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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tistory.com)
2020,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폐사지에서/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석 하나 얹어 놓으면 그만이겠다
여기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겠다
옛 집이 나를 부르는 듯
문득 옛 절터가 나를 부르면
천 년 전 노승 발자국 아득한데
부처는 귀에 걸었던 염주 알 같은 생각들을
부도 속 깊게 묻어 놓고 적멸에 드셨는가
발자국이 깊다
■ 심사평 : ‘있고 없음’ 경계 허무는 담대한 상상력 돋보여-문태준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편들을 읽었다. 불교적인 소재들이 시적 모티프로 작용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찰 공간에서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목어, 운판 등의 사물과 수행의 경험, 불교의 가르침 등을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경우가 우세했다.
그러나 시적인 구조에서의 완결성이 부족한 경우나 한 편의 시를 통해 노래하려는 생각의 내용이 시행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방대한 경우들도 있었다.
관심 있게 본 작품들은 ‘바다 출력’, ‘집에 들다’, ‘수련의 바깥’, ‘동전 불사’, ‘색패’, ‘갑사의 봄’, ‘폐사지에서’였다. 이 작품들은 서로 경합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또 한 편의 시를 통해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거나, 관습적 사고를 깨뜨리거나, 사상의 둘레를 확장시키는 데에 성과가 있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 ‘집에 들다’, ‘갑사의 봄’, ‘폐사지에서’를 최종적으로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시 ‘집에 들다’는 집이라는 공간을 인심(人心)의 공간으로 해석한 작품으로 그 고요한 교감의 내면을 무량수전에 빗대었다. 다만 시적 표현의 모호함을 시편에서 들어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시 ‘갑사의 봄’은 생명들의 역동적 움직임을 맑은 언어에 담아낸 작품이었다.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깨끗한 시심이 돋보였다. “물을 밀면 여러 갈래의 뿌리가 읽혀진다”와 같은 시구에서는 내밀한 감각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나열의 방식에 의해 시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는 점은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폐사지에서’를 선정했다. 함께 보내온 시편들이 일정하게 고른 높이를 보여주었고, 또 시 창작의 연륜이 느껴졌다. 시 ‘폐사지에서’는 허공에서 독경의 소리를 살려내고, 떨어진 낙엽에서 풍경의 소리를 복원하면서 절이 사라진 공간에 다시 절을 짓는, 멋진 정신의 노동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또한 “천년을 피고 진 풀꽃들이/ 다 경전”이라고 말해 모든 생명 존재 그 자체에 법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대목과 있고 없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담대한 상상력은 당선작으로서의 풍모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불교시의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
당선하신 분께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모든 분들께도 정진을 당부 드린다.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심사평 곽재구 박성우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 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 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 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2020년 신춘문에 강원일보 시 당선작
문자와 사랑/박성민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고 소양강 돌다리까지 달렸다
강변에 먼저 와 있던 문자는 조용히 앉아
막 피어난 안개로 손을 씻고 있었다
나는 물풀처럼 흔들리며
흐르는 물살이 입은 햇살이 부러웠다
강 건너 우두동의 저녁을 향해
문자는 어른처럼 익숙한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잠긴 목소리로
처음 `그대'라고 불러 보았다
저녁 강이 비치는 하늘은 깊은 분지를 향해 흘러갔다
나는 역 광장에서 서성이며 미군부대 헬기가 뜨기를 기다렸다
담 밖 꽃 진 나무들이 어떻게 바람소리를 내는지 궁금했지만
서울로 가는 길이어서인지, 기적소리 길게 레일을 벗어날 때
검은 안개 본 적 있니? 미군부대 녹슨 철조망에 기대어
헝클어진 머리 문자는 짓궂게 웃기만 했다
[심사평] 심사위원 : 이영춘 시인 · 이상국 시인
“오늘 날 생활양식 서정적으로 반영 인상 깊어”
80여편이 예선을 거쳐 올라왔다. 대체적으로 해석되고 존재하는 세계를 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이할 만한 것은 응모자 연령대가 상당히 낮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다' 할 만큼 눈에 띄는 작품은 없었다.
