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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족구인 - 모두의 족구 커뮤니티 :) 원문보기 글쓴이: (신화)송한용
전국에 계신 족구동호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송한용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이트진로음료팀의 공격수 장한빈 선수와의 인터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세신버팔로 족구단에 대해 알고 싶어 평소 친분이 있었던(?) 신진이 선수에게 부탁해 연락처를 받아 통화를 하게 되었고,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허락을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제가 쓸 거리가 상당히 많이 늘어났네요. 이 인터뷰는 상, 하 두편으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상편에서는 장한빈 선수의 '과거', 즉 장한빈 선수가 족구를 처음 시작한 시절 부터 세신버팔로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고요, 하편에서는 장한빈 선수의 현재, 그리고 족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장한빈 선수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송한용(이하 '송'): 장한빈 선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장한빈(이하 '장'): 아닙니다. 이렇게 송한용님의 족구칼럼에서 인터뷰가 들어와 개인적으로도 영광이고, 흥미진진하네요.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송: 너무 감사드리고, 편안하고 재미있는 인터뷰가 되도록 저도 노력해보겠습니다. 먼저 팬 분들에게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장: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최강부 하이트진로음료팀의 공격수 장한빈이라고 합니다. 91년생, 25살이고요, 고향은 경남 양산입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송: 남동생이 있다고요? 그럼 남동생도 혹시 족구선수인가요?
장: 아닙니다. 현재 공군으로 군복무 중이고요. 군대 가서 족구를 시작했어요. 근데 볼 센스가 없어서 족구는 안 시켰습니다.(웃음)
송: 알겠습니다. 장한빈 선수의 현재 근황은?
장: 현재 저는 충북 청주시에 있는 하이트진로음료의 생산지원부서에 자재관리 담당을 맡고 있으며, 업무 후 화,목은 팀 훈련을 하고 있고요, 나머지 날에는 개인 운동 및 팀 훈련에서 부족함을 느낀 부분을 연습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송: 그럼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운동을 하시는 거예요?
장: 예! 아무래도 이제 회사에 취직을 했으니 회사에서 저에게 성적에 대한 기대치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부담도 있습니다. 회사상의 업무도 업무지만, 선수로 특채 입사 한 것이기 때문에 선수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창원후배들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도 항상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저 또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송: 정말 대단하시네요. 근데 장한빈 선수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나요?
장: 물론입니다. 매번 동영상을 보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송: 그럼 대체 장한빈 같은 선수가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장: 일단 저도 오랜 시간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공격방법을 개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기술에서 동영상을 보면서 ‘왜 이때 이 공격을 안 했지?’라고 복기하면서 똑같은 상황에서 좀 더 쉽게 득점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더욱 연습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마산 출신 선수들이 공격하는 방법은 알지만 한세대학교 선수들 처럼 공격 시 어떤 자세로 어떤 움직임을 통해 몸의 힘 운용을 해야 파워를 실어 줄 수 있고 정확하게 차는지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 약한데 우리 팀에 있는 한세대학교 출신 형들에게 자세교육 및 이론적인 노하우을 배우며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송: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상에 군림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럼 이제부터 장한빈 선수의 과거 이야기를 시작해 볼텐데요. 먼저 장한빈 선수가 족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족구장에 가면서 족구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음식점 뒤에 족구장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족구를 접하게 되었죠. 그 곳에서 운동하던 족구팀은 양산시 최초의 족구클럽이었던 ‘양산 족심회’였습니다. 이 곳에서 양산시 족구연합회가 시작되기도 했었고요, 좀 더 거창하게 말씀 드리면 '양산시 족구의 메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키가 작아 처음에는 세터로 시작했고, 6학년 때까지 세터를 하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키가 공격을 할 만큼 자라서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족구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부산대회에 출전하시는데 따라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소속된 팀이 당시 중학생이었던 박동근 선수가 공격수로 있었던 팀에게 패했었죠. 그래서 '내가 커서 저 공격수는 반드시 잡겠다.' 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복수를 해드리겠다는 어린 생각이 족구에 더 빠지게 만들었고 그게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송: 박동근 선수는 지금도 운동을 하나요?
장: 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양산시 대회에 가서 보니 울산 중앙족구단 소속으로 뛰고 있더라고요.
송: 복수는 제대로 하셨겠죠?
장: 물론입니다.(웃음)
송: 그럼 족구 이외에 다른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나요?
