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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해석과 작가의 눈
- 임윤교의 《레테의 강》에 부쳐서
강 돈 묵
1. 들어가면서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일찍이 ‘낯설게 하기’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모든 예술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보고 이론을 정립 전개해 왔다. 그들의 대표주자 시클롭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예술의 기법을 인간사고의 경제원칙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고 사고와 지각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들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며, 그 형식을 애매하게 하는 기법이고,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키는 기법이라고 정리하였다.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형상화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습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어제 오늘의 삶이 한 결같이 고달프고 무미하다. 닭장 같은 주거 환경에서 티비 앞에 노예가 되어 가고, 층층마다 변기를 타고 앉아 아침을 맞는다. 내일은 오늘과 다른 새로운 날이 빗장을 풀고 기다리겠지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양치하고 식탁에 앉는다. 나의 삶이 너무 팍팍하여 이웃을 훔쳐보아도 그들 역시 나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일상화된 삶은 인간에게 사고하는 기회를 굳이 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삶은 단순화되고 추상화되기 마련이어서 결국 의미 없는 삶이 되고,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조차 챙겨볼 기회가 없다.
거기다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간은 비밀이 없다. 너무나 생활공간이 판박이다. 닭장은 물론, 그렇지 않은 곳마저도 똑같다. 어느 집을 가든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그 마당을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가면 마루가 있고, 부엌에 붙어 안방이 있고, 윗방이 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공간에서 무슨 비밀이 있겠는가. 언제나 비슷하고 어디에서나 그게 그거인 현실은 자연스럽게 나태에 익숙하게 되고, 단순화하고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나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낯설게 하는 삶의 태도이다. 늘 보아온 사물이나 사건들을 오늘 처음 접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 ‘낯설게 하기’는 시작된다. 그래야만 사물의 본질을 읽어내는 심안을 가질 수 있다. 이를 다시 세분하여 살펴보면 ‘낯설게 보기(해석)’과 ‘낯설게 하기(형상화)’로 가름하는데, 해석이 없는 형상화는 있을 수 없기에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로 아울렀던 것이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작가의 체험과 밀착되어 있어 자칫 잘못하면 현상의 기록에 멈추는 우매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끌어안고 있다. 작가가 소유한 삶 속에서 글감으로 취택한 것은 나름 의미 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 작가의 삶으로 걸러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글감은 작가의 가치관에 의해 재해석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를 ‘낯설게 보기(해석)’라 한다. 가치 개념의 수필은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판가름 난다. 물론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적합한 형식이 따라야 하겠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해석이다. 모든 문학은 참신한 글감, 참신한 해석, 참신한 형상화가 이루어지면 성공한다.
작가 임윤교의 수필은 철저하게 이런 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것들의 집합이다. 그의 수필의 영역에는 언제나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흔적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의 삶에서 주운 글감들은 모두 그대로 멈춰 있기를 거부하고 커다란 의미로 다시 재탄생한다. 풀, 꽃, 바람, 별, 반딧불이, 사금파리…. 일상인들의 눈에는 그냥 스치는 작은 것들에 불과하지만, 그의 눈 프리즘을 통과하면 다시 커다란 생명을 부여 받는다. 이러한 것들은 작가 임윤교만이 가지고 있는 심안으로 ‘낯설게 보기’의 과정을 거쳤기에 가능하다. 작가의 심안에 잡힌 것들이 새로운 얼굴을 하고 독자 앞에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복일지도 모른다. 해석의 귀재를 만나기가 그리 쉽겠는가.
