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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勝剛弱勝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일부러 일삼아 줄어들게 하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늘여지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연해지게 하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굳세지게 되며, 일부러 일삼아 사그라들게 하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세차지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빼앗으면,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빼앗기게 된다. (그 만물을 일삼는 주체와 그 주체가 일삼는 이치) 이것은 (유위가 아주) 어렴풋하고, (무위가 아주) 밝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위에 대해) 부드러운 바는 (무위에 대해) 단단한 바를 이기게 되고, (무위에 대해) 연한 바는 (무위에 대해) 굳센 바를 이기게 된다. (따라서)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나라는 (유위가) 날카로운 기물이 백성에게 내보여지게 해서는 안 된다.
歙, 歛也. 屈伸, 損益. 互爲, 其機, 天道之自然也. 其機, 甚微. 而其理, 甚明. 故曰微明.
흡歙은 줄어들게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일부러 일삼아) 굽혀진 바는 (일부러 일삼아) 펴지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덜어진 바는 (일부러 일삼아) 더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는 바는) 일부러 일삼아지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만물을 일삼는) 주체(와 그 주체가 일삼는 이치)는 천도(天道; 無爲·德·命)와 자연(自然; 道·性)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만물을 일삼는) 주체는 (유위有爲가) 아주 어렴풋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주체가 일삼는) 이치는 (무위無爲가) 아주 밝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그 만물을 일삼는 주체와 그 주체가 일삼는 이치, 이것은 이른바 유위有爲가 아주) 어렴풋하고, (무위無爲가 아주) 밝기 때문이다.” 〔홍석주는 도道·덕스러움德·자연自然·무위無爲·성性·명命을 만물을 일삼는 주체이자, 주체가 일삼는 이치로 이해하고 있다〕
老子, 言此欲, 人, 常謙, 退抑損, 而不敢自居於張與强也.
(이 장을 통해) 노자는 이것을 일컫고자 했다.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무위無爲의 아래로) 낮춘 채, (유위有爲를) 물리고, 누르며, 덜어냄으로써, 감히 (유위有爲를) 늘어나게 하거나 굳세어지게 하는 바에 스스로 자리하지 말아야 한다.”
夫柔弱之, 不能敵剛强. 人, 莫不知之. 然剛强者, 必自用其剛强. 用之不已, 則有時, 而挫且折矣.
부드럽고 연한 바는 단단하고 굳센 바에게 (일부러 일삼아) 맞서기를 잘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단단하고 굳센 바는 반드시 그 (자신의) 단단함과 굳셈을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아야 한다. (만약, 단단하고 굳센 바가 그 자신의 단단함과 굳셈) 그것을 일부러 일삼을 따름이게 되면, (반드시 이러한) 때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 꺾이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부러지게 되는.
以剛遇剛, 以强遇强, 其勢, 必與之爭. 旣與之爭, 則其, 挫折之. 孰先. 亦末, 可知也.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단단한 바가 (일부러 일삼아) 단단한 바를 만나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굳센 바가 (일부러 일삼아) 굳센 바를 만나게 되면, 그 (둘의) 형세는 반드시 그 (일부러 일삼아) 다투게 되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된다. (그 둘의 형세가) 그 (일부러 일삼아) 다투게 되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면, 그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일부러 일삼아) 꺾이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부러지게 된다. (따라서 둘 중에서) 누가 (일부러 일삼아 꺾이고, 일부러 일삼아 부러지는) 앞이 되고, (누가) 뒤가 되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以柔弱遇剛强者, 必不敢與之爭. 旣不敢與之爭, 則亦莫之念傷矣.
이른바, 부드럽고 연한 바가 (그) 단단하고 굳센 바를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연한 바는) 반드시 감히 그 (단단하고 굳센 바와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더불어 하지 않게 된다. (부드럽고 연한 바가) 감히 그 (단단하고 굳센 바와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더불어 하지 않게 되면, (부드럽고 연한 바는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되는 바를 생각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剛强者, 有時挫折. 而柔弱之, 爲柔弱, 固自如也, 此, 豈非全勝哉.
(요컨대, 일부러 일삼아 단단한 바와 일부러 일삼아 굳센 바가 일부러 일삼아 단단한 바와 일부러 일삼아 굳센 바를 만나면, 일부러 일삼아) 단단한 바와 (일부러 일삼아) 굳센 바는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꺾이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부러지게 되는 때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그러나 (부드럽고 연한 바가 단단하고 굳센 바를 만나면) 부드럽고 연한 바는 (단단하고 굳센 바와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더불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되고 연하게 되는 바를 일삼고,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되는 바를 생각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찌 오롯하게 이기는 바가 아니겠는가?
雖然吾, 所謂柔弱者, 非眞柔弱. 而不能剛也. 知, 出庶物, 而若愚, 勇, 奪三軍, 而若怯, 能, 盖天下, 而若不足.
