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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이들의 복음, 예수. / 弱き者たちの福音、イエス様。 ( 2023년 12월 24일 주일예배)
본문; 누가복음 1:46-55
눅 1:46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48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49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51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52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53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54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46.そこで、マリアは言った。「わたしの魂は主をあがめ、47.わたしの霊は救い主である神を喜びたたえます。48. 身分の低い、この主のはしためにも/目を留め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今から後、いつの世の人も/わたしを幸いな者と言うでしょう、49. 力ある方が、/わたしに偉大なことをなさいましたから。その御名は尊く、50. その憐れみは代々に限りなく、/主を畏れる者に及びます。51. 主はその腕で力を振るい、/思い上がる者を打ち散らし、52. 権力ある者をその座から引き降ろし、/身分の低い者を高く上げ、53. 飢えた人を良い物で満たし、/富める者を空腹のまま追い返されます。54. その僕イスラエルを受け入れて、/憐れみをお忘れになりません、55. わたしたちの先祖におっしゃったとおり、/アブラハムとその子孫に対してとこしえに。」
오늘의 본문은 마리아의 송가, 혹은 마리아의 찬가로 불리는 구절입니다. 주로 강림절에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 갔다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관하여 다시금 확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지요.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암시하는 내용과 신분의 평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고백하는 내용으로도 유명합니다. 오늘의 메시지를 통해서 힘겹고 난처한 현실과 일상 속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은혜의 감동이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하게 된, 다시 말해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신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은 기분에 따른 감정적이기만 한 고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막 약혼을 하고 살림을 차리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는 절대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 마리아는 간음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런 상황에 오히려 찬양하며 자신에게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은혜가 충만한 사람의 태도를 마리아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아무리 은혜가 충만했다고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위대한 인물이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하다고 여길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로는 체감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사건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살다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나, 혹은 받아들이기 힘든 이웃들을 현실에서 만나게 됩니다.
“내 옆에는 왜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12가지 이상한(?) 사람들의 유형을 분석하고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정리한 심리학 책입니다. 이 책에는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사람… 뭐든지 아는 체하는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 치근덕거리는 사람…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 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 까다로운 척을 하는 사람…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 긍정을 강요하는 사람 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교훈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환경이나 사건이든 우리는 많은 경우 어렵고 황당한 경우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 나도 그런 환경과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자신의 삶에 엄청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49절에서 힘 센 분이 자신에게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큰 일을 행하신 분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사람으로 대대로 전해질 것이라고까지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연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역시 위대한 인물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가난한 시골 촌구석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다만 우리는 그 기회를 불행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운이 나쁘거나 재수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어려운 시련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심지어 환난이라고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혹은 문제아라고 말하고 다닐 뿐입니다. 곤란한 관계로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성도,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그러한 어려움과 곤란과 당혹스런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습니다. 성도의 삶은 황당하고, 어렵고, 기가 막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읽을 수 있는 비범함을 배우는 삶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 빠진 그 때입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고, 힘들고, 낙심되고, 괴로운 일들 앞에 자신이 초라하게 보이는 일상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기뻐하고 찬양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평소보다 오히려 더욱 명확하게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제 힘 센 분이 나에게 어떤 큰 일을 하실 지 기대하고 소망을 가져도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본문의 51절~53절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 세 가지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교만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C.S. 루이스의 교만에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교만이 원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리고 루이스가 변증하고 있는 교만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만과 농도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만은 보다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악덕을 말합니다. 교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쳐든 턱과 내리 깔아 보는 눈을 교만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한 행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신이 교만한지조차 알지 못하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비교의식조차도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부심(프라이드)이라는 말이 좋게 느껴지지만 실은 교만의 씨앗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갖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부심이나 자존심이 없는 것을 건강하지 않다고 여기며 자주심과 자존심을 키워주는 것이 자녀를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지요. 