2. 레테의 강을 건너는 임윤교의 수필문법
작가 임윤교의 수필세계를 만나기 위해 우선 그가 건너온 <레테의 강>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수필문학에 입문하였으나 한동안 방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전혀 붓을 잡지 못했을 뿐더러 기왕에 가지고 있던 수필까지도 떠나보낼 정도로, 그 늪은 깊었다. 그러나 그 공백기는 더 춥고 서러워 애써 글을 외면하려 해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참아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의 가슴은 집필의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그 강을 건너와 집필에 전념할 수 있음에 스스로 놀라고 감사한다. 그에게 수필은 자신을 치유하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 여긴 까닭이다. 그러기에 다시 수필의 품에 안겨 첫 수필집을 내며 주저함이 없이 《레테의 강》을 문패로 골라잡은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작가 임윤교의 수필이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한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레테의 강>은 작가가 지금까지 걸어온 수필의 길을 고백하고 있다. 진정 수필이 고백의 문학임에 밀착하는 몸부림이다.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작가를 불러일으켜 집필에 다시 들게 했다. 그만큼 임윤교에 있어서 문학은 절실한 욕구에서 피어난다. 기왕의 습작노트를 강물에 띄워 보낸 그가 가슴 답답하여 백지만 펼쳐 놓고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했던 병은 다시 집필에 듦으로써 치유 받은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미완의 글들이 다시금 글 이랑을 갈아엎으며 용을 쓰는’ 과정을 거쳐 그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잡초 뽑기’, ‘잔돌 고르기’, ‘팔다리의 통증 참아내기’, ‘자연에 한눈팔기’ 등은 그가 글밭을 일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물을 인지하려는 습작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다. 탐탐치 않은 글에서 풍기는 묵은 곰팡내를 없애기 위해 볕 좋은 날에 툴툴 털어 너는 그의 모습은 퇴고의 터널을 지나는 고달픔이다.
살면서 소중한 것을 떠나보낼 경우가 많다. 이별 뒤에 오는 허전함과 아픔에 힘들어하면서 애써 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절실하게 붙잡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레테의 강은 내게 있어 그런 의미이다. 망각 그 이후로도 되살아나는 기억의 진실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글을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번복을 거듭해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빛은 달라졌지만 부디 사려 깊은 눈매 하나쯤은 지니고 싶다.
강물은 지금도 유유히 흐른다. 그 강물이 어제의 물이 아니듯 오늘의 나도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공백의 시간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었지만 심도 있게는 했을 것이다.
예전의 그 종이배는 이미 대해에 도달했을 것이다. 강물과 함께 낮은 곳으로만 흐르다 부딪치며 험난한 여정을 거쳤을 것이다. 우매함으로 인하여 세상을 절름거리며 살아온 나. 다시는 레테의 강물 앞에 서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온갖 혼탁함을 다 받아들인 강물이 자정작용을 거쳐 맑은 물이 되어 우리에게 길을 가르치고 있다. -<레테의 강>에서
그가 건넌 레테의 강은 다시는 바라보기조차 싫은 강이다. 그동안의 수필을 모두 종이배로 접어 띄워 보내고 절필의 길로 들어섰던 아픔. 지금은 그 종이배가 대해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측하면서도 지난 삶이 절름거리는 장애였음을 그는 잘 안다.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혼탁한 강물이 자정작용을 거쳐 맑은 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윤교의 지난 삶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그의 수필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수필산방>에 들러본다. 독자를 맞이하기 위해 그의 산방 차림표에는 ‘살랑거리는 바람’, ‘평온한 초록’, “물들어가는 나뭇잎‘, ‘작은 꽃’, ‘솔바람소리’, ‘별빛’, ‘반딧불이’, ‘깨진 사금파리’와 같은 어휘들이 동원되어 있다. 산방 지킴이는 이외에도 주인이 심혈을 기울려 만든 ‘아름다운 슬픔’, ‘내면의 자아’, ‘절대 고독’, ‘성찰의 시간’, ‘생명체의 진화’, ‘쇠락의 의미’와 같은 것이 있다고 귀띔한다. 주인의 취향이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그것에 자신의 삶을 밀어 넣어 해석해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하고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임윤교의 수필은 글감에 대한 깊은 사려와 상상적 체험을 통해 본질을 만나고 있다 하겠다. 어느 수필 하나 ‘낯설게 보기’를 등한시한 것이 없다.
수필이 작가의 고백문학이라 하여 작가의 체험을 그대로 줄글로 기록한, 현상의 기록이 아니라 반드시 본질을 찾아 형상화하는 문학이라는 데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이것이 임윤교가 가지고 있는 수필문학의 문법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의 이행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본질 찾기는 밤송이 속에서 알밤을 발라내는 어려움과 흡사하다. 발끝으로 이리저리 굴려가며 껍질을 벗겨야 한다. 서슬이 퍼런 가시는 언제나 날카롭다. 작가는 그 모습이 화풀이하는 자신의 앵돌아앉은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우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 만난다. 결국 문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전제를 충실히 지키고 있음을 본다. 철저히 ‘낯설게 보기(해석)’에 의한 수필 쓰기의 풀무질이다.