따라서 노자가 일컬은 바인 “유약柔弱”은 (비록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굳세고 단단할지라도) 정말로 부드러워지고 연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비록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굳세고 단단할지라도, 일부러 일삼아 굳세어지고) 단단해지기를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혜가 세상 사람들을 넘어서(는 정도이)지만, (스스로) 어리석은 듯이 하고, 날쌤이 삼군三軍(이 가지는 바가 있는 날쌤의 빛)을 빼앗(는 정도이)지만, (스스로) 겁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많은) 듯이 하며, 재주가 천하를 덮(는 정도이)지만, (스스로 재주가) 부족한 듯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홍석주가 주석한 “비진유약非眞柔弱”의 “진眞”은 ‘일부러 일삼아’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보다 적절한 듯하다〕
使彼剛强者, 知吾之, 有是實, 是, 忌之先, 而禍之首也. 雖欲以柔弱自保, 豈可得哉.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부드럽고 연한 사람이지만) 저 (일부러 일삼아) 단단해지고 굳세지는 사람은 (비록 뒤늦게) 노자가 일컬은 “그 (부드러워지고 연해지는 바를) 참되어지게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알아차리게 되더라도,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일부러 일삼아) 꺼리게 되는 바가 앞서게 되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일부러 일삼아 꺾어지게 하고 부러지게 하는) 화禍를 당하게 되는 바가 말미암아지게 된다. (따라서) 비록 (뒤늦게 노자가 일컬은) “부드러워지고 연해지는 바”를 일삼고자 함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찌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되는 바를 생각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는 바를) 얻을 수 있겠는가?
魚之, 不可脫於淵. 國之, 不可以露利器. 亦猶是也.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비유컨대)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나라는 (일부러 일삼아 단단하고 굳센 바가) 날카로운 물건(利器; 有爲)을 (백성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물고기와 백성이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아 다치게 되는 바를 생각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되는 바를 얻을 수 없는 바) 이것과 더불어 같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吳幼淸曰, 老子, 謂反者, 道之動. 故其, 所爲大槩. 欲與人之, 所見相反, 而使人, 不可測知. 是以借此八者之相反, 以設譬. 而歸宿在下文柔勝剛弱勝强六字. 孫吳之徒, 用其權術, 陷人於死, 而人, 不能無, 論者, 以爲皆源於老子之意. 固其, 立. 言之, 不能無弊. 有以啓之. 若遂謂之意, 誰敢受老氏之與者哉. 則固其言, 而幷疑其心, 亦過矣.
(중국 원元나라의) 오징(吳澄, 1249~1333)은 (『도덕진경주道德眞經註』 제31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노자는 (제40장에서) 일컬었다. ‘(유위有爲의) 반대가 되는 바를 더불어 하는 바, 도(道; 自然)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노자는 (무위無爲가) 큰 평미레(槩; 道)를 일삼은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무위無爲로) 되돌아가는 바를 살피게 하고, (그것을) 더불어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하고자. 이른바, (노자는 무위無爲가 큰 평미레인 도道를 일삼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유위有爲를) 헤아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장욕흡지將欲歙之~필고여지必固與之’) 이 여덟 가지의 서로(가 서로에게) 되돌아가게 되는 바를 인용하고, (이 내용을) 비유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다다음 문장의 유승강약승강柔勝剛弱勝强 여섯 글자(가 뜻하는 바)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것에) 머물게 되며,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노자가 살았던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지었던) 손무(孫武, BC.544~496)와 (노자 이후, 중국의 전국戰國시대, 『오자병법吳子兵法』을 지었던) 오기(吳起, BC.440~381)의 무리(徒; 兵家)는 그 권모술수를 일삼은 채, 세상 사람들을 (일부러 일삼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일삼기를) 잘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권모술수를) 평가했던 사람들은 (이 말을) 일삼게 되었다. ‘(그 권모술수는) 모두 노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 말)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펼쳐지게 되었다. 이른바, (따라서 노자의 가르침) 그것은 폐단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이 말) 이것을 가르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었다. 이른바, ‘(누가 감히) 노자의 가르침을 쫓거나 일컫겠는가? 누가 감히 노자가 더불어 한 바(者; 意)를 받아들이겠는가?’ 따라서 그 말이 단단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그 (세상 사람들이 무위無爲로 되돌아가는 바를 살피게 하고, 그것을 더불어 하는 바를 가지게 하고자 했던, 이른바 그들이 유위有爲를 헤아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노자의) 마음을 의심하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의심은) 지나치게 되었다. (따라서 노자의 가르침은 그 권모술수로 비하되게 되었다)”
愚謂, 老子, 生春秋之季, 厭於强梁爭奪之禍天下也. 故其, 爲言, 皆忠厚謙卑恬澹而寡欲.
(나는) 어리석지만, 일컫는다. 노자는 (유위有爲가) 굳세고 단단했으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다투고 빼앗았으며, (따라서 전쟁의) 재앙이 천하에 가득 찼던 (중국의) 춘추春秋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노자가 일삼은 말은 모두 “(무위無爲를) 참되게 하라, (무위無爲를) 도탑게 하라, (무위無爲를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무위無爲의 아래로) 낮추라, (무위無爲의) 아래가 되라, (유위有爲를) 조용해지게 하고 조용해지게 하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줄이라”는 것이었다.
此章, 所論, 亦有激於强奪者而云爾. 豈眞欲以陰謀勝人哉. 夫不得其意, 而得其言, 則流而爲利名權術者, 亦其勢之, 所必至, 固不容曲爲之諱也.
이 장이 일컫는 바는 따라서 (유위有爲가) 굳센 바와 일부러 일삼아 빼앗는 바에 대해 물결이 부딪혀 흐르듯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노자가 이 장을 쓴 까닭이) 어찌 (권모술수,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남을 이기기 위해 몰래 꾀를 내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따라서 그 (노자의) 뜻을 얻지 못한 채, 그 (노자의) 말만 얻게 되면, (일부러 일삼은) 이익과 이름, (일부러 일삼아 남을 이기기 위해 몰래 꾀를 내는) 권모와 술수로 흘러가게 되고, 그것을 일삼게 되며, 그 형세가 반드시 (유위有爲가) 단단하고, (무위無爲를) 품어 안지 못하며, (유위有爲로) 휘어지고, (유위有爲를) 일삼으며, (무위無爲를) 꺼리는 바에 이르게 된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