장: 5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고, 수영을 했습니다. 딱히 소질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공을 가지고 노는걸 좋아했고,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안축 공격보다는 발등 공격을 더 잘했어요. 그러다 (성)락신이 형이 점프해 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다 보니 어른들이 소질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때부터1군에 넣어주셔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송: 그럼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장: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 당시, 아마도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하는데요, 어찌 보면 지금보다 족구가 더욱 활성화 되어있었던 시기로 기억합니다. 동네 족구시합만 가도 정말 많은 팀들이 출전을 했고, TV에서는 삼성전자, 현대파워텍, 한세대학교, 현대자동차등 많은 팀들이 보여주는 멋진 경기력에 매료되어 더욱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향 주위에 성락신, 오석봉 선수를 보며 '저 선수들을 연습해서 이겨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선수의 꿈을 키운 것 같습니다.
송: 그럼 이제 장한빈 선수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생 시절이었는데, 제가 알기로 장한빈 선수는 '양산제일고'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창원공고' 선수로 출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한 사연이 궁금합니다.
장: 중학교 3학년 때, 경남에서 벌어진 전국 청소년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울산마스터 김민수 선수, 문경공고의 손기원, 유병진 선수, 그리고 박동근 선수까지 출전했었는데 얼떨결에 제가 3위에 입상을 했습니다. 이런 저를 보시고 당시 창원공고 감독님이셨던 이상석 감독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한빈이를 저희와 함께 대회에 출전시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을 하셨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상석 감독님께서 다시 한 번 제안하셔서 창원에서 간단한 테스트 이후 창원공고 선수로 뛰게 되었습니다.
송: 그럼 왜 창원공고에 진학하지 않으셨나요?
장: 우선 집과 떨어져 (학교 기숙사가 없었기에..) 창원에 혼자 자취를 해야된다는 부분이 제일 컸고 부모님께서도 제가 운동 선수가 아닌 공부를 해서 성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 집안 자체가 학구열이 강했거든요. 당연히 족구에 대한 반대도 심하셨습니다. 중학교 시절엔 어머니가 족구화를 내다 버리실 정도였고, 나름 학업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양산에 엘리트 학교였던 제일고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뛰어 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성적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께 처음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요.’ 아마 제가 살아오면서 부모님께 저의 미래를 두고 의견을 피력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부모님께서도 저의 진심을 보셨는지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곳에 취직해 잘 지내고 있지만 부모님이 바라셨던 학업으로 성공하지 못해 항상 죄송한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송: 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족구 선수의 길을 선택하셨고, 잘 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장한빈 선수가 있었고 이런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창신대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텐데요. 창신대학교 시절 전공과목 및 운동환경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장: 저는 창신대학교 10학번으로 입학했고요, 전공과목은 ‘사회체육’이었습니다. 한 기수 선배인 김광훈, 김종세, 김동일, 김종국 선수들을 주축으로 2008년 말, 창신대학교 족구단이 창단되게 되었습니다. 운동환경은 사회체육과이다보니 자연스레 일반학생들과 함께 족구도 하고, 태권도나 유도등 다른 운동도 접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정식 주 종목인 족구는 주로 저희들의 전용구장인 '두대공원'에서 창원공고 학생들과 창신대 선후배들이 모여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5시반 부터 10시반까지 연습했습니다.
송: 그런데 제가 알기로 천유빈 선수는 08학번이다 보니 창신대에 입학은 못했고, 문경대학에 입학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신대학 소속 선수로 뛰었는데 왜 그런 건가요?
장: 네 사실 그것이 문제가 많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산로봇랜드 족구단’이 창단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유빈이 형이 개인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자퇴를 했어요. 이후 이상석 감독님께서 '함께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창신대학 팀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창신대에 우수비가 없었거든요, 당시 있었던 우수비가 군문제로 인해 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청소년 팀의 남성우 선수가 한 번씩 뛰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유빈이 형이 병역특례를 김해 쪽에서 구하게 되어서 합류하기도 쉬웠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재학생만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게 아니고, 코치로 임명을 하면 한 선수가 '코치 겸 선수'로 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랑 (박)성진이가 재학생, (김)광훈이 형이 휴학생, 그리고 유빈이 형이 '코치 겸 선수'로 합류하여 팀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연말에 ‘휴학생도 안되고 오직 재학생만 경기에 뛸 수 있다’는 규정이 신설되어 유빈이 형과 광훈이 형이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운 동계훈련을 하고 있을때 국내 최초의 로봇재단이었던 ‘마산로봇랜드’에서 재단의 홍보를 위해 족구단을 운영하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저희 창신대학교 족구단 선수들을 주축으로 말이죠. 또한 마산로봇랜드에서 창신대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팀명을 ‘마산로봇랜드 족구단’으로 하기로 결정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빈이 형과 광훈이 형도 아무런 제재 없이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때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송: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밖에 얘기할 수 없겠는데요, 그럼 마산로봇랜드에서의 운동 환경은 어땠습니까?
