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의 시작 / 백현
큰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내려와서 일 년을 쉬었다. 암만해도 전공이 적성이 아닌 것 같다는 둥, 머리도 좋지 않은데 체력까지 달린다는 둥 거듭 휴학을 하며 오래 다닌 대학이었다. 끝을 맺도록 지켜보고 응원하는 우리도 힘들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이대로 보내면 골골댈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재충전하고 가자고 제안했었다.
여유가 생기자, 그동안 미뤄두었던 병원 순례를 했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가려운 증상이 나타났다는 피부과, 평소 높은 안압을 관리하는 안과, 그리고 치과. 급한 불을 끄고 나서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신경정신과에 다녔다. 몇 년 동안 앓아온 불면증을 치료하려는 것이다. 그간에는 신경정신과에 들러서 바쁜 사정을 말하고, 약 처방전만 받았단다.
옆 동네의 친절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불면증이 불안에서 시작된 강박 증상에서 온 것이라고 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긴장과 스트레스로 아이의 뇌가 제구실 못 하고 있었다고, 본인은 공부했으나 뇌는 아무것도 안 했을 거라는 기가 막히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어쩐지 그 모양이더라니. 한 달에 한두 번씩 다니며 나아졌으나 수면에 관련된 약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사분의 일로 줄여서 미미한 양을 먹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시간이 술술 흘러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고, 원서를 접수했다. 신체검사하고, 면접에 다녀오고, 계약에 필요한 서류를 챙기면서 걱정도 되지만 좋다고 했다. “나도 이제 일을 하고 싶어.” 친구들은 이미 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어엿한 어른이 되었는데, 자기는 계속 식충이인 것 같아서 미안했다고 한다.
힘든 직장인의 생활을 각오하고 올라간 아이는 출근도 못 해보고 집에만 있다고 한다. 모교 대학병원의 인턴의에 지원하여 합격하고, 서류를 제출할 때까지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예정되었던 오리엔테이션은 실시되지 못했고, 인턴 임용도 연기되었다. 의사면허증만 있을 뿐 레지던트나 전문의의 지시 없이는 뭘 할 수도 없는 초보들을 이런 상황에서 굳이 임용하지 않은 탓일게다. 그런 데도 3월 1일부터 병원에서 내린 대기 명령으로 꼼짝 못 하고 있다. 며칠이면 어떻게 결딴이 날 거라고 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너무 늦어져 수료 기간을 채울 수 없으니, 내년으로 미뤄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큰애는 공부를 곧잘 했다. 책을 워낙 좋아해서 늘 끼고 살면서 모든 지식을 책에서 얻었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장과 피아노 학원을 보냈을 뿐인데도 시영재 시험에 합격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화단에서 무당벌레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집중력과 끈기도 있는 편이어서 과학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난할 것으로 생각했던 광주과학고 진학에 실패했다. 사교육에 무지한 부모 탓이라고들 했는데, 결국 의대에 지원한 계기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라고 보낸 의대가 아니었다. 전문직이니 안정적일 것이라는 기대는 했다. 그러니 의대 학생 수가 늘어서 아이 밥그릇을 빼앗길까 걱정하지는 않는다. 긍정적이고 담대했던 아이가 불안과 강박으로 자신을 쉼 없이 채찍질하며 공부에 매진했던 시간을 미래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 기간으로만 취급한다면 좀 억울할 것 같다.
가능성이 희박해보이지만, 정부와 의료계는 빨리 대화를 시작하면 좋겠다. 의대생 증원이 필요하다면 수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설이나 교수진 등 충분한 환경을 만들기 바란다. 사전 준비 없이 무턱대고 학생 수만 늘리면 어떤 결과가 올지 학교에 있는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불어 필수 의료 인력과 지역 의료와 관련된 공공의료도 확충되길 바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믿고 맡길 의사가 잘 길러지고, 안정적인 시스템에서 의사도 국민도 다 보호받았으면 좋겠다.
첫댓글 많이 안타깝네요. 힘들게 공부했는데 꿈을 펼치기도 전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응원합니다.
강대강으로 해결될 기미가 없어 걱정입니다. 당사자나 가족들은 얼마나 속이 타겠어요? 의대생 수를 늘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밀어부치기 식은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에고. 얼마나 힘들까요.
응원합니다.
의대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을까요? 안정을 되찾았으니 실력있는 의사가 될 겁니다.
똑똑한 아들이 제자리를 찾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마음 고생 심했을 백현 선생님께도, 토닥토닥!
의사가 되기까지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아드님이 잘 이겨냈으니 훌륭한 의사선생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더큰 어려움을 겪었네요.
이 상황이 빨리 해결되어서 따님 같은 분들이 어서 제자리로 돌아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