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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원저 ; 12연기 강론 -모곡 사야도 / 강의 ; BBS불교방송 -상좌 불교 한국 명상원 원장 묘원 |
세간의 괴로움은 욕망 때문에 출구가 없지만
출세간의 괴로움은 알아차림이란 출구가 있습니다.
출구가 없는 삶은 세세생생 윤회를 해야 하지만
출구가 있는 삶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즐거움을 얻고자 해서 오는 것이므로
반드시 즐거울 때 알아차려야지 괴롭지 않습니다.
오랜 관습과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사지만,
정작 이런 괴로움을 주는 원인을 제거하려하지 않습니다.
발전을 위해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구도 구각이 깨지는 아픔이 없이는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 살아온 과거를 집착하는 것은 바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무지의 어둠에서 나와 밝음으로 가야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은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알아차려서
지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출구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식(識)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연기의 시작은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행이 일어납니다.
다시 행을 원인으로 해서 식이 일어납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무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무명을 원인으로 일어난 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행을 원인으로 일어난 재생연결식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다시 이런 재생연결식은 원인으로
명색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때의 식은 재생연결식이고
이때의 명색은 정신과 물질입니다.
새로운 태어남이란 재생연결식이 생기면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반드시 몸과 마음이 생깁니다.
물론 무색계에 태어나는 천인은 마음만 있지 몸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른한 개의 세계 중에 무색계가 아닌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세계에서는
반드시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고 태어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몸과 마음이 생기는데,
이때의 생명들은 거의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몸과 마음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매우 희박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역시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도 지극히 희박합니다.
여기서 더 희박한 것은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현재에도 행복하고, 지금 이후에도 행복하고,
다시 태어날 미래에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가장 큰 지고의 행복인 열반을 얻어서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되어 윤회를 끝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자신이 직접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체험으로 이것을 알 수 있을까요?
수행자 여러분!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만나서 수행을 계속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도과를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지금 열심히 수행을 해서
이번 생에 이루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또 그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최고의 행복인 궁극적 열반을 이루어야합니다.
지금 괴롭다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열반을 향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떠나야합니다.
지금 이 순간 떠나야만 언젠가는 다다를 것이고,
지금 이 순간 떠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세월이 가도
우리들에게 지고(至高)의 행복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떠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약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업으로 휩쓸려서 떠밀리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무명과 갈애를 근본 원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이 워낙 커서 선한 행위를 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부족한 이런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
도반과 그리고 훌륭한 가르침을 펴는 스승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식으로 인하여 명색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식은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정신과 물질 안에 나, 나의 것, 또는 그, 그녀라고 할 만한
어떤 개아로서의 요소가 있는 것인지 또한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있어서 나의 몸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몸과 마음이 나를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초에 무명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한 순간의 마음이었고,
무명을 원인으로 일으킨 행도 과거에 일어났다 사라진 마음의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행에 의해서 일어난 재생연결식도
이미 일어났다 사라진 업의 과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일어난 정신과 물질도
단지 업의 과보이지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시작부터 자아가 없고 원인과 결과라는 과보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 정신과 물질이 있는 현재에도 나라고 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식(識)은 재생연결식으로서 현존의 시작입니다.
식 안에는 어떤 자아나 자신, 나, 혹은 너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식은 오로지 업의 형성인 행의 결과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나다, 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과 물질을 무실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무실체가 몸과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몸과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정신과 물질을 주의 깊고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자아, 나,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개아의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 것이라 할 것도, 나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되는 원인과 연속되는 결과,
즉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가 있을 뿐입니다.
죽을 때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 뒤에
과보의 힘으로 재생연결식이 생기므로
이때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12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이 결과로 옮겨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옮겨온 것이 아니라서 현재에도 내가 없으며,
현재에도 내가 없기 때문에 미래에도 내가 없습니다.
단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만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 너라고 자아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실체가 원인과 결과라는 사실에 대해서 다소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실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유로는 이러한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실천하는 수행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의 그 의미를 분명히 파악해야
비로소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영원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면
영원히 윤회가 끝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의 출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처가 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부처가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는 재생연결식을 일으키지 않는
열반을 성취해서 윤회를 끝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서 우리가 이런 가르침에 믿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또 한 가지 12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정신과 물질이 자체의 조건으로 일어나고 사라지지,
어떤 초월적인 존재나 부처님의 가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기에 어떤 외부적 힘이 개입될 여지가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 제도를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각자가 수행을 해서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재생연결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례 중에서
짝쿠빨라 테라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짝쿠빨라 장로의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구경 게송 1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앞을 못 보는 짝쿠빨라 테라가 벌레들을 밟은 일과 관련하여
게송 1번을 설법하셨습니다.
어느 때, 짝쿠빨라 테라는 석 달 동안의 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부처님을 뵙기 위해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하였습니다.
테라는 이날 밤 자신의 걷는 동안
동작 하나 하나를 마음에 집중시키면서 경행을 했습니다.
짝쿠빨라 테라는 새벽녘까지 경행을 계속했는데,
주위가 어두웠던 탓으로 그만 벌레 몇 마리를 밟아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비구들은 짝쿠빨라 테라가 머무는 곳에 왔다가
벌레들이 밟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구들은 짝쿠빨라 테라의 계행을 의심하게 되어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짝쿠빨라 테라가 벌레를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을 보았는지 여부를 물으셨습니다.
비구들이 그렇지 않다고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짝쿠빨라가 의도적으로 벌레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듯이,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또한 벌레들이 거기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니라.
그는 이미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한 성자이니라.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고의로 생명을 해치겠느냐?
또, 설사 그가 벌레를 죽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그의 계행(戒行)에는 아무런 손상됨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비구들이 다시 여쭈었습니다.
"짝쿠빨라 테라는 아라한을 성취할 만한 복력이 있는 분인데,
어째서 금생에서는 눈을 못 보는 과보를 받았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짝쿠빨라 테라의 전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짝쿠빨라 테라의 전생을 의사였습니다.
그때 그는 고의적으로 한 여인의 눈을 멀게 만든 사실이 있습니다.
그 경위는 이렇습니다.
어느 때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는 눈이 아프고 점점 어두워져 오므로
눈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 끝에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의사였던 짝쿠빨라 테라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눈을 고쳐준다면 평생에 자기와 자기 자식들까지
의사의 노예가 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이때의 짝쿠빨라의 전생은 최선을 다하여 그 여자를 치료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병이 낫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마치 눈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짝쿠빨라는 다시 그 여인에게
눈을 멀게 하는 약을 주어서 다시 눈을 멀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이 과보로 짝쿠빨라는 태어날 때마다 맹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맹인으로 태어난 그 생도 마지막 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짝쿠빨라는 자기가 지은 불선업의 과보를 다 받고
이제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이상은 부처님께서 짝쿠빨라 테라에 대한 법구경 게송이었습니다.
이때 ‘마음이 그들을 앞서가고’ 라고 말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식(識)이 색과 수상행에 앞서서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재생연결식이
정신과 물질을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마음이 어떤 몸과 마음을 만든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짝쿠빨라의 예로 선행을 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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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初期佛敎 - 12緣起와 위빠싸나 62. 識을 原因으로 精神과 物質이 일어난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