겠지만 남자도 아빠가 되면 모든 소비와 행동의 기준이 아이와 가족이 된다. 안방은 가족의 방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온다. 아이들 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노크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면서 아빠가 쉬고 있는 안방은 공용 공간이다. 집에서 아빠는 사생활이 없다. 텔레비전은 아내와 아이들 차지가 된 지 오래고 아빠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항상 뒷전이다. 리모컨은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방에 아빠 손에 들어온다. 직장에서 남자는 지기 공간이 있다. 직급이 낮으면 책상이 있고 직금이 높으면 방이 있다. 자영업을 하면 직장이 내 공간이다. 직장에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대부분 자기 영역에서는 존중을 받는다. 직급에 따라 힘을 과시할 수도 있다. 가족은 아빠를 잠옷 입은 남자 어른으로만 대하지만 사회에서 남자는 김 과장. 이 사장으로 직함을 앞세우고 조직원을 거느린 파워맨이다. 아이도 학년이 오르면 아빠의 사회적 지위에 관심 갖는다. 잘나가는 아빠는 자부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도 가정에서 아빠를 대하는 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성취는 아들이 세상에 나가면서 다시 보기 시작한다. 가끔 아빠도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가 있다. 약속이 있다면 그 시간은 자유다. 집으로 출근 시간을 늦추는 거다 시간이 늦어 전화가 오면 그때서야 들어간다. 남자도 집에서 쉬고 싶다. 해주는 밥 먹고 방해받지 않고 자기 시간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사춘기 아이들은 더 이상 아빠를 반기지 않는다. “오셨어요?” 한마디면 끝이다 아내가 반겨 주고 챙겨 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는 날은 외롭다. 아이들이 대들거나 일이 있으면 휴식은 물 건너간다. 집안 일을 해결하고 가족과 신경전을 펴면 직장보다 피곤하다. 차라리 기러기 아빠가 부럽다. 원룸을 잡고 혼자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돈을 버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돈을 버는 아빠는 인정받지 못한다. 빈자리가 생겨야 그제서야 중요한 걸 안다. 이래저래 아빠는 힘들다. 부모 눈에 자녀는 항상 어린애다. 나도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지만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아이들은 싫어하면서 대를 물린 삶을 반복하고 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아버지가 반군에 포로로 잡힌 아들을 구한 방송을 보았다. 군 복무 중인 아들이 19세에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에게 끌려간 뒤 12년 만에 아버지의 끈질긴 노력으로 석방된 내용이었다. 1997년 아들인 몬카요는 반군에게 납치되었다. 다들 죽었다고 포기했는데 우연히 반군이 공개한 영상에서 아들이 살아 있는 걸 본 아버지 구스타보는 아들의 석방을 위해 나섰다. 1007년 6월 29일 반군이 포로를 묶는 방식대로 쇠사슬로 손목을 묶고 목에 두른 채 전국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셔츠에는 반군이 공개한 아들 모습을 새기고 한 달간 1000km를 걸었다. 이유는 단 하나. 포로 교환에 정부가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콜롬비아 정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아들의 석방 지원을 탄원했다. 