장: 마산로봇랜드가 창단되면서 좀 더 편안한 운동환경과 많은 지원 속에서 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족구화 및 운동용품, 시합 경비지원은 물론이고, 재단측에서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양강배 대회때는 재단의 워크샾을 춘천에서 열어 모든 직원들이 경기장에 찾아와 저희 경기를 응원해 주기도 했었습니다.
운동환경은 크게 바뀐 것은 없었고, 단지 후원이 창신대에서 로봇랜드로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송: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당시 ‘마산로봇랜드’와 ‘마산로봇랜드 그리프’ 이렇게 두 팀이 운영되었는데요, 이렇게 운영된 이유와 ‘그리프’가 무슨 뜻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장: 일단 저희가 두 팀으로 운영이 가능해서 A,B팀으로 나누려고 했는데, 최강부에서는 같은 팀에서 A,B팀으로 팀명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어쨌든 같은 팀이지만 그래도 다른 팀명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로 한 것이고요. ‘그리프’는 경남로봇산업진흥재단의 영어표기인 ‘Gyeongnam Robotland Foundation’의 약자인 ‘GRF’의 영문 발음입니다.
송: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산로봇랜드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열기 시작했는데요, 최강부 첫 우승이 언제였는지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장: 창신대학에서는 태백에서 열린 '제4회 노동부 장관기'였습니다. 당시에는 최강부가 아닌 대학부로 뛰는 경기들이 많았는데, 최강부 첫 우승은 그 때였습니다. 이후 마산로봇랜드 이름으로 첫 우승은 '제1회 경주서라벌배 족구대회'였습니다.
송: 이후 수 많은 우승을 하셨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 있다면?
장: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고 기억해주시는 2012년 슈퍼오닝배 족구대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제가 눈에 눈 다래끼가 나서 경기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당시 저희와GM대우, 딱 두 팀이 예선에서 한 조였는데 GM대우 팀이 내부사정으로 인해 불참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기도 하지 않고8강에 진출했죠. 그런데 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본선 대진 추첨을 했는데, 광훈이 형이 또GM대우를 뽑은 거예요. 결국 광훈이 형의 신의 손 덕분에 단 한 경기도 치르지 않고 4강에 진출했습니다. 4강 상대가 이천시청 족구단이었는데, 8강에서 (마산로봇랜드)그리프 팀과 풀 세트 접전 끝에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올라왔습니다. 그 해 슈퍼오닝이 유독 많이 더웠던 시합이였습니다.
4강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고, 반대편 4강 대결이 현대파워텍과 부천중앙의 대결이었는데, 3세트 현대파워텍이 많이 앞서나가고 있어서 당연히 결승상대가 현대파워텍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부천중앙이 뒤집으며 대역전극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결국 부천중앙과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저희가 그 경기가 펼쳐지기 전(前) 주에 벌어진 소양강배 준결승전에서 부천중앙에게 패했습니다.그래서 상대전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풀 세트 접전 끝에 어려운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차지해 너무 기뻤습니다. 그 대회 우승이 운도 많이 따라주었고, 좋은 경기력으로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은 계기가 된 것 같아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입니다.
송: 저도 그 경기 정말 잘 보았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눈을 뗄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장: 동영상 촬영은 하지 않았지만 2011년에 벌어진 청원생명쌀배6강전 여주족구단과의 경기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허리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많이 못 뛰었는데 11:14에서 17:15로 역전했습니다. 그때 많은 관중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셨고, 가장 짜릿했던 경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경기는 ‘테라의 족구동영상’ 카페의 태양스포츠와 한세대학교 경기 뒤쪽에 보시면 살짝 나옵니다.
송: 네 잘 알겠습니다. 이후 창신대학교 족구단이 해체되고, 문성대학 족구단이 창단되었는데, 어떤 사연이 있나요?