정물情物처럼 고요히 정경들을 관조하고 때로는 세찬 솔바람소리를 들으며 마음에 녹아드는 글을 쓰고 싶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이며 사물을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인가 고민하면서 기다려 볼 테다. 보리대궁이로 촘촘히 여치 집 엮듯 가슴에 움트는 문자들의 발아를 순순히 형상화시켜 보고 싶은 것이다. 바위 틈새와 외진 숲정이에서 도토리를 줍듯 글감을 구하고 겨울을 채비하는 다람쥐마냥 쟁여두고 틈틈이 기억을 소환해 본다면 좋을 듯싶다.
지열로 아지랑이 아른거리면 어지럼증 같은 꽃 멀미를 하게 될 것 같다. 아름다워서 슬픈, 슬퍼서 더 간절한 인생사를 껴안으며 도처에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진화를 지켜보고 싶다. 살아있음을 겸손해하며 설렘으로 다가오는 일상들을 감사로 맞을 것이다. -<수필산방>에서
글감이 함유하고 있는 본질을 찾는데 조급하지 않다. 비록 과작이라 해도 충분히 마음에 녹아드는 글을 쓰고 싶다고 설파한다. 절대 조급하지 않고 제대로 잘 익기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자세는 진지함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본다. 작가만의 시각으로 다른 이가 감히 찾아내지 못하는 글감을 찾아나서는 태도는 타의 귀감이다. 아름다워서 슬픈, 슬퍼서 더 간절한 인생사를 껴안는 사랑은 좋은 글을 얻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3. 어둠을 헤쳐 나간 끝없는 눈물방울의 영롱한 빛
작가 임윤교의 수필에는 잔잔히 흐르고 있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 작가가 가치를 주고 있는 삶은 역시 역경을 이겨낸 삶이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채워지지 않은 현실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비워져 있는 공간의 아쉬움이 오히려 채워짐을 더 값지게 한다. 조금은 시장기와 같은 것, 그것은 그리움과 연을 대고 있다. 기다림에서 얻어지는 가치는 보배로운 것이다. 그 시간이 아픔의 연속이라면 더 가치가 있다. 이런 사고를 가졌기에 작가의 눈에는 ‘진주’가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입수관으로 들어온 정체불명의 유기물과 맞닥뜨린 조개는 시련과 조우한다. 유기물을 에워싸기 위해 여러 차례 단백질을 분비하면 그것이 진주로 바뀐다. 불순하게 찾아든 유기물이 진주의 핵이 되는 셈이다.
이 같이 끝없는 생명보전의 격렬한 몸부림이 작가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진주는 눈물방울이고, 면벽 수도승과 닮았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작가는 쓸쓸해 보이는 여인이나 절망에 우는 여인이 이 진주를 소유하길 소망한다. 또 원숙한 여인이 가까이 해도 어울릴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인품의 깊이와 진주의 격조가 상통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여인과 의절하고 살기를 원하는 것은 탐심과 욕망과는 거리가 멀음을 강조한 말이다. 땀의 계단을 밟아본 사람, 쓸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사람, 질곡의 터널을 빠져 나온 사람들만이 가까이 할 수 있다고 보는 것, 역시 역경을 이겨내고, 고통을 참아낸 결정체가 바로 진주이기 때문이다. 작가 임윤교는 인내하는 삶이 나름 가치 있는 삶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작가는 ‘내 눈물 한 방울 보탠 그의 이름은 진주(眞珠)다.’고 단정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과정이라는 통과의례를 높이 사고 싶다. 결과만을 놓고 판단하는 이 시대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땀의 계단을 밟아본 자가 삶의 진면목을 지닌 자다. 한낱 풀잎처럼 미미하나 쓸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그들이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주역인 셈이다.
미완에서 완성으로 가는 길은 왜 고통을 수반하는지, 세상에서 빛나는 것들은 왜 질곡의 터널을 빠져 나와야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굴절된 삶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변명의 여지인 과정이 없진 않다. 슬픔 속에 가라앉았다가도 이따금 냉소를 짓는다. 기어이 해내고 살아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쓸쓸한 허탈감이 교차되는 까닭이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찬란한 슬픔이라 명명해 본다.
