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유욱준
1990년대 미국과 일본, 독일 등 선진국들은 이미 국가적 투자를 통한 기초연구시스템을 구축하여 과학기술 경쟁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당시 우리나라 R&D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예산은 1조 원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2022년 3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10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제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R&D 예산 30조 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선대의 노력과 희생으로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빠르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예산 규모와는 다르게 인재 활용에 대한 제도 개선은 선진국의 반열을 논하기에는 아직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림원 원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발전을 위해 목소리를 내자는 마음으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비롯한 정부 부처에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있는 중점 사안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년(65세) 후에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연구과제의 제도적 안착입니다. 2020년대에 이미 ‘인구 데드크로스’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시니어 과학자의 활용 문제가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중요한 숙제가 되고 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으로 대규모 노동자가 이탈하는 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수십 년간 막대한 국가 예산을 통해 성장한 고경력 과학자의 지식이 사장될 우려를 담은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드뭅니다. 과학기술계에서 65세 정년 후 연구과제의 필요성에 대하여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재 65세로 정년을 맞는 과학자 중 10~20%는 아직도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실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현재 선진국들이 나이에 따른 차별 철폐를 이유로 정년을 없애는 추세임을 볼 때, 우리도 정년 후 연구과제에 대한 예산이 안배되어 장기적인 연구 트랙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는 능력 있는 과학자를 잃지 않겠다는 목적뿐만 아니라 5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에 해당하는 수많은 현직 과학자가 더욱 열심히 연구하도록 하는 큰 효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박사후연구원에 대한 명확한 지원입니다. 우리나라의 연구 능력은 많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연구실의 주력 인력은 대학원생인 것이 현실입니다. 대학원생은 아직 배워야 할 학생이며 스스로 창의적인 연구를 하기에는 아주 미흡합니다. 세계적 명문대학의 ‘스타급’ 교수 연구실을 들여다보면 박사후 연구원들이 주력 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창의적인 연령의 연구자’들이 ‘가장 창조적이고 융합적인 주제에 도전’할 수 있다는 명분은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수한 박사후연구원들로 구성된 초일류 연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지원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박사후연구원 중 일부는 PI가 되어서 ‘독립적’이고 ‘안정적’이며 본인의 인건비와 간접비를 포함하는 규모의 연구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PI가 된 박사후연구원은 시장 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내 대학들이 교수로 유치하려는 대상이 될 것이며, 이것은 강제하지 않아도 지방 대학의 연구환경을 개선하는 순작용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수 외국인 과학인력을 적극 유치하는 것입니다. 독일, 일본 등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선진국들은 해외의 우수한 인재 유입을 위한 제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인구 데드크로스’에 들어섰습니다만, 외국인 인력정책은 단순 기능인력 중심 정책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급 인재 부족현상이 만성적인 문제가 되기 전에 우리 대학들이 외국인 인재 유치에 유연하게 대응 할 수 있도록 강력한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장학금, 가족동반 취업비자, 의무 거주 및 활동 기간을 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비자와 연계하는 방안 등이 검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림원은 아시아과학한림원연합회(AASSA) 교류를 통하여 아‧태 지역의 과학한림원과도 관련 내용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연구비 자율성을 주어 창의적 연구를 지원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추진해 왔던 ‘목표가 뚜렷이 설정된 연구’는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엄격한 관리도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세계 최초의 발견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자의 두뇌에 휴식과 자유를 주는 과제도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초연구예산의 20% 정도는 의무감 없이 자유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 과제에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생각의 여유가 있을 때 나오는 것이며, 행정업무와 정해진 기한까지 논문을 내야해서 시름하는 연구자는 결코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정년 후 연구과제와 박사후연구원 지원, 외국인 인력유치, 연구과제 배정은 모두 인재 활용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볼 때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은 결국 ‘인재’였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루아침에 산유국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제1 자원은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인재’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만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이 경제발전의 테두리 안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뛰어난 선배 과학기술인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위와 같은 내용을 사색하고 음미할 수 있는 장소는 전무합니다. 우리나라에는 13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과학박물관들이 있지만 과학역사관은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확인할 수 있는 ‘과학‧산업 역사관’ 건립을 적극 제안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명과학 등 학문 분야별 과학 역사와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화학, 원자력 등 6대 기간산업별 산업 역사에 선배 과학 위인들의 서사를 담은 인물 중심의 과학‧산업 역사관은 분명 국민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방문하고 싶은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산등성이 성벽 위에 새 돌을 올릴 수 있는 것은 검게 묵은 주춧돌이 아래를 굳건히 받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려움을 딛고 눈부신 성과를 이루신 과학기술계 선배님들을 생각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필자소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KAIST 명예교수
(전)한국생화학분자생물학회 회장
(전)KAIST 의과학대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