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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22장1~14절
제목 : 혼인 잔치 비유
예수님은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절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초대를 거절한 자들을 대신하여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들이 초청받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1. 혼인 잔치에 초대하는 임금과 거절하는 자들(1~6절)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1)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습니다(1~2절)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것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 서두의 정형(定型)입니다.
자기 아들을 위하여 - 그 임금에게 자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상속자이자 자기의 모든 것입니다.
그의 출생과 성장은 아버지인 임금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아들이 다 커서 혼인도 하고 이제는 나라를 맡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왕궁에는 행복과 권세와 명예가 가득했습니다.
왕은 이 혼인과 잔치의 성사에 정성을 다하며 친히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곧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 유대의 결혼 축제는 대개 7일이나 그 이상 밤낮으로 계속됩니다.
성년이 된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것을 축하하는 그 잔치는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축제입니다.
천국이 이런 '혼인 잔치'로 비유 된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인 남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사 54:5).
거기에 상응(相應)하여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와의 연합으로 남편이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엡 5:23-32).
그리고 혼인 잔치로서의 천국 묘사는 계 19:7-9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렇게 죄인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메시야 왕국의 사랑과 기쁨을 혼인과 결부시키는 것은 신·구약에서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 이적의 영광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한 일입니다(요 2:1-11).
2)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싫어하였습니다(3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종들을 보내어 - 대개 부자들의 잔치는 날짜를 정하고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두지만 시각은 알리지 않고 당일에 준비가 마쳐지는 대로 다시 종들이 나가서 인도하여 오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에 5:8;6:14).
더구나 왕자의 혼인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이런 절차들이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이 종들은 바로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던 신앙의 선조들과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천국 초대장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는 천국 시작의 선포였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29)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 청한 사람들을 - 지금 예수님과 논쟁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 그들은 지극히 완고한 마음으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비유 해석대로(21:32) 유대의 지도층들이 끝내 세례 요한을 믿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세리와 창녀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과 메시지(3:7-10)는 그들의 전통과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다른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오시라 하였습니다(4절)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왕의 영적인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 명(command)을 무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또 한 번 간청(懇請)하다시피 청하러 종들을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 종들'은 바로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로 시작된 신약 시대의 전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12사도와 70인 전도대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11)는 메시지를 주어서 파송하셨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 여기서 오찬(아리스톤)은 유대인들이 들던 하루 두 끼니 가운데 첫번째 끼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통 늦은 아침(midmoming)쯤에 갖는 식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며칠을 계속되는 성대(盛大)한 혼인 잔치의 풍습으로 볼 때, 이 '오찬'은 잔치가 시작되는 식사이이었을 것입니다(Meyer).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그런데 그 오찬은 친히 왕이 자기의 소유물로 정성껏 풍성하게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잔치를 위해서 양(量)과 질(質)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왕의 잔치가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분하고 실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천국도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신랑이시면서 신부를 값주고 사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으로(요 6:47-58),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수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으로(요 4:14) 말씀하셨습니다.
4)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았습니다(5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이것은 '도외시하다' 혹은 '개의치 않다'는 의미로서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 큰 무례함은 교만과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층은 요한과 예수님의 천국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은 자신들의 전통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 그들 가운데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소극적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보다 자기들의 밭과 상업을 더 가치있게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이고 문자적인 율법 준수(observance)에서 얻은 자기의와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안전과 쾌락을 위해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눅 16:14).
5)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6절)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그 남은 자들은 죽이니 - 헤롯왕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무고(無辜)한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2:1-16). 자기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위험한 세력을 근절시켰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잡아 죽였습니다(막 6:17-29). 그리고 지금은 유대 지도층들이 그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27:18)로 가득차서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과 살의(殺意)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의 민족의 안전과 사회 질서의 안녕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요 11:47-53).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자기들의 이권과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위선책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선지자 노릇해 보아라"며 침뱉고 주먹으로 쳤었습니다(26:65-68).
이와 함께 그들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죽였던(23:35) 선례가 있고,
이어서 예수님의 사도들을 투옥하고 죽일 것이었습니다(행 4:1-3;5:17,18;8:1).
2. 대체되는 손님과 준비할 예복(7~14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불사릅니다(7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절한 자들에게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왕 자신에게 대한 모욕이요,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은 종들을 보내지 않고 군대를 보냅니다.