-<눈물방울>에서
인내하는 삶에 대한 애정은 여기저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 중에서도 숲길을 선택해서 걷는 과정에 빗댄 글이 있다. 숲길은 넓고 훤한 길과 좁고 어두운 길이 있다. 작가의 의도가 저절로 드러난다. 넓고 훤한 길은 순탄한 삶이고, 좁고 어두운 길은 역경의 삶이 뻔하다. 작가가 조급하여 독자들을 인도하는 문장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이 흠이지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숲의 어둠은 삶의 색채와 다르지 않다.’,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나온 인생길을 돌아본다.’) 전편에 걸쳐 의도함은 역경을 이겨내는 삶이다. 작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인내의 삶’이기 때문이다.
두 길 중에 좁고 어두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작가 임윤교에 있어서는 당연하다. 그의 정체성이기도 하니까. 그 어둡고 좁은 길에는 온갖 고통이 따른다. 공포가 엄습하고 숲의 위세에 짓눌린다.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고 오로지 자연 앞에 작아지는 인간.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들면 들수록 어둡다. 두려움이 밀려온다. 바로 사람살이다.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뒤돌아가자니 너무 멀리 왔다. 이상과 현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이 대립하며 부딪친다.
하지만 이 <숲>에서 작가는 하잘것없는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고 숲을 키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가치는 대단한 것에서 비롯하지 않고 아주 하찮은 것에서 출발함도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 사치스러웠음에 부끄럽다. 다시 숲을 헤쳐 나간다. 숲 어딘가에는 이 시름을 잠재울 향기의 근원이 있으리라 확신하면서 한 발 한 발 띄워 놓는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지면서 향긋한 냄새가 실려 온다. 눈앞에 예쁜 산새가 포로롱 지나갔다. 내 눈은 새를 놓칠세라 바로 뒤쫓아 간다. 높은 나무 위로 날아오른다. 그때 눈부신 광채가 시야에 어른거린다. 눈이 부셔 감았다 다시 뜨고 본다. 큰 나무에 희디흰 꽃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듯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경이롭다. 순간 뿌듯한 희열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숲>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도달한 곳엔 밝음이 있고, 향기가 있다. 넓고 푸른 초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젠 안도하고 꽃그늘 아래서 그동안의 시름을 풀어 본다. 햇살은 뜨겁게 초원을 비추고 세상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낯선 숲속을 헤매다가 나온 것처럼 역경을 이겨낸 삶은 무한의 가치가 있다.
작가 임윤교를 가로지르고 있는 삶의 태도는 역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거기에 온 힘을 모아 최선을 기울인다. 그러기에 제 몸에 침입한 불순물을 에워싸기 위해 온 힘을 다 쏟는 진주가 작가에겐 가장 소중한 보석이 되는 것이다. 또 산행을 해도 순탄한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좁고 어두운 길을 택해 헤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 모두는 작가 임윤교가 어느 것에 가장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쉽게 짐작하게 한다. 역경을 이기고 인내하여 목표점에 도달하는 자는 멋지게 존재할 가치가 있다.
4. 끝없이 움켜쥔 꿈과의 자연스런 조화
작가 임윤교에 있어 으뜸 과제는 역경을 이겨내는 인내라고 지적하였다. 이 화두는 작품의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 이러한 삶의 가치 설정에는 작가가 살아온 삶의 질이 크게 좌우했으리라 믿는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순탄하고 넓고 훤한 길로 알았는데 실상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절망에 가까운 것일 때 많이 좌절도 하고 포기도 만지작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 임윤교는 이 상황을 극복해 내기 위해 인내를 뽑아든다.
그토록 어려운 역경이었는데도 인내를 잡아드는 데에 힘이 되어준 것이 있다. 첫째는 꿈이었고, 둘째는 조화였다. 이것들이 질곡의 삶에 원천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도래해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꿈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긴 세월의 습작노트를 레테의 강에 띄워 보내고도 다시 집필에 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미래에 대한 꿈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연분홍 꿈을 꾼다. 자신 안에서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분홍의 모시한복을 꿈꾸며 마련한다.