박여원의 `등대와 함께한 밤', 김겸의 `귀로', 권소영의 `물기', 박성민의 `문자와의 사랑'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등대와 함께한 밤'은 산문시로 시상 전개의 역량이 돋보였으나 시적 장치가 단조로웠다. `귀로'는 전개 방식은 특이했으나 특정 언어 체험의 일반화에 무리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물기'와 `문자와의 사랑'이 당선을 겨뤘다. `물기'는 시적 전개와 상상력의 완성도가 높았으나볼륨이 약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최종으로 오늘날 생활양식을 잘 반영한 `문자와의 사랑'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의견을 모았다. 모든 분의 정진을 빈다.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이유운
당신이 또 여름이 왔다고 말하는 것은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내 등을
바람으로 깎아놓은 거친 손으로 훑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손가락 끝이 유독 단단했던 당신의 손톱은 언제나 창백한 회청색이었다
손톱이 왜 파랗지요 하고 물으면
요 안에는 바람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던
당신의 입술에는 뼈가 없었다
당신의 손이 습한 등을 훑으면 와사삭 소름이 돋아서
정말로 당신의 손톱에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바람으로 나를 만지며…
내 등뼈는 당신 덕에 조약돌처럼 둥글어졌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
누군가 내 등을 만지면
나는 바람으로 깎여 둥글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당신의 부푼 무릎 위에 바람의 모양을 그렸다
이제 그 먼 미래가 되어서 바람으로 깎인 나는
이 즈음에는 꼭 당신을 생각한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
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
나는 여름이 오면 반드시 당신의 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내가 만져보지 못한 당신의 뼈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하고
심사평]: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김윤배·김명인
해마다 수 천 명의 시인 지망생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한다.
경인일보도 예외는 아니다. 매년 응모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왜 시일까? 시에는 마법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의 마법적 기능은 쾌락이고 인식이며 구원이다. 시를 쓰는 일도 감상하는 일도 즐거움이 바탕이다. 즐거움은 쾌락의 다른 말이다.
시는 사물에 대한 인식, 역사에 대한 인식, 사회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달라지게 한다. 시적 구원은 우선 시인에게 먼저다. 시인의 구원 이후에 독자의 구원이 온다. 이러한 시의 마법적 기능이 많은 사람들을 시에 빠지게 한다.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에는 시의 이와 같은 마법적 기능이 약화된 것을 느낀다. 실험적인 시들이 눈에 뜨지 않았다. 시적 모험은 광기에서 오는 것이고 광기는 쾌락에서 나오는 것인데 지나치게 안정적인 음역과 음색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식의 깊이가 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시대정신을 추구하거나 사회의 병리현상을 들여다보거나 소외계층을 연민의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적었다. 사물의 본질을 보려는 응모자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한 사물이나 소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불필요한 시적 장치로 산만한 전개에 머무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또한 1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응모자의 연령층이 다양해졌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의 이유운 씨와 '모래시계'의 신진영 씨를 만나게 된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이유운 씨의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는 이 세상에 바람으로 존재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헌사다. '바람을 담고 있던 당신의 손톱과/바람의 모양대로 부푼 당신의 무릎'은 이유운 씨의 독창적인 문장이어서 울림이 크다.
신진영 씨의 '모래시계'는 가혹한 시대를 건너고 있는 젊음을 훼손한 악랄한 물고문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첫행 '잘룩한 부분을 지나면서/모래들은 새로운 진술이 된다'부터 무언가 불길하고 심상치 않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와 '모래시계'를 놓고 장시간 논의를 했다. 논의 끝에 이유운 씨를 당선자로 밀기로 합의했다. 한국시단의 거목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깝게 당선 기회를 놓친 신진영 씨에게도 위로와 격려를 드린다.