장: 많은 팬 분 들이 잘 모르실 것 같아 먼저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4년제대학과 전문대의 큰 차이점은 기업의 현장직이냐 사무직이냐로 나누어집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요. 쉽게 말해 4년제 대학 졸업생은 현장직으로 취업이 되지 않습니다. 당시 2년제였던 창신대가 4년제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로인해 사회체육과란 전문대의 전공도 없어지게 되었고, 저희가 바라던 현장직의 취업조건도 맞지 않게 되어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상석 감독님께서 평소 친분이 있으셨던 문성대 사회체육과 학과장님께 부탁해 문성대학 족구단이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송: 그럼 창신대 족구단의 해체 후 문성대학 족구단의 창단까지 공백기는 없었나요? 만약 있었다면 선수들이 무적선수 신분이었을텐데 말이죠.
장: 다행히 4년제로 인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1년전에 알았기 때문에 그 동안 열심히 새로운 대학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관계로 공백기는 없었습니다.
송: 다행이네요. 그리고 나서 마산로봇랜드 족구단이 해체가 되고, 세신버팔로 족구단이 창단되었는데 여기에 대한 사연도 궁금합니다.
장: 마산로봇랜드의 사업자체가 전전긍긍하며 유야무야로 바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족구단에 대한 지원과 관심이 떨어지게 되었고, 아무래도 공기업이다보니 정치권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남 도지사님이 바뀌며 족구단에 대한 지원이 완전히 끊기게 되어 단장님과 감독님께서 새로운 스폰서를 수소문하던 도중에 세신버팔로라는 공구회사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여 팀 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송: 그럼 마산로봇랜드에서 세신버팔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공백기는 없었나요?
장: 네! 없었습니다. 마산로봇랜드가 해체된다는 사실을 저희가 먼저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스폰서를 구할 때까지는 마산로봇랜드 이름을 계속 쓰기로 했었고요, 세신버팔로의 스폰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은 대회 1주일 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구두계약만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해 마산로봇랜드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대회는 아마 여수에서 펼쳐진 '전국연합회장기'로 기억하는데요, 대회가 끝난 후에 정식 계약서를 쓰고, 본격적으로 스폰을 받으며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송: 그럼 세신버팔로, 그리고 세신TOOLS. 이렇게 두 팀으로 활동을 하셨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건가요?
장: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최강부에서 같은 팀에서의 A,B팀으로 구분이 안되었기 때문에 세신버팔로가 공구회사인 만큼 '세신'의 이름은 살리며 공구라는 의미의 'TOOLS'를 붙여 팀명을 사용한 것입니다.
송: 네! 좋습니다. 그런데 선수들 중 세신버팔로에 취업했다는 선수는 한 명도 없는데, 세신버팔로는 선수들의 취업을 받아주지 않나요?
장: 우선 스폰서 개념이기 때문에 취업하고는 연관되어 있지않습니다. 선수들이 지원을 하면 취업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신버팔로에서 단 한 번도 선수들에게 취업을 하라고 제안을 한 적도 없고, 세신버팔로는 회사 차원에서 족구선수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 기존의 족구팀이 있는 회사들이 연봉이나 복지 또는 족구부 지원이나 마케팅 측면에서도 더 많은 지원이 있기 때문에 취직은 다른 회사로 하지 않나 싶습니다.
송: 알겠습니다. 그럼 세신버팔로 시절에 대해 얘기해 볼텐데요.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그리고 아쉬웠던 점들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 팀의 마지막 고참이었을 때 보다는 막내 생활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시합 하루 전 날 항상 치킨이나 피자등 야식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아마 슈퍼오닝배로 기억하는데 그 날 따라 평소 먹던 것보다 다른 것이 먹고 싶어서 받은 야식 값으로 그리프팀은 치킨을 시키고 로봇랜드팀은 오징어 회를 시켰는데,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너무 적은거예요. 그래서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해 먼저 먹기를 했는데 저랑 (김)종세 형이 3,4등을 해서 바닥에 남은것만 긁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아쉬웠던 점은 2014년 세신버팔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것 같습니다. 광훈이 형이 팀을 떠나고, 남성우 선수까지 취업으로 운동을 하기가 힘들어져 우리팀의 장점이었던 팀 플레이를 못하게 되고 또 세월호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대회가 없어 시합에도 출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저 개인적으로도 전역 후 취직문제가 걸려있었는데 그런 것이 더욱 마음을 조급하게 했었죠. 그래서 감독님께서 취직을 위해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며, 풋넷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작년 시즌이 가장 아쉬우면서 힘들었던 한 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송: 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그런데 어린 선수들이 모여 있다 보니 재미있었던 일도 있었겠지만 선수들끼리의 다툼도 있었을 것 같은데,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장: 다툼이라기 보단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저랑 유빈이 형이 많이 있었습니다. 경기 중 제가 가끔 흥분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럼 유빈이 형이 항상 제게 말했어요. ‘너 시합 중에 왜 그러냐? 그러지 마라.’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야속해 제가 휭 돌아가버리고는 했죠. 물론 시합이 끝나면 ‘아까는 죄송했습니다.’라고 말하기는 했습니다. 시합 중에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로는 단 한 번도 다툰 적은 없었습니다. 여담으로 말씀 드리면 유빈이 형과의 그런 다툼이 있으면 부주장이었던 광훈이 형이 중재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굳이 말씀드리면 유빈이 형은 조선시대 아버지 같은 상남자 스타일이었고, 광훈이 형은 뒤에서 후배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엄마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종세 형은 조용하지만 항상 후배들 장난 다 받아주시고 웃어주는 우리 후배들에게는 정말 천사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큰 형 같은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철 없는 막내 같았습니다.(웃음)
송: 다 이해가 가는데 김종세 선수가 그런 스타일이라는 사실이 좀 의외네요. 경기 중 누구보다 파이팅이 좋은 선수잖아요?