그의 행진으로 아들 몬카유의 억류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은 그와 함께 걸으며 위로했고 그를 ‘평화의 보행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야기는 주변국과 교황청에 전해져 ‘반군과 협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정부의 방침을 바꿨고 협상 후 반군은 12년간 포로생활을 한 아들 몬카요를 석방했다. 19세에 납치된 아들이 32세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려 몸에 쇠사슬을 감고 한 달에 1000 km를 걸었다. 절대 협상은 없다던 정부도 그의 노력에 감동한 여론에 굴복했다.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행동했다. 아버지가 되는 건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걷는 길이다. 아버지의 사슬은 가족이다. 가족은 아버지의 짐이고 목표고 의미다. 세상이 바뀌어 여자의 권리가 향상되고 가정에 충실한 전통적인 여성상이 재정의가 되는 현 시대에도 남자의 역할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가정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지키고 가정이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전통적 남성상은 더 강화되는 느낌이다. 아빠가 도리어 울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가정의 최전선이다. 외부 충격의 일차적 방어막이다. 그가 무너지면 충격이 가정으로 바로 밀려온다. 해일을 막는 방파제다. 버티지 못하면 가정을 기댈 데가 없다. 힘들어도 울면 안 된다. 엄마는 눈물이 무기다. 가끔 눈물로 아이와 소통한다. 아빠의 눈물은 항복의 눈물이다 다 해볼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 절규다. 아빠는 아프면 안 된다. 그가 아프면 가정은 무너진다. 남자가 사냥에 실패하면 가족은 굶는다. 빈손으로 돌아오면 재앙이다. 동물에게 배고픔은 생존의 문제다. 그의 노력, 경제력은 가정의 경제력이다. 아빠는 아플 수가 없다. 가족을 다 태운 차는 아빠가 운전을 한다. 아빠는 가끔 장난감도 되고 장식품도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빠를 두고 숨바꼭질도 하고 등에 타고 말타기도 하고 팔에 매달려 운동도 한다. 아빠 발을 밟고 한걸음씩 돌아다니고 아빠가 밀고 끌면서 미끄럼도 탔다. 엄마는 덩치가 작아 아빠처럼 놀 수가 없다. 팔이 저리고 부들부들 떨려도 아이가 원하면 로봇이 돈다.(아빠는 장난감, 장난감 아빠) 무거운 책상도 불끈 들고 침대도 쉽게 움직인다. 우리 집의 삼손이다. 아이와 손가락 하나로 팔씨름을 한다. 아이가 어리면 아빠 배가 훌륭한 침대다. 아이를 엎드려 배에 재우면 편안하게 잠잔다. 아이가 깰새라 몇 십 분씩 한 자세로 있어도 즐겁기만 하다. 숨에 맞춰 아이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경험은 아이와 완전한 교류다. 아쉽게도 아주 짧은 시간만 경험할 수 있다. 아이는 금방 자란다. 아빠 배는 더 이상 푹신한 침대가 되기 어렵다. 어릴 때는 과자 한 봉지면 “아빠 최고” 소리가 나온다. 아이가 자랄수록 돈의 액수와 투자하는 시간이 커진다. 작은 걸로 기뻐하고 토라진 아이의 존재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축복이다.
남자가 홀몸이거나 혈기가 왕성한 청년이면 분명 충돌이 난다. 대들고 싸우고 뛰쳐나간다, 자녀가 딸린 남자는 그럴 수 없다. 욱하고 올라오더라도 바로 가족 생각이 따라온다. 그는 홀몸이 아니다. 가정을 대표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입원이다. 왜 돈을 벌어야할까? 맛있는 것, 폼 나는 것, 새 차 사려고. 다 조금씩은 이유가 된다. 하지만 돈을 버는 이유는 하나다.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번다. 돈을 벌어야 생활비를 충당한다. 아이들 학비를 대고 아이들 용돈을 준다. 일부 생계가 해결된 가장을 제외하고 아빠들이 일하는 이유는 다 같다. <극한 직업> 프로그램 제목대로 육체적으로 엄청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취재한 내용이다. 빌딩 꼭대기에서 고압선에서, 파도 심한 배에서, 푹푹 찌는 용광로에서, 다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다. 