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3‧1운동 / 시 123:1-4, 눅 4:16-19
오늘은 3‧1운동 79주년 기념일이다. 해마다 3‧1절을 맞이할 때, 올해는 주일이지만 이 뜻있는 절기를 단순한 공휴일로 지내고 마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이 절기를 뜻있게 보낼 수 있는 길은 우리 교회의 참여에 있다고 생각된다. 마치 한국의 3‧1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과 같은 절기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실제로 기미년 3‧1운동에 앞장 서서 적극 동참했던 것과 같이 오늘도 3‧1절을 뜻있게 맞이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특별히 IMF로 인해 외세의 자본에 속국이 되어가는 이때 3‧1 독립정신을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와 3‧1운동’이란 제목으로 3‧1운동과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말하면서 한국교회의 3‧1운동 기념예배가 나라의 완전 독립을 소망하는 운동으로 적극 권장하고 싶다.
1.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
1)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에 일본 동경의 재일본 한국 YMCA회관에서 우리 유학생들은 조국의 광복과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쳤다. 이른바 2‧8독립선언서는 소설가인 이광수가 기초하여 11명이 서명하고 백관수가 낭독하였다. 그리고 윤창석 목사가 사회를 보고 기도로 대회를 시작하고 마치게 된 사실과 동경의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를 선포한 사실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한국교회와의 깊은 유대관계를 보여 준다. 이 2‧8독립선언은 바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과 운동은 우리 민족운동의 정신적인 이념으로 계승해 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독립운동의 시발장소는 재일본 한국 독립기념관으로 길이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2) 독립선언서의 기본정신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인 육당 최남선은 3‧1운동의 근본정신이 기독교 정신에서 표현되었음을 말하였다. 나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기독교 서적을 많이 읽었고, 또 기독교인들을 수시로 상종하는 동안에 자연히 기독교적인 사상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본래 자유사상이 농후한 사람인데다가 독립,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말이 다 기됵교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나에게서 기독교를 빼고서는 나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3‧1독립선언문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표현된 자유, 평등, 평화 및 독립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3‧1운동의 거사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이갑성씨의 말에 의하면 3‧1운동의 거사일이 3월 1일로 정하여진 것도 기독교측의 의견에 따른 결과라고 하였다. 고종 황제의 장례식날인 3월 3일은 사람이 많이 모여 행사하기에 좋지만 이날 거사하는 것은 고종 황제께 불경이라하여 그날을 피하되 이날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한 것을 이용하기위하여 3월 3일에 가까워야 했다. 그러나 3월 2일은 주일이므로 기독교 측에서 반대하여 결국 3월 1일 토요일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3월 1일에 거사된 3‧1운동은 서울에서부터 시작하여 평양, 안주,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 함흥, 해주, 개성, 수원, 전주, 군산, 광주, 대구, 부산 등 순식간에 전국 사방으로 파급되었다. 이 지방들은 본래 기독교의 세력이 왕성했던 곳이며, 민족대표 중 기독교 대표들이 주로 이 지방 출신이기에 전국의 교회는 3‧1운동이 파급되어간 통로가된 것이다. 따라서 수원지방의 제암리교회에서 30명이 불에 타 죽은 참변을 비롯하여 기독교가 3‧1운동에서 제일 많은 피해를 받게 된 것이다. 1919년 5월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피해 통계를 보면 예배당 손실 82동, 교회재산 손실 약 3만달러, 투옥된 기독교인 2,190명, 교역자 151명 등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피해보다 훨씬 많다. 이는 한국의 교히를 통하여 3‧1운동이 전국에 급속히 확산되었다는 산증거인 것이다.
2. 기독교 정신과 3‧1정신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그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며 읽으신 말씀이며, 사 61:1-2절을 읽으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운동의 중심을 말씀하신 것이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정신과 3‧1정신 세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1) 가난한 자에게 전하는 복음(18)
기독교의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진 복음이라 하였다. 3‧1운동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인에 비해 정신적인 가난이 극심하였다. 정치적인 압박, 경제적인 착취, 문화의 말살, 역사의 날조 등이 많았다. 이에 대하여 독립선언서에는 ‘우리가 생존권마저 빼앗긴 일이 무릇 얼마며, 정신적 발전에 지장을 입은 일이 무릇 얼마며, 겨레의 존엄성이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일이 무릇 얼마이던가’라고 언급하였다. 인간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할 때 가장 비참한 가난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등감과 자학적인 심리를 씻고 인간적인 위신과 존엄성 그리고 긍지를 회복시키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며, 이 정신이 3‧1운동 정신에 잘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 빈곤에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포로된 자의 해방, 눌린 자의 자유, 눈먼 자의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함(18)
가난한 자뿐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포로된 자와 눌린 자와 눈먼 자를 위한 복음임을 말하고 있다. 억압에서의 자유, 식민지에서 자주독립, 정신적인 암흑에서 새 세계의 광명을 말하며, 이 또한 독립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들이다.‘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딸 아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라고 언급한 것이다.