장: 네 그렇죠. 경기장 시합할 때의 모습과 경기 끝나고의 모습이 180도 바뀌는 선수입니다. 경기장에서는 누구보다 전투적이고 파이팅 넘치고 팀을 위해 헌신적인 선수지요,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자신감을 얻기 위함이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토스도 잘되고 팀원들에게 활기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올 초에 동영상 댓글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안좋은 글들이 많았는데, 한편으로는 (댓글을 단)그 분들이 이해가고 또 한편으로는 종세형이 이해가고 그랬습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속이 많이 상하지 않았나 싶네요. 게임중에 상대팀 선수가 그 부분이 불쾌했다면 정식적으로 심판분께 요청했겠죠. 하지만 아직까지 게임중에 그런 요청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송: 김종세 선수에게 그런 속사정이 있었군요. 잘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은요. 창신대, 지금은 문성대학인데 어쨌든 장한빈 선수를 비롯한 창원 출신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한세대학교와 비교는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이 시간 ‘우리가 한세대보다 이것은 더 낫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 제가 재학 중일 때 다른 지역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한세대는 이렇게 운동하는데 창신대는 어떻게 하나요?’였습니다.
물론 제가 한세대에서 운동해본 적도 없고, 그 곳 환경에 대해 어깨너머로 들은 내용이기 때문에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희 창신대 및 창원 선수들의 장점은 스스로 운동하고 스스로 창의성을 기른다는 것입니다. 공격수마다 개성이 있고, 다른 자세와 자신만의 방식과 운영미가 있고, 수비수들도 기본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선수 스스로가 팀 플레이 및 미팅을 통해 만들어 갔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그것을 받아들여 노력하는 선수와 안하는 선수에 따라 커다란 장점이 될 수 있기도 하고 큰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정리하자면 한세대학교 팀 선수들이 교과서적인 플레이와 기본기에서 앞서는 반면 창원 출신들은 개개인의 창의성과 연계플레이가 앞서는 것 같습니다.
송: 네! 좋습니다. 그런데 너무 얌전하게 교과서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 기회에 조금 한세대학교 선수들을 도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 도발이요? 음.....기왕에 도발하라고 하셨으니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일단 이건 꼭 써 주세요. 창원 출신들이 평균적으로 외모에서 앞서는 것 같습니다.
송: 음.....외모가요? 그럼 한세대에서 누가 그렇게 못났나요?
장: 이 부분은 노코멘트 찬스 쓰겠습니다(웃음)
송: 알겠습니다. 그리고요?
장: 그리고....역대 베스트 멤버가 붙으면 우리가 이길꺼라 자신합니다.(웃음)
송: 제대로 도발을 하셨는데 그럼 창원의 베스트 멤버는 누구입니까?
장: 전국 최고의 듀오인 '우 유빈 좌 광훈' 그리고 세터는 박성진, 김종세 선수, 공격수는 빼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세대 쪽 베스트 맴버에서 공격수가 광재형이 나온다면 꼭 제가 뛰도록 하겠습니다(웃음)
송: 음...아마 이광재 선수가 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부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자세한 내용은 잠시 뒤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요, 어쨌든 저도 바라는 것이 창원 출신 선수들과 한세대 출신 선수들과 정기적인 OB전이 이루어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장: 안 그래도 한세대 출신 선수들과 만나면 가끔 얘기하고는 합니다. 마침 지금 현재 우리 팀의(임)상욱이 형이 한세대 졸업생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고, 저는 두대회(창원 출신 선수들의 모임 이름)의 총무를 맡고 있어서 ‘우리 한 번 붙어보자’라고 자주 말합니다.