가족 때문에 가족 부양 보람과 책임 때문에 힘들어도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면 쉴 수가 없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도 마찬 가지다-선) 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가족들 사진 보거가 가족과 통화하는 일이 낙이다. 아버지에게 가족은 삶의 동기이고 목적이며 즐거움이다., 힘든 일을 견디게 하는 멍에이자 진통제다. 아빠에게 아침은 일터로 가는 시간이다. 노동을 제공하고 일당을 받으러 출동하는 시간이다. 자아실현을 하거 가는 시간일수도 있지만 삶의 현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이다. 본격적으로 일과가 시작되면 노동은 수당으로 환산되고 몸값으로 계산된다. 모든 노동은 돈을 버는 행위다. 세상과 독립되어 자급자족을 하지 않는 한 돈을 벌어 밥과 바꿔야 한다. 가끔 복에 겨워 취미와 적성이 일치하는 사람이 있다. 일이 좋아서하다 보니 돈이 따라 온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은 일이 목표가 아니다. 일에 따른 보상이 목표다. 더구나 부양가족이 있는 사람은 보상의 크기와 연속성에 민감하다. 부양가족이 딸린 가장에게 일을 하면서 자아 성취, 자기 계발은 사치다. 가장에게 일은 생존이다.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아빠의 아침 출근길은 비장하다.(만원 지하철 출근길, 전쟁터 같은 지하철을 타고-선) 즐겁게 여행 가듯이 다녀오는 길이 아니다. 수렵 시대라면 마지막이 될 순간이기도 하다. 그때라면 가족이 나와서 배웅을 했을 것이다. 가족의 생존 앞에 가장이 받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줄어든 통장 잔고를 보며 가장은 입이 바짝바짝 탄다. 그래서 급하게 창업에 뛰어들어 실패하기도 한다. 가족의 생계를 혼자 지고 가는 가장은 외롭다. 더구나 어려움을 내색하기는 더 힘들다. 매일 집을 나서는 아빠는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전사가 된다.
-아빠는 이방인
아빠는 왜 있는 거지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저 좋다/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초등 2학년 시다. 아이들 시신에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주말에도 아빠는 바쁘다. 밀린 일을 마저 하거나 밖으로 나간다. 집에 있어도 TV를 보거나 잔다. 집에서 그는 ‘잠자는 집속의 남자’다. 어쩌다가 깨어서 만나도 어색하다. 아바는 억울하다. 아빠가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을 늘리면 수입이 준다.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고 아빠는 돈을 벌러 나간다. 아이가 아바에게 돈 좀 달라고 조르며 한 시간에 얼마 버는 지 묻는다. 아이가 돈을 아빠에게 주며 한 시간만 놀아달라고 한다. 아빠가 아이와 계‘속 놀면 아이에게 줄 돈을 벌지 못한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문제는 아이가 자라 교감이 안 되니 낯 설다. 비장의 무기 과자를 들이댈 수도 없다. 남자는 원래 대화에 약하다. 명령하고 군림하려 한다. 잘 듣지 않는다. 또 아이들이 이야기를 하면 해결책을 제시한다. 말을 자르고 “답은 뭐다” 지시한다. 오랜 시간 정리되지 않은 아이들 말을 듣기는 곤혹스럽다. 남자아이면 사내자식이라고 끝내고 여자아이는 엄마에게 이야기하라고 떠넘긴다. 가장의 선택에서 첫 번째 고려 대상은 가족이다. 가족을 잘 부양하고 편하게 해주는 게 제일 크고 중요한 선택 기준이다.
아빠는 불량배는 무섭지 않다. 불량배를 만난 일도 드물지만 설혹 부딪힐 일이 있으면 피하면 되고 그 순간 자존심을 굽히면 된다는 걸 안다. 또 한국의 치안 상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게 안전하다. 아바의 걱정은 아빠 한 몸보다 가족의 안전이다. 아이들의 학교생활, 안전사고 등이 무섭다. 교통사고나 가끔 신문에서 보는 자연재해가 무섭다. 아빠가 무서운 건 사고나 다툼으로 집안의 평안이 깨지는 일이다. 아빠가 다쳐 수입이 끊기거나 가족이 다치는 일,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는 일, 아이들이 비뚤어질까 걱정되고 아이들이 꿈을 잃을까 걱정되고 아이들의
꿈을 도와주지 못할까 걱정된다. 아빠는 자나 깨나 가정과 가족을 생각하며 산다.