전란(戰亂)이 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어떤 도시를 왕이 군대를 보내 파괴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가 끝나는 시점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시작됩니다.
이제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살인자들이었고,
예루살렘성도 더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성이 아니라 그 살인자들의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 장군의 로마 군대에 의해 문자 그대로 응하였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죽으실 것(20:17-19)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24:2)을 예언하시는 마지막 주간에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로마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니나, 고레스와 다른 경우들처럼(사 10:5;45:2) 간혹 하나님은 이방의 군대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2)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합니다(8~9절)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청함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처음 초청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그 초청은 이제 무효화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청이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Lenski).
이제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회개한 이방인과 죄인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권리를 갖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왕래하는 곳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대로 - 그곳의 사람들은 처음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눅 14:21에는 분명하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혐오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왕의 분노는 무자격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갑절의 호의(好意)로 나타났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은 세리와 사마리아인 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3)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10절)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바리새인에게는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선악의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그들은 자칭 의인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 악인들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적으로 세운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서는 참고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4)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하십니다(11~13절)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이들 문화권에서는 잔치에 주인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 않고 식사 시간이 되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서 손님들을 환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갈라내듯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은 이 잔치에 부적격(不適格)한 사람을 즉시 찾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고후 5:10).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고대 동방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는 것이 관례라고는 하나(왕하 10:22), 1세기의 혼인 잔치에서는 그것이 확실하지 않고, 본 비유에서도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바로 온 사람들에게 알 맞는 예복이 있을 리도 없고 자기의 것을 가지고 올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궁정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왕을 알현(audience)하려는 자에게 왕으로부터 예복이 주어지는 관습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악이 문제되지 않고, 원래의 신분과 처지를 가리고 그 잔치에 합당한 예의와 함께 왕께 대한 예(禮)를 갖추는 예복이 문제였습니다.
이 예복은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구원의 옷(사 61:10)이며,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회개와 믿음(롬 10:9,10)이라는 옳은 행실입니다(계 19:8).
이렇게 천국의 심판의 기준이 외형적인 선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이라는 것은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교가 그리는 심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행한 의의 분량만큼 구원과 상급을 얻고 이방인과 죄인들은 결코 메시야 왕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신 예복을 입은 것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바로 가룟유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하나(Tasker), 오히려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받은(16:6-12)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이들은 교회에 함께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멸시하다가(고전 15:12-19) 종말에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친구여라는 말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불평하는 일꾼(20:13)에게와
가룟유다(26:50)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애정이나 특별한 선의가 담긴 말이 아니라, 손아래 사람에게 하는 그저 무관심한 투의 말입니다.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 남들은 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었는데,
그것을 입지 않고 자기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을 자신의 지식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는 자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가라지들이고(13:24-30), 염소들이며(25:41-46),`주여 주여'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7:21-23).
사환들에게 말하되 - 1-10절에는 `종들'(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으므로,
이 비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하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마 13:41,49),
영원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입니다.
한편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어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입니다(8:12;13:42,50;24:51;25:30).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 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닙니다.
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
청함을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 -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가르)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입니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거의가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눅 14:24).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입니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님께 갈 수 없습니다(16:17;요 6:65).
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십니다(1~6절).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종들은 선지자를, 청함을 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혼인 잔치는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지는 구원과 천국을 상징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으로 부족함 없이 오찬을 준비한 왕의 모습 속에서 우리를 성대한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초대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날마다 말씀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초대에 기쁘게 응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은 초대를 거절할 뿐 아니라, 종들을 죽여 왕을 모욕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7절).
불사름을 당할 곳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고 진멸당할 자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할 경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새롭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모든 사람에게 열어놓으셨습니다(8~10절).
먼저 초대받은 자들이 거절하자 임금은 네거리 길에 종들을 보내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합니다.
하나님의 초대가 혈통적인 경계와 신분적인 장벽을 넘어 누구에게나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때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4)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에 초청받을 수 있지만,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11~14절).
초청에 응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준비와 책임도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비록 초청을 받고 왔지만 혼인 잔치에 예복(깨끗한 옷)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를 쫓아냅니다.
은혜의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의의 예복을 입어야 하는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은혜가 정말 감사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기도
공동체-하나님 나라에 초대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열바-늘어나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가족과 탈북자가족원들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도록, 이들을 돌보는 농어촌 교회들이 타문화사역의 이해를 가지고 목회전략을 세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