<모시옷 이야기>는 두 달간 하혈하던 작가가 특진을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데서 시작한다. 주위에서는 별일 아닐 거라며 위로하지만 정작 본인은 불안하다. 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올 것 같은 불안감에 싸이게 된다. 그 순간 작가는 분홍색 모시 한 필을 끊어다가 한복집에 맡긴다. 한복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마음과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같이 똑같다고 생각한다. 문득 왜 하필이면 분홍색 천을 골랐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이는 죽음에 앞서 최선의 나들이용이었고, 마음껏 살아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연분홍 모시 한복을 차려입고, 레이스 달린 양산을 쓰고, 튤립 모양의 장식물이 달랑거리는 외출. 이는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갈망하는 삶의 욕구였을 뿐만 아니라 살고자 하는 작가의 꿈이었다. 그래서 작가의 한복 나들이는 눈이 부신 것이다. 초록의 나뭇잎이 춤을 추는데, 나만 소실되어 사라져야 한다는 상황에서도 그는 꿈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서서히 세상과 작별 인사를 준비하면서도 생에 대한 꿈은 움켜쥘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분홍색 모시한복은 탈색이 되어 희끄무레하게 변했다. 그 색깔이 수의로서는 적격이었지만 왠지 추레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전처럼 입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흰옷이 주는 부담감이 은근히 작용했다. 염색을 잘하는 아래 동서가 물들여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안 그래도 심중에는 산뜻한 색깔을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거리고 있었다. 이참에 죽음과 관련된 기억을 아예 떨쳐 내버리고 싶었다. 허여스름한 모시치마를 접어 보자기에 싸맸다. 죽음의 공포도 꽁꽁 동여매어 같이 보냈다.
수일 후 보자기가 돌아왔다. 보라색 맥문동 꽃이 치마에 피어 넘쳐났다. 젊은 날은 분홍색을 좋아했지만 지금의 보랏빛도 괜찮아 보였다. 저고리와 같이 입고서 거울 앞에 섰다. 색채에서 원숙한 느낌이 풍겨났다. 걸음걸이와 말씨며 태도까지 달라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라색깔이 바랜다면 그때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큰일을 맞닥뜨리더라도 보랏빛깔이 주었던 안정감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에 대한 관념도 달라지고 죽음을 끌어안을 만큼 변모해 있어야 할 텐데.
하지가 지났다. 모시옷을 꺼내 손질을 해야겠다. -<모시옷 이야기>에서
여인들의 연령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색채어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십 이전의 여인은 ‘연달래’, 이십을 넘긴 여인은 ‘진달래’, 사십대 여인은 ‘란’에 얹어서 표현한 것, 역시 해학이다. 이외에도 ‘청상과부’나 ‘까막과부’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인들에게 붙여지는 색채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작가 임윤교의 색채어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임윤교에 있어서 흰색과 검정색의 무채색은 죽음, 절망으로 간주되었고, 연분홍과 초록의 유채색은 설렘과 즐거움과 꿈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를 함유한다.
이 글에서 보듯 분홍색 초록색과 같은 유채색, 그도 연한 유책색은 젊음 ․ 희망 ․ 꿈 등을 상징하고, 흰색 검정색과 같은 무채색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나이가 연분홍(연달래)에서 보라색(란)으로 오면 걸음걸이도 조신해지고 말씨와 태도까지도 가다듬는 원숙미를 갖추게 되고 안정감 있는 생을 꾸리게 된다. 이는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해오름의 강가>는 가톨릭 국악 명상곡이다. 이 곡은 가야금 바이올린 피아노가 함께 어우러진 연주곡이다. 국악기와 서양의 악기가 함께 어우러짐은 조화를 위한 배려이다. 성질을 달리하는 악기가 협연하는 것만 해도 조화의 미가 보인다. 그리고 여러 악기가 협연하는 경우에는 멤버마다 자기의 색깔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제 개성을 고집하지 않고, 곡의 완성도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슬픔에 젖어 있다가도 미소가 번지고, 서글픔에 싸여 있다가도 신명이 난다.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고 애잔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곡이다. 특히 작가가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도 조화로움 때문이다. 단조롭게 하나의 악기로 연주했다면 감흥도 적었겠지만, 동서양 악기의 어우러짐이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다. 작가에게 있어서 음악은 깊은 성찰과 기도로 영혼을 닦아주기에 아침에 듣는 이 연주곡은 특별함을 마련한다.