데이비드J. 스미스의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은 63억 인류를 100명으로 축소해서 묘사한 책이다. 마을에 사는 100명 가운데 수도가 없는 곳에 사는 사람이 38명. 24명은 전기 없는 곳에 산다. 컴퓨터가 있으면 상위 20명, 은행 계좌가 있으면 상위 30명, 냉장고, 옷장, 잠자리, 지붕이 있는 집이면 25명 안에 든다고 한다. 한마다로 우리는 복 받은 시대에[ 복 받은 지역에서 축복받고 산다. 일전에 <공습>이라는 일본 저널리스트 책을 읽었다. 중동 지방은 전쟁이 일상. 저녁 먹는데 식탁으로 폭탄이 떨어지는 일이 흔하다. 삶에 평안이 없고 미래가 없다. 단지 오늘 살아남는 게 눈앞의 목표다. 생존이 해결되어야 그 뒤에 자아실현이니 취미니 행복이 등장한다. 삶의 불만도 어찌 보면 배부른 투정이다. 이 땅에서 이 시절에 태어난 축복에 감사한다. 돈 소리에 지치면 “차라리 아빠를 팔아라.”고 한다. 즉각 답은 “에이, 누가 아빠를 사?” 하긴 나를 사면 내 가족이 다 한 묶음으로 따라가는데 누가 살까. 아빠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장소는 돈을 쓰는 술집이나 사무실. 집뿐이다. 술집은 손님이 왕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동이 왕이다. 아빠는 술집에서 왕 대접 받을 만큼 돈을 쓰지 못한다. 아까워서 못 쓴다. ‘이 돈이면 아이들, 가족에게 통닭을 사갈 수 있는데.’하면서 술 몇 병, 안주 한두 개로 기분만 한껏 낸다.(골목을 돌아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 못나고 흠난 사과를 파는 트럭이 있다. 멈춰 서서 흠 있는 사과라도 ‘벌레 먹은 사과가 더 맛있어!’ 체면을 걸며 만 원짜리 한 장 주고 한 봉지 그득 담아 온다. 대형백화점 바구니에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한 인물로 담겨있는 과일은 대체 어떤 부자가 사갈까 싶다. -선)
아내가 아빠를 존중하고 챙겨 주면 그래도 위안이 된다. 아빠가 바쁘거나 냉정중일 때 아빠는 외롭다. 큰소리를 내보다 애들은 입을 닫는다. 고개 숙이고 D“예에’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나가 봐라.“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제 방으로 간다. 결국 원군을 찾는다. 도와줄 사람은 아내뿐이다. 꼬리를 내린다. 약한 핀잔을 감수한다. 알아서 집안일도 처리하고 아양을 떤다. 아내가 용서하면 안심한다. 집에 있을 자리가 생겼다. 맘이 통하는 친구와 넋두리만 한다. 친구도 비슷한 고민이다. 그래도 결론은 항상 똑같다. ”열심히 살아야지, 누가 알아주길 바라냐? 내 책임이고 내 팔자지.“ 아빠의 삶이 이런 줄 알아도 아빠가 되었을까?
아이를 꾸중하다 충돌이 일어난다. 조용히 이야기하면 애들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 그래도 순간은 힘들다. 오죽하면 “사랑받는 아빠는 포기했다. 존경받는 아빠도 포기했다. 존중받는 아빠만 되려 한다.” 고 선언했다. 밖에서 모르는 어른 대할 때 하는 정도 예의만 차려 달라고 했다. 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 아빠는 가정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 애들이 어릴 때는 힘이 있고 또 경제력이 있어 가정의 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지만 사춘기만 지나면 애들은 반항한다. 아빠가 화내면 “아빠 왜 그래.”하면서 엄마에게 이른다. 엄마가 아빠 편을 들면 “엄마와 아빠는 늘 한편이야.” 하며 싸잡아 묶는다. 그런다고 치사하게 아빠가 용돈을 끊을 수도 ㅇ벗다. 유치하다고 역공하니까 엄마가 집을 비운 날 애들과 있으면 영 어색하다. 분명 내 집인데도 손님이 된 느낌이다. 아빠가 집에서 설자리는 어딜까.