[202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봄날 / 문나은
아침 열시, 여자는 '주름'하고 입속으로 뇌까린다
블라인드로 스며든 몇 장 햇살이 일렁임조차 없이 마룻바닥에 고인다
여자의 삶은 곧 삶은 빨래처럼 표백되곤 한다
주름 팽팽하게 당겨 올라가 집게에 집힌 채 집게발을 들곤 한다
세 아이를 키우며 꼭두서니처럼 잘게 썰린 여자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다
여자는 이제 너무 많이 읽힌 문장이어서 시들 수도 없다
청소기 안 먼지들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실뱀처럼 엉긴다
부엌에서, 여자는 알약을 삼킨다
"이것 좀 봐!"
아이가 유리병을 흔든다
병속의 벌이 붕붕거린다
쓰레기통 옆 죽어가는 생쥐 위로
우울증 환자의 머리에 덧씌워진 비닐봉지 같은 햇살이 고인다
값싼 비닐처럼 추억은 야윈다
여자를 잘 따르던 비숑 프리제는 이유 없이 밥을 굶기 시작하더니 보름도 채 안되어 죽었다
남편의 사업은 말린 고사리처럼 불어나고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자란다
비교적 순조로운 날들이다, 여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단단했던 어제의 눈망울들은 어디서
물기를 버렸는가
그러나 저 살찐 햇살은 그늘의 혈연이다, 햇살은 그늘을 살찌운다
여자는 다시금 뇌까린다, 그나마 다행스런 날들이지 않은가
병속의 벌처럼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만 빼면,
[심사평] 심사위원 김명인(시인)·박수연(평론가)
여성 특유의 현실 감각에 주목
예심을 통과한 30분의 작품을 읽고 모두 여섯 분의 응모작을 다시 가려 뽑았다. '아빠가 돌아온다' 외 3편, '우리는 바다를 떠도는 노숙자들' 외 4편, '동학사' 외 4편, '거짓말 공책' 외 2편, '연습을 훔쳐보다' 외 4편, '괜찮은 날' 외 3편이 그 작품들이다.
경쾌한 상상력과 낯선 이미지들, 언어의 숙련도가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 둔다. 작품들을 다시 검토한 후 우리는 이 후보작들 중 '연습을 훔쳐보다'와 '봄날'에 주목했다.
'연습을 훔쳐보다'를 투고한 분의 언어 솜씨는 매우 우수하다. 명확한 시적 결말은 언어의 힘을 충분히 드러내 준다. 그러나 언어적 재기에 치여서 통제력을 잃는 게 흠이다. "꽃잎 하나하나 빼며 허무는 허무虛無/요
며칠 허물어진 발자국들"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봄날'을 응모한 분의 작품들에는 전체적으로 일관된 주제와 시선의 힘이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주제의식이 그것이다. 이 특징은 여성들이 현재 갖고 있을 여러 각별한 현실의 양상들로부터 나오는 것일텐데, 이에 대한 응모자의 인식도 뚜렷하다. "여자는 이제 너무 많이 읽힌 문장이어서"라는 구절은 상투적인 것인데 이 구절을 "시들 수도 없다"라는 표현으로 이어서 새롭게 반전시키는 능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본심위원들은 이 작품과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의 일정한 수준을 고려하여 '봄날'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보내면서 새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2020 영남일보 문학상] 詩 당선작
포노 사피엔스/금희숙
유모차는 미리 늙어갑니다
똑같은 장난감을 만지면 계속 넘어지고
인공위성의 속도로 걸음마를 배워야 하는데요
반짝거리는 액정을 젖병처럼 빨면
손바닥만큼 엄마가 웃고 있어요
터치로 선생님을 밀어내고
클릭으로 친구를 선물하고
종소리는 아무래도 허용하지 않아요
아무리 껴안아도 따뜻해지지 않는 방
매일 손잡이를 돌려도 나를 찾을 수 없어요
불안은 얼마나 뚱뚱해지는지
모자를 벗어도 표정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날개 없이도 새가 되고
오늘보다 더 빨리 오늘이 쓰러집니다
울음은 턱받이에서 말라가고
눈동자는 쉽게 예민해집니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를 믿지마세요
여전히 풍선은 위험하니까요
이제 옹알이는 퇴화하고
우리는 기계보다 먼저 완벽합니다
심사평 : 나희덕(시인), 홍정선(문학평론가)
"변화해 가는 신인류의 모습 경쾌하게 표현"
본심에 올라온 열두 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의 고독과 상처, 상실과 죽음이야 시의 오랜 주제이지만, 올해 투고작들에서는 유난히 어떤 활력이나 전망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 안타까움 속에서 마지막까지 숙고의 대상이 된 시들은 '어떤 계단' '테트리스' '수중기도' '포노 사피엔스' 등이었다. 그 중 두 작품을 놓고 장단점을 비교하며 좀 더 토론이 이어졌다.
