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에 간지럼이 남아 있는걸 보니 계절이 지나가나 보다. 계절을 기다려 본적은 없어도 이 계절은 환영 받고 싶다는 듯 가장 파랗고 맑은 얼굴로 다가온다. 청춘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라는 청춘 예찬의 한 구절이 삶에 성큼 들어오는 순간 겨우내 움츠려 들었던 마음도 조금은 다정해진다. 처음 발을 디딘 건 그 전이지만, 캘거리의 가장 가운데 동네에 자리를 잡은 지 5년여가 지났다. 동서남북을 모두 걸어보아 작은 그림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 되었을 때 낯설어 밀어내던 이 작은 도시는 집이 되었다. 집이 만들어지니 마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몇 번의 크고 작은 감정의 공사가 있고 나서 삶이 되었다. 이곳의 삶은 더없이 단순하다. 마치 정리의 몇 가지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켜 나온 훌륭한 결과물 마냥 여백이 가득하다. 일을 하고 산책을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일상. 가까운 친구들과 작은 교류를 갖고 공원에서 열리는 작은 이벤트에 참여하는 일탈. 조금 간단해진 삶에는 공백을 메우려는 듯 여유가 들어왔다. 걸음은 조금 느려졌고 하늘을 자주 보게 되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게 되었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모른 채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내가 더 바쁘다는 걸 자랑하는 것 같던 한국에서는 한참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누군가의 뒤통수만이 보였다. 가려는 곳에는 이미 누군가의 뒤통수가 있었고 지나치면 그 앞에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지루한 반복에 지쳐버리고는 고개를 떨구곤 했다. 지금도 바쁘게 걷는다. 내 앞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뒤통수가 있지만 고개를 떨구는 대신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인다. 누군가가 보고 있을 내 뒤통수를 생각해 본다. 여유는 내가 전혀 보지 못하던 나를 한걸음 뒤에서 보여준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처음 느꼈던 것은 수평의 공간감이었다. 넓다는 말조차 부족해 보이는 광활한 대지가 하늘과 맞닿아 있는 모습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거기에 자유롭게 노니는 말과 소들은 이 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공유하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 했다. 수평의 이미지는 캐나다에 많이 녹아 있다.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두 개인 것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나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퍼지며 늘어나는 집들과 건물들의 모습이 그렇다. 특히 관계의 수평성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정차 후 당연하게 한 단계 차체를 낮추는 버스, 기본적으로 건물의 입구와 가장 가깝고 크기도 상대적으로 큰 전용 주차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양보와 배려들. 상대가 누구건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이런 의식들이 캐나다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의도가 어떻든 웃으며 건넨 한마디 인사는 돌고 돌다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느낌이다. 수평성은 확실한 확장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넓은 땅이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공원이다. 잘 관리되고 정돈된 도심의 공원부터 공룡 몇 마리쯤 나온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공원까지. 이런 공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사람들의 일상과의 맞닿아 있다. 공원을 지나 일터로 향하기도 하고 잠시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뛰다 걷다 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운다. 개들에게 공원은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다. 강을 끼고 도는 공원에서는 강아지 몇 마리가 수영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하늘에 닿을 듯 팔을 뻗은 나무들과 걸려 있는 구름들도 훌륭한 그림 한폭이다. 공원뿐 아니라 길도 잘 정리되어 있다. 강을 따라 가는 호젓한 산책로나 다운타운의 각진 도로들도 걸어 다니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이 곳은 보행자의 천국이다. 어느 길이건 신호등이 있어서 걸어서 건널 수 있다. 도시의 가장 번잡한 8차선 도로에도 누가 마지막으로 건너봤을까 싶은 구석진 외길에도 건널목이 있다. 길에서 보이는 경치는 걸음마다 달라져 마치 보물찾기 같고 그 길은 어디까지든 가보라는 듯 연결되어 있어서 마냥 걷다 보면 가야 할 곳을 지나쳐 버리곤 한다. 낙엽이 잔뜩 쌓이거나 눈이 가득 덮여도 다음날엔 말끔하게 지워져 있다. 지나칠 정도로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몇 해전부터 강둑을 따라 두어시간을 걸어 근처 공원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단지 살을 좀 빼고 싶었을 뿐인데 하루를 정리하기에 이만큼 좋은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땀이 뺨을 타고 흐를만큼 더운 날은 하루의 짜증도 같이 흘러버린다. 온 땅을 덮은 갈색의 낙엽들을 밟을 때는 나를 대신해 큰소리로 웃어주는 것 같고 채도가 명도를 삼키는 계절이 오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워 마음의 평안을 준다. 단지 두발을 교대로 움직이는 것 뿐인데 움직이는 내 발걸음에 맞추어 계절이, 시간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캐나다에서의 7년이라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의 어떤 7년간을 가지고 온다해도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시간은 아주 똑같은 길이로 다른 사람에게도 흐른다. 그 중에는 가장 가까이서 나를 보고 듣는 아내가 있고 열 몇시간이나 멀리에서 살고 있는 부모님도 있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자식이지만 어릴적부터 나를 독립적으로 키우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셨다. 고등학교 이후 나는 늘 한곳에 적을 둔 적 없이 살아 왔는데 모든 곳에서의 많은 경험은 나를 깊게 또 넓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부모님의 중요한 추억의 시간에 내가 없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버지가 작년에 정년으로 직장에서 은퇴하셨을 때에도 기념사진에 나는 없다. 아버지는 평생을 한 계열의 회사에 다니셨다. 매일 똑같은 일을 40여년동안 한다는게 어떤건지 감히 상상도 안된다. 나는 아직 그정도 살지도 못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 하는 기분이 후련함일지 섭섭함일지 감도 오지 않지만 부모님의 특별한 시간에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쉬울 뿐이다. 부모님과 통화를 한다. 특별할 것이 없는 안부를 주고 받는다. 같은 시간에 통화를 하지만 한국은 하루가 빠르다. 부모님은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하루를 먼저 살고 있다. 앞서가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어도 위안을 받는다. 하루 늦은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마치 인생사와 꼭 닮았다. 이제는 캐나다에서 배우게 된 조금은 느긋해지는 법을 천천히 걷는 법을 가르쳐 드려야겠다. 그리고 앞으로 생기는 추억에는 같은 발걸음이 남아 있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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