얼마 전 모든 남성에게 충격을 준 소식이 있었다. 드러난 사실만 보면 한 연예인이 아내와 아이를 유학 보내고 기러기 생활을 하며 10년 넘게 수십억을 보냈는데 이혼을 당했다. 아내가 아니라 아이가 한 인터뷰가 가슴이 아프다. 아빠는 자라면서 필요할 때 옆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분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혼자 살면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래서 한 달 생활비로 어지간한 회사원 연봉만큼을 10년 넘게 보냈는데 돌아온 결과는 아빠는 필요할 때 없었다는 반응이다. 그는 이번 생은 망했다고 했다. 몸이 바스라지게 일하고 엄청난 돈을 보냈는데 결과는 이혼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추방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고 슬프다.
연료는 가볍고 화력이 좋아야 좋은 연료다. 무거우면 항해에 방해가 된다. 아이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고 버리고 마른다. 몸을 태워 아이를 띄워 보낸다.. 나중에 아이가 아바가 되어 아빠의 삶을 이해하면 이미 세상에 없다. 남자는 그렇게 어른이 되고 아빠가 되고 아이는 또 어른이 되고 아빠가 된다. 사는 것은 돈을 쓰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삶은 시간과 돈으로 구성된다. 아빠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도 많이 벌어야 하지만 현실은 어렵다. 돈 걱정 없는 금수저가 아니면 돈 걱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자기 용돈은 대부분 아이가 쓰는 돈보다 적다. 점심값, 차비나 기름 값을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나마 있는 돈도 아이들 간식이나 용돈으로 보탠다. 아빠는 이래저래 가난하다. 가끔 탈출을 꿈 꾼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면 산에 사는 삶에 만족해한다. 그 삶이 부럽다.
첫 시험에 만점을 맞았다. 너무 기특해서 통닭을 시켰다. 그날 학교 주변 통닭집이 모두 배달이 밀려 난리가 났다. 알고 보니 첫 시험이라 아이들 기를 살리라고 쉽게 내서 반에서 셋 중 둘이 만점이었다.
아빠 미소가 어울리는 나이
방송에서 어린 연예인이 아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영상으로 잡으면 자막에 빠짐없이 나오는 말이 “아빠 미소다. 아빠 미소 특징은 여유다. 경쟁에서 벗어난 여유다. 그가 이겼든 내가 이겼든 마주보고 경쟁할 시대가 아니란 의미다. 이미 지난 시절에 대한 상념이고 힘들어하는 후배가 내가 겪은 고민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며 젊을 때를 떠올리는 추억이다. 한때 아름다웠던 추억과 겹쳐야만 나오는 미소다. 아빠미소는 연륜과 여유에서 나온다. 마음이 급하고 쫓기면 미소가 없다. 웃지 못하면 미소도 없다. 미소는 박장대소가 아니다. 옆 사람도 모를 정도로 조용한 웃음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쳐다보는 흐뭇한 표정이다. 소리가 나면 안 된다. 박수 치면 안 된다. 큰 몸짓은 금물이다. 팔짱을 끼고 그저 조용히 눈과 입만 웃는다. 뒤에서 보거나 얼핏 보면 알 수가 없다. 우심히 보거나 클로즈업을 해야 미소를 짓는 것을 안다. 대부분의 웃음은 공감을 요구한다. 하지만 아빠미소는 혼자만의 공감이다. 누구에게 동조를 구하지 않는다. 아빠미소는 남자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인 공감 행위다. 아빠미소는 남자, 그것도 세상을 살아본 중년 남자의 특권이다. 경험 없는 사람은 아빠미소를 지을 수 없다. 상대를 전적으로 응원하고 격려하는 미소다.