'어떤 계단' 외 2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집중력이 돋보였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그의 시들은 안전해 보이는 계단이 감추고 있는 위험이나 지방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묘사함으로써 문명의 그림자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그러나 타당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동어반복이 많고 시어가 산만하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포노 사피엔스' 외 2편은 간결한 언어의 배치와 행간의 여백을 통해 시적 함축성은 높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의 시들은 서정적인 톤을 유지하면서도 스마트폰에 의해 변화해가는 신인류의 모습이나 현대인의 단절된 관계와 불안의 심리를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보여줌으로써 자기만의 '명랑한 우울'을 창조해낸다. 다만, 포노 사피엔스에 대한 평면적인 나열을 넘어 좀 더 심층적인 인식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미안해요 아스피린' '공공 터널' 등 다른 투고작들의 수준이 고른 편이어서 믿음이 갔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20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정희안
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마음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연해야 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어 그러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빌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진절머리와 전갈머리는 무슨 관계인지 거울 속에 겨울이 있잖아 말 많은 세상 발밑을 조심해 그럼, 이제부터 그림 공부나 해볼까
시 심사평: 강은교 성선경 김언
가벼운 언어와 무거운 현실 균형감 잘 갖춰
심사위원들은 대략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천여 편의 응모작을 살폈다. 첫째, 참신함이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시의 원형을 보여줄 수 있는 참신함이 있는가를 살폈다. 둘째는 정확함이다. 소통을 위해서도 공감을 위해서도 어설픈 시적 허용에 기대기보다 정확하게 문장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함께 살폈다. 마지막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시의 눈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폈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에서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눈이 시적인 도약을 이룬다. 그것이 또한 시의 꿈일 것이다.
1차 검토 결과 이주호, 윤계순, 최동출, 정희안 등 네 분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으로 남았다. 이주호 씨의 작품은 젊은 감수성이 넘치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으나, 아직은 덜 숙련된 채로 시가 완성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윤계순 씨는 꽤 오랜 숙련의 시간을 거친 작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 안정된 길을 따르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최동출 씨의 작품은 요즘 보기 드물게 웅장한 상상력과 언어가 눈길을 끌었으나, 마지막까지 확신을 줄 만큼 숙성된 세계라고 보기 힘들었다.