송: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매치업이 성사된다면 저를 꼭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꼭 취재가도록 할게요.
장: 네 알겠습니다. 추진해 보겠습니다.
송: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과 함께 세신버팔로 시절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이상석 감독님과 개인적으로 통화도 했지만 장한빈 선수를 비롯해 모든 창원 출신 선수들에게는 최고의 은사님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그런데 감독님과 선수들의 운명이 너무나 얄궂은 운명입니다. 모두가 선수들의 취업을 목표로 열심히 뛰었는데 선수들의 취업이 마냥 기쁜일만도 아닌 것이 선수들의 취업은 곧 감독님을 비롯해 세신버팔로 동료 선수들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독님께서는 선수들이 떠날 때마다 섭섭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장한빈 선수가 떠나실 때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장: 제가 17살에 그곳에 처음 들어갔고, 거의 8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올 시즌 첫 대회였던 국민생활체육회장배까지도 적응이 안되었습니다. '왜 내 뒤에 진이형이 서 있는거지?'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저희가 버팔로와 툴스팀으로 나누어져 있다보니 한 팀이 경기를 하고 있으면 다른 팀 선수들과 우리 식구들이 함께 응원을 해주었는데, 그들이 이제 제 반대편 팀을 응원하고 있는거예요. 정말 서운하기도 하면서 그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더라고요.
송: 장한빈 선수의 지금 말씀 속에 정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네요. 누구보다도 아쉬웠을 것이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장: 저도 그렇지만 아마 감독님은 더 하셨을 겁니다. 지난 시즌 유빈이 형과 광훈이 형이 모두 떠나면서 저희 팀의 수비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약해졌어요. 그래서 감독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이제 네 뒤에 유빈이랑 광훈이가 없다. 걔들은 이제 반대편에서 너를 연구하고, 너를 이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넌 걔들보다 두배 더 열심히 해서 한 방에 끝내야 한다.'라는 말씀을요. 그래서 원래 제 스타일이 길게 랠리를 가져가는 스타일이었는데, 지난 시즌 부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한 방에 끝내기 위해 스타일에 변화를 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제가 떠나니 저와 대결을 할때는 또 수비포메이션이 바뀌더라고요. 이렇듯 누군가 나가면 그보다 더욱 강한 팀을 만드셔야하기 때문에 정말 힘드실 겁니다.
그리고 저희보다 지금 후배들이 힘든 부분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운동장에 있었을때는 최강부가 항상 2팀에, 일반부도 창신대학팀들이 2년동안 많은 성적을 내며 수준이 올라왔었습니다. 연습게임에서 조차도 서로 이기고자 하는 경쟁심이 많았죠. 지금은 버팔로 한팀에 문성대학 한 팀 밖에 없으니 아무래도 연습경기도 많이 다운되고 제가 있을 때는 사람이 많아서 한 두명 야간(근무)으로 빠져도 게임이 됐는데 지금은 인원 한 명 빠지면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로인해 올 초와 다르게 버팔로나 문성대학이 성적이 떨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 음...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문성대학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올 시즌이 시작하기 전, 세신버팔로를 좀 눈여겨 봤어요. 장한빈 선수를 비롯해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이 모두 떠나고 지난 시즌 툴스 소속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죠. 그러다보니 남성우 선수를 제외하고는 우승경험이 있는 선수들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첫 대회였던 국민생활체육 회장배에서 우승을 차지했어요. 솔직히 이건 올 시즌 아마 최고의 깜짝 우승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대회는 토너먼트가 없었던 리그전이었어요. 토너먼트와 리그전은 확실히 틀리거든요. 어쨌든 세신버팔로의 현 선수들, 토너먼트 대회 우승 한 번만 하면 저는 충분히 치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어차피 처음 한 번이 힘든거지, 우승도 습관이라면 습관일 수 있거든요.
장: 네! 그 한 번이 힘들지만 꼭 해낼 것이라 저도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위협적이라 생각하는 공격수는 (김)태우 같이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예요. 어린친구들은 항상 도전자이고 취업한 선수들은 이제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오히려 세신버팔로, 한국승강기대학같은 팀들과의 대결이 개인적으로 부담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송: 잘알겠습니다. 이제 세신버팔로 시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장한빈 선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장: 예! 그러시죠.
하편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