3)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함(19)
끝으로 기독교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와 눌린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할뿐 아니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 이는 지난 날의 낡은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가 도래됨을 말해 주며, 새 세기의 탄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는 각성하고 물러가라는 것이며 신천지가 눈 앞에 전개됨을 말하였다. ‘아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의 정신과 3‧1정신은 서로 통하여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기에 3‧1운동에 기독교가 앞장 섰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의 목사, 장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앞장 서서 참여한 것이다.
3. 한국교회외 3‧1운동의 결과
기미년 3‧1운동은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신앙과 정신을 가지고 적극 참여한 운동이었다. 이제 끝으로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다.
1) 3‧1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과 세계평화운동으로 전개됨
첫째로, 3‧1운동은 일본으로 하여금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였다. 군부출신 데라우찌 총독의 무단정치는 헌병과 째찍과 총칼로 한국민을 다스리고 억압하였으나, 3‧1운동 이후 일본은 이를 완화하고 문화정치를 시작하였다. 그 실례로 1919년 3월 1일 이후,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창간된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는 바로 3‧1운동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활로를 열고 세계평화운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둘째로, 우리 한국의 3‧1운동은 전세계적인 독립운동과 평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곧 인도의 4‧5운동으로 시작된 비폭력 독립운동과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필리핀의 6월 마닐라대학 독립운동과 이집트의 6월 카이로대학 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져간 실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 3‧1운동은 모든 민족의 독립운동과 세계평화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는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2) 3‧1운동은 한국 개신교 100년 역사상 대표적인 민족운동이 됨
아시아 선교의 역사를 보면, 인도에 400년전, 중국에 300년전, 일본에 200년 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아시아 인구 30억 중에 4천만의 개신교 기독교인 중 그 1/4이 한국에 있다. 또한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는 200년이 되고, 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100년이 된다. 천주교는 선교 초기에 많은 박해와 순교로 희생을 당해서인지 3‧1운동에 참석하지 않았다.그러나 개신교는 적극 참여하였다. 그 결과로 개신교 측의 기독교는 한국민족과 문화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질적인 거리감을 해소하게 되었다. 마치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으로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 사실과 같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200년의 천주교가 250만의 교세를 학보하고 있음에 비하여, 100년의 개신교회는 그보다 4배가 되는 1천만의 교세로 확장된 것을 본다. 이와 같이 기미년 3‧1운동은 개신교 100년 역사상 한국교회의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인 교회운동이었으며, 그 결과로 기독교가 한국에 발을 붙이고 뿌리를 내리며 풍요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3) 3‧1운동 정신의 계승과 교회의 사명
이상과 같이 기미년 3‧1운동은 한국교회가 적극 참여한 민족운동이요, 교회운동으로서 그 결과가 세계적인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과 평화운동으로 전개되고 또한 한국 민족에게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한 대표적인 민족운동이므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그 뜻을 더욱 살려나가야 하겠다. 첫째는, 한국교회가 이 3‧1절을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이 잘 지켜가도록 3‧1절 기념예배 운동을 전국교회가 잘 실시하여 이 3‧1운동 정신을 잘 계승해 나가야 하겠다. 매년 맞이하는 3‧1절을 단순한 공휴일로 지내버리지 않도록, 이 날을 기념하고 그 뜻을 새겨나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제2의 3‧1운동으로 생각하고, 이 일에 한국교회는 모두 적극 참여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이 3‧1운동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민족의 경제독립과 정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좋은 결실을 가져오게 하여 우리 민족의 장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야할 사명이 오늘 우리 한구교회에 주어진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기독교 정신은 기미년 3‧1운동 정신과 같은 것이며, 이 정신은 모든 인류와 민족의 자존과 독립 그리고 우리 극동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구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정신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 정신을 이 땅 위에서 구현해 나가야 하겠다. 여기에 바로 우리 교회의 사명과 온 세계 인류가 기대하는 희망이 있다.
이런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전국 교회에 보내진 총회장 목회서신을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1998-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