아빠가 가족에게 칭찬을 바라는 건 쑥스럽다. 아이들처럼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수도 없고 머리를 쓰다듬게 할 수도 없다. 그래도 분명한 건 아빠도 칭찬을 바란다. 직접적인 칭찬보다는 감사와 인정의 말을 바란다. 내 아버지는 평생을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했고 강직한 분이었다. 땅만 사면 돈을 벌던 시절에도 무슨 투기냐고 해서 아버지는 같은 직종에 근무한 사람들에게 평이 참 좋았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재산은 못 물려받았지만 바른 생활 자세와 좋은 평을 남기셔서 자랑스럽습니다.“ 했다. 아버지는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맙다.“ 한마디만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받을 수 있는 효도 중에 가장 큰 것이 ”당신이 지나온 삶을 존경합니다.“가 아닐까.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라는 노래가 있다. 마치 농사를 권하는 권농가로 들린다. 열심히 돈 벌고 가족을 부양하라는 소리다. 아빠가 원하는 말은 힘내서 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이 아니다. ”고마워요.“ 라는 말을 더 듣고 싶다. 노력을 인정하고 아빠의 어려움을 알아주는 가족을 바란다. 큰 선물이나 밑치레가 아닌 마음으로 고마움을 받고 싶다. 가정에서 가장 큰 존재인 아빠도 거대한 사회에서는 있으나마나한 부품이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아빠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칭찬하길 원한다.
나이든 아빠는 써먹을 데가 없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를 보면서 가족과 교감한다. 몸을 움직이는 한 집안일을 한다. 남자는 사냥을 못하면 할 일이 없다. 집안일은 여자가 차지한다. 육체는 늙는다.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팽당한다. 사냥을 못하는 남자의 노년은 쓸쓸하다. 밥은 주고 잠자리는 제공한다. 가끔 조언도 구한다. 그래도 뒷방 늙은이다. 한국에서 아이의 성공은 부모의 성공, 가정의 성공, 가문의 성공과 동일시된다. 삶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르고 아빠 역할도 변화가 왔다. 더 이상 일만 하는 아빠는 인정받지 못한다.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가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와도 교류해야 한다. 맹모삼천지교와 맞먹는 헬리콤터 대디가 늘어난다. 외부의 일은 그대로 해야 한다. 가장의 직함에서 혜택은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다. 이래저래 아빠는 힘들다. 남자가 살기 팍팍한 세상이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인생의 황금기다. 삶의 정점이다. 아름다운 나이에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시기다. 얼마 전 <도깨비. 드라마가 있었다. 칼을 빼면 죽는데 가끔 운명이 무거우면 칼을 빼고 삶을 마치려 한다. 도깨비는 말한다. “보통 사람은 기적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기적의 순간에 멈춰서서 한 번 더 도와 달라고 한다. 마치 기적을 맡겨 놓은 것처럼.” 그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 응원한다. 목숨을 끊으려는 그에게 유년기에 그의 도움을 받고 평생을 그를 지키는 역을 자처하는 집사는 말한다. “나라로 인해 옳게 산 그 누군가에게 이상하고 아름다운 행운 한번쯤, 기적 한번쯤 일어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살다보면 인생에 도깨비를 만났고 키다리 아저씨를 만났다. 모르고 있지만 부모다. 생명이라는 기적을 선사하고 성장을 책임지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준 존재. 기적처럼 지구에 왔고 성장했다. 지금 아이에게 나는 기적을 선사하는 존재다. 내 삶의 한 순간만 가능한 지금 나는 도깨비고 키다리 아저씨다. 귀찮고 힘들어도 시간은 간다. 아이는 큰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저만의 시간 공간을 찾는다. 아빠가 어색한지 아버지라고 부른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장이 넘어가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언제부터 내 삶에 들어왔을까? “물 줘.” “배고파”하면서 주인 노릇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