세상은 조화로움 속에 성장 발전한다. 해오름의 강가를 좋아하는 이유도 조화로움 때문이다. 동, 서양 악기의 어우러짐이 좋다. 단조로운 하나의 악기로 연주했다면 감흥은 작았을 것이다.…<중략>…귓전에 맴도는 음률들이 기도의 말들이 되어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참으로 곡조 있는 기도가 찬양성가인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해오름의 강가에는 청정한 아침 햇살이 물안개를 밀어내고 있다. 긴 휴식에서 깨어나 몸을 움직여 다시 하루를 연다. 어제 꿈꾸었던 미래가 오늘이기에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강기슭에 매어둔 작은 배를 타고 호젓이 시간을 노 저어 간다. -<해 오름의 강가>에서
이와 같이 사그라지지 않는 꿈이 있었기에 작가 임윤교는 존재할 수 있었고, 세상을 공평하게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는 보편적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상만사를 조화롭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었기에 수필인으로서 임윤교가 가능하고, 수필문학에 하나의 돌을 얹을 수 있는 것이다.
5. 꿈틀거리는 화석과 대물림하는 가족애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생각은 계획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달려들 듯 찾아온다. 작가 임윤교 역시 동생과 시내로 향하던 차속에서 느닷없이 부딪친다. 방향을 돌려 찾아간 고향은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도 그동안 자주 오지 못했다. 다른 길로 왔는데도 자연스레 찾아온 곳이 고향이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 방학 때 친척집에 다녀간 것이 고작인데, 접하는 물상들이 모두 낯설지 않다. 잿빛 기왓장, 교회당, 과수원 가던 길, 밥 짓는 연기, 은행나무, 공동우물, 점방 등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소떼 몰던 부스럼딱지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리며 마을 안길로 인도한다.
어스름한 시각이라선지 빈집이 괴물처럼 다가온다. 폐허가 된 옛 집터가 을씨년스럽다. 아픈 추억이 되살아난다. 방문고리의 돼지나발, 침 흘리던 동생, 연못의 물방개, 사금파리 조각, 거머리, 금계랍 묻힌 엄마의 젖꼭지, 뱀독 빼던 아저씨, 가죽나무의 고약한 냄새, 옹달샘의 꽃창포, 담쟁이넝쿨…. 상념 속에서 끄집어낸 것, 그것은 고향이란 조상들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니, 탄생과 죽음의 영원한 귀착지라는 것이다.
상념은 확대한다. 역사와 가치를 모르는 체 놀이터로 알고 있던 삼한시대의 고분군. 고향의 고분군에는 비록 영화는 사라지고 역사의 숨결만 가느다랗게 남아 있지만 그들의 얼이 화석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본다. 화석은 반드시 돌로 변한 것만이 아니고 고생물의 발자국, 몸 자국, 배설물 등과 그 흔적 모두를 지칭함을 깨닫는다. 순간 작가 임윤교는 자신의 몸 속에 화석화하여 숨 쉬고 있는 조상의 얼을 감지한다. 고조부께서 지은 ‘조문팔경’ 시문이 생생하다. ‘금성추엽金城秋葉,’ ‘토산춘화土山春花,’ ‘문천창수汶天漲水,’ ‘매파고탑挴坡孤塔,’ ‘죽리황릉荒竹里陵,’ ‘봉대조양鳳臺朝陽,’ ‘우산낙휘牛山落暉,’ ‘동강제월桐崗齊月’. 소제목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이어져 있는 조상의 생각에 기꺼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대물림이란 말이 있다. 성정과 생각과 표현이 닮았고 피가 이어져 왔으니 나는 그 어른의 살아있는 화석이 아닐는지. 사람의 특성이 한 개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조상의 발길이 닿은 주변 8경을 직접 답사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시공을 뛰어넘어 이루어지는 온갖 교감들을 화답의 의미로 적어 볼 것이다. 내 글을 후대의 뒷사람들이 무어라 말할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내 글이 그 어른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통 털어 화석이 되어 서 있을 자리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이다.
