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니시자카 순교지 언덕을 내려온 우리 순례자들은 성모의 기사 수도원 본부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께서 세우셨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는 1930년에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오우라 천주당에 올라가 성모상 앞에서 큰 감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길고긴 박해기간 숨어서 신앙을 간직해온 신자들이 오우라 천주당의 산타 마리아상을 발견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던 그 사연을 콜베 신부님이 확인한 것입니다.
그 성모상을 오우라 천주당 문 앞에서 보게 되는 순간, 함께 온 동료 수사들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성모님께서 우리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콜베 신부님은 성당 아래의 한 가옥에 거주하면서 나가사키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분이 거주하던 집이 지금도 오우라 천주당 올라가는 길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 집에서 그래서 콜베 신부님은 선교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발행하여 선교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오우라에 도착한 우리를 성모님께서 몸소 맞이하셨으니, 우리가 하는 일이 분명 잘 될 것입니다.”라며 동료수사들을 독려하고 함께 오우라 천주당을 중심으로 나가사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그 잡지를 나누어 주고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월간 잡지를 콜베 신부님께서 발간하던 인쇄기가 성모기사 수도원 본부에 보존되어 있고, 지금도 ‘성모기사’라는 제호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선교하던 콜베 신부님은 소속 수도회(콘벤투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명에 따라 고국 폴란드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체포됩니다.
유태인을 숨겨주고 도와주었다 해서 체포된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아사형(餓死刑)을 선고 받고 끝내 독극물 주사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하는 순교를 하셨습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시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옥 같은 그 수용소는 아주 잔학한 방법으로 수감자들을 억압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수용소 담에는 3천 볼트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촘촘하게 둘러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감자 중에 도망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다른 수감자 1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는 콜베 신부님과 한 막사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이 탈주하다가 수용소 울타리의 3천 볼트 철조망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용소의 나치군이 콜베 신부님 막사의 수감자들을 불러내어 집합시켰습니다. 그리고 줄 세워 서있는 그 사람들 중에 열 명을 무작위로 불러내어 굶어 죽이는 막사로 보내려 할 때, 그 불려나온 사람들 중에 한 남자가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살아 돌아가야 하는데요.”하면서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뒷줄에 서있던 콜베 신부님이 불쑥 나치군인 앞에 나서면서 말했습니다. “저 사람 대신 내가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콜베 신부님은 그 사람 대신 굶겨 죽이는 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열 명이 함께 갇혀서 일주일 그리고 열흘을 넘기면서 물도 먹을 것도 없이 신음하다가 죽어갑니다.
하나둘씩 아홉 명이 차례로 죽어 가는데, 콜베 신부님의 목숨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치군은 독극물 주사기를 가져다가 팔뚝 혈관에 꽂아서 그분을 절명시킵니다. 그렇게 콜베 신부님은 다른 사람 대신 그 지옥 같은 아사실(餓死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그렇듯 무수히 사람들을 죽인 나치 독일이 패전한 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폐쇄되고, 거기서 콜베 신부님 때문에 죽지 않게 된 그 사람은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후에 돈을 벌고 삶의 여유를 누리게 된 그 사람이 방송에 출연하여 콜베 신부님의 덕으로 살아남게 된 사연을 알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문학가 미우라 아야코가 찾아갔습니다. 소설 ‘빙점’의 작가로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여류작가입니다.
콜베 신부님의 죽음으로 대신 살아난 그 사람이 가족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찾아가 확인하여 글을 써서 발표하고 싶었던 미우라 아야코였습니다.
작가가 그 가정을 방문했을 때, 그 장본인 가장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작가가 그의 부인에게 자녀들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부엌으로 들어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그 부인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면서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때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콜베 신부님이 죽임을 당하기 이틀 전에 우리 집이 폭격을 당하여 그 아이들은 죽었습니다.”
그 부인의 말을 듣게 된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집니다.
작가는 3년 동안 준비한 원고를 들고 그 가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콜베 신부님의 목숨 값으로 살아남은 삶에 대하여 그 가정의 증언으로 작품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준비했던 원고를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이미 세상에 있지 않은 목숨을 위해서도 대신 죽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단 말인가!
무려 3년 동안 준비했던 원고를 내버리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귀국길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마음이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런 값을 되찾을 수 없는 희생을 하느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갚아주시는지…!
콜베 신부님의 희생은 무위(無爲)였단 말인가? 이렇듯 혼란스런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 신자들이 당한 300년 박해의 역사에 대해서, 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우라카미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어찌하여 그럴 수 있는가 하는 혼란스런 질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일까요?
우리 신앙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대답해 주실 말씀은 무엇일까요?
아마 하느님께서는 당신 홀로 대답을 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들과 함께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의 입으로 대답하라 하실 것입니다.
참 신앙인의 대답은 이 세상의 현실에서 찾아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닐 것입니다.
자료: 대전교구 윤종관.가브리엘 신부
해미 성지조성, 하부내포성지[서짓골,도앙골,삽티]조성 담당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