물론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회복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방법이나 학식으로 세우는 그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자존심을 버리고, 자부심까지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면 나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돕는 수호천사나, 내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요정, 혹은 신사에서 모시는 귀신나부랭이 정도로 밖에 믿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하지만, 자신 안에 자신에 대한 믿음의 영역이 너무도 많아서 실제로는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상식과 경험과 실력으로 내면세계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학식, 지식, 상식, 경험, 실력이 바로 나의 자부심이요, 자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교만함을 태워 없애실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는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자부심이 무너지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고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고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기 위한 고민은 건강한 고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교만한 것들을 흩으시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제왕을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얼핏 들으면 모든 신분 질서를 파괴하는 것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크게 호령하던 권력들과 제왕들의 존재는 이미 한 줌 재가 되었고, 이제 글자로 남았습니다. 권력을 사유화했던 많은 독재자들이 어떻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사라졌는지 우리는 현실의 역사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하고 비천한 지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언제 어떻게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권한을 누리길 갈망합니까? 혹은 반대로 얼마나 많은 권리를 침해 당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 권한과 권리와 권위의 뿌리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지금 당장은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지금 당장은 호령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금 당장은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지금 당장은 뭔가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고, 지금 당장은 잘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권력이 자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 20:7, 8).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들은 든든하게 자신의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힘과 권력이 없어서 불행하거나,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이 없어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은 곧 사라져 없어질 권력에 대한 집착이오, 권리에 대한 아쉬움이오, 헛된 권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모든 세속적인 능력과 위협에 대해 자유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예수의 피로 인해 자유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선언과 일맥상통하는 고백이죠. 신분의 질서를 좌지우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물질의 흐름을 조절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에서는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 8:18).
또한 잠언은 의롭지 못한 재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 13:22).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면, 재산과 물질의 근원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의 가장 첫번째 고백은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빛과 시간, 물과 공기, 땅과 그 모든 생명체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수많은 피조물 안에 우리가 재산이라고 여기는 동산과 부동산이 존재합니다. 인간인 우리가 재산을 소유하고, 재물을 소유했다고 여기지만, 그 모든 것을 실제로 영원히 소유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분의 재산은 바로 우리의 재산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는 자기 몸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재산과 생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나를 소유하신 나의 주인의 것을, 나의 것처럼 소중히 여기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소중하고, 내가 잠시 맡은 이 세속적인 모든 재산과 권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내 이웃이 소중하고, 내 원수가 사랑스러운 것은 그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의 영과 혼과 육체까지 소유하신 분이 바로 나의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마리아의 마음과 믿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게 됩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54절과 55절은 과거에 대한 증언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수라는 아기를 통해 이루실 새로운 언약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고백합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앞서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통해 이루실 일을 그저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훈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가 성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내 삶의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름 아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 1:23에서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임마누엘이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배우게 됩니다. 아니, 닮게 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성실한 것이지요. 인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성품을 친히 우리에게 부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가장 비천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를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돌로 맞아 죽을 수 있는 범죄의 의혹을 사고 있는 연약한 여인을 가족으로 삼는 겸허함입니다. 가장 연약하고 나약하고 볼품 없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연을 맺는 성품입니다.
우리가 모든 비천하고 연약하고 처량한 이들의 복음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도 이런 성품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원수를 이웃과 형제, 자매로 부를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오직 주님과의 동행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예배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는 그리스도의 라틴어이고, 마스는 모임, 예배를 뜻하는 ‘마사’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다시 말해 크리스마스는 모든 연약한 자들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며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날을 뜻하는 말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산타도, 케익도, 선물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되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하고 기다려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속적인 선물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으시는 구원의 약속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대강절을 지키며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과 도전에 복음을 믿음으로 반응하고 응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원수 같은 이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환란과 분노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과 동행할 때 채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대강절을 지키며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이 기대하는 것을 소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그 성취를 기대합시다. 올해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저와 여러분이 한없이 너그럽고 넉넉한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능력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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