-<살아 있는 화석>에서
이 같이 이어짐에 대한 생각은 <나만의 수장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남들이 보면 고물에 가까운 생활용품들을 모아 보관하는 곳이 있다. 이렇다 할 표식도 없이 먼지만 까무룩 하게 뒤집어쓴 것이지만 굳이 ‘수장고’라 칭한다. 여기에 인생의 족적을 따라 하나, 둘 생겨난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것을 남편의 공구 창고로 옮기게 된다. 창고에는 건축 일을 하던 남편의 연장들이 즐비하다. 작가가 보기엔 내다버려도 될 법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물건이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여긴다. 서로 소중한 것이 다르다. 살아온 삶의 흔적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수평기, 먹통, 줄자. 이것은 남편의 물건이다. 이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의 삶이다. 수평기처럼 매사에 적당히 하는 것이 없다. 항상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살려 한다. 무엇이든 만들라치면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평기를 들이댄다. 수평기 안에 보이는 액상의 수은 방울이 공간의 중심에 와야 손에서 내려놓는다.
작가 역시 자신의 소장품은 애틋한 사연이 있다. 녹색접시 역시 가슴 에는 애틋함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엄마가 친정 동네로 다니며 팔았던 접시인 것이다. 자존심보다 자식들과 살아가야 할 삶이 우선이었을 엄마를 추억하는 매체인 것이다. 교통도 좋지 않아 머리에 이고 시골길을 헤맸을 엄마를 떠올리며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한다. 접시를 닦으며 엄마를 쓰다듬는 묘한 기분에 빠진다. 또 멍에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마소의 목덜미나 잔등에 얹혀 있던 고루한 물건이지만 장애의 몸으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와 너무도 닮았다. 평생 숙명처럼 멍에를 지고 사셨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이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낀다.
나무로 제법 정교하게 다듬어진 멍에가 눈에 띈다. 마소의 목덜미나 잔등에 얹혀 있던 이런 고루한 물건들을 왜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멍에는 아버지의 굽은 등을 떠올리게 한다. 장애의 몸으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액운 많다는 소띠여서 평생 숙명처럼 멍에를 지고 사셨는지 알 수 없다. 근엄하고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빼닮아 데면데면하기만 했던 못난 딸이 나였다.
허깨비처럼 바람에 실려 과거에 겉돌고 있는 의식을 깨우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코뚜레와 굴레에 걸쳐 이어진 고삐처럼 뗄 수 없는 운명을 느낀다. 이가 빠진 접시들, 묵직한 수석이며 거무튀튀한 목기 등 이런 빛바랜 물건들로 기억의 편린들을 꿰맞추고 있는 것이다.
-<나만의 수장고>에서
이와 같이 작가 임윤교에게는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안에는 사람살이의 땀과 아픔과 추억, 그리고 자신의 고집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6. 나가면서
지금까지 임윤교의 수필문법과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작가 임윤교는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마다 상상적 체험을 거듭하고, 그 함유한 본질을 찾아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예술의 기법이 ‘낯설게 하기’에서 출발한다고 볼 때, 이 작가는 발칙할 정도로 철저한 ‘낯설게 보기(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자연에서 글감이 오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오든 언제나 해석의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본다.
수필의 묘미는 보잘것없는 글감이라 해도 삶 전체로 확대하여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 임윤교는 자연이든 인간사든 그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찾아내는 데에 남다른 능력이 있다. 그래서 글마다 진지하고 깊은 글맛을 전달하고 있다.
작가 임윤교에 있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질과 방법이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삶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한다. 참고 인내하며 도달한 성취는 진주와 같은 보석이다. 이러한 삶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꿈을 놓지 않는 집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자연은 물론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늘 슬기롭게 호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또 나름 혈연의 관계를 신봉한다. 역사의식으로 무장도 되어 있다. 씨족의 특성이 내게 전승된 것도 조상의 피가 내게 있기 때문이다. 조상의 얼이 화석처럼 내 몸에 살아 있음이다. 가족의 연은 살아가면서 수시로 되새김질 된다. 오래 된 생활용품을 매체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작가에게 추억으로 살아난다. 이게 혈연의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레테의 강》의 글감 해석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능력은 다음 글을 기다리게 한다. 이제 레테의 강을 다시 건너 돌아왔으니, 수필문학에 전념하길 주문하면서 다음 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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