정희안 씨의 작품은 유사한 발음의 단어로 언어유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세목을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을 담보하고 있는 점이 미더웠다. 특히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는 한없이 가벼운 언어와 한없이 무거운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으로 말의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함께 성취한 수작이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논의 끝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당선인에게 축하를 드리며, 가장 가벼운 언어로 가장 무거운 세계를 지탱하는 시의 본령을 자기 기질대로, 자기 방식대로, 자기 고집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서 또 하나 새로운 언어의 건축을 보여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2020,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름/이정희
늘그막의 아버지
벗어놓은 양말이며 옷가지에서
거름냄새가 났다
그건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를 포기하는 냄새였을까
그 옛날 장화를 벗을 때나
땀에 전 수건을 받아들 때 나던
그 기세등등한 냄새에서
초록을 버린 풀들이 막 거름으로
이름을 바꿀 때의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앙상한 등짝으로 부려놓은 풀 더미에 가축 오줌과 똥을 잘 섞는다 각자의 냄새를 지켜내겠다고 서슬 퍼렇게 날뛰던 것들이 오래 지켜온 습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냄새로 진동하던 것들이 고집을 버려 삭아지고 토해내며 거름으로 될 때의 냄새가 난다 검은 흙빛 미지근한 열감으로 모든 냄새들이 포기하여 뭉쳐진 거름
들녘을 키우며
아낌없이 주는 거름
깜빡 졸고 있는 그 틈에도
아버지의 밭은 성성했다
러닝셔츠 구멍 사이로
기력 다 빠져나간 아버지의 밭에
폭 삭은 거름 한 짐 뿌리고 싶은데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냄새로 접어들었을까
심사평-박종해 / 詩風 지양한 명징하면서도 깊은 울림의 시
응모작의 수준이 아주 높다는데 만족감을 느끼고, 예심에 올라온 30편 중에 기억에 떠오른 두 편을 골랐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을 두고 어떤 기준과 방침을 내 나름대로 세워 여러번 정독했다. 훌륭한 시인들의 요람인 신춘문예가 오랜 연륜을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신춘문예라는 시풍이 형성되었다. 새롭고 참신하고 실험적이라는 미명 아래 다다이즘(Dadaism)의 시, 시적 변용이 지나쳐 모호하거나 난센스적인 시, 꺾고 비틀어 그로테스크한 시들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나서게 되었다.
숙고 끝에 가려낸 ‘6’과 ‘거름’은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와 명징하면서도 울림이 큰 시의 대결이었다.
‘거름’은 이기심과 자기주장이 팽배한 사회상을 표출하여 서로 자신을 포기(버림)함으로써 소통하고 상생하는 이치를 사물에서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시이다. 특히 가족의 유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의 거름이 되는 숭고한 아버지상을 잘 부각하였다.
시인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길을 열어주는 언어의 전달자(메신저)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고 권위있는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걸맞는 당선자 ‘거름’의 시인을 새해와 함께 시 애호가들 앞에 내 보낸다. 부디 우리 시단의 ‘거름’이 되길 빌어 본다.
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래 해체사/박위훈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심사평 : 사고의 전개·대상 응시하는 태도 자연스러워
심사를 하면서 기본적인 맞춤법을 지키지 않거나 주술관계가 어긋나는 경우에는 논의의 대상에 올려두기가 어려웠다. 또한 한 편의 시를 잘 빚어낸다고 해도 거듭해서 흡사한 사유를 풀어놓거나 작품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어휘로 진행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다섯 분의 작품을 가려낸 후 다시 숙고했다. ‘블랙의 도시’는 신선한 실험정신이 돋보였으나 그 외 두 편의 작품과의 미학적 편차가 컸다. ‘벽’ 등의 시는 삶의 협곡을 더듬으며 긴장감 있게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투고작들이 전체적으로 고른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세 분의 작품을 두고 고민했다. 문나원의 ‘괜찮은 날’ 외 2편은 개인을 둘러싼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진솔하면서도 과도한 감정으로 치우치지 않는 점이 신선했다. 작품을 끌고 가는 방향성, 언어배열이 고르고 안정적이었으나 삶의 깊숙한 곳에 시선을 밀어 넣어 숨겨진 비의나 은폐된 문제들을 끄집어내려는 힘이 부족했다. “유리창들은 늘 쏟아지기 위해 거기 있다” “순간은 그러나 얼마나 성공적인 실패를 부르는가” 등의 문장들은 개성적인 아포리즘과 구별된다. 어떤 사유의 지점에서 단정 지으며 머무르기보다는 남달리 치열하게 밀고나가기를 기대한다.
황세아의 ‘징그러운 사과’ 외 4편은 일상화된 생각을 뒤집는 사고의 전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직설적 발설에 비해 비유를 통한 서사의 진행이 자의적인 구성에 갇혀 있었다. 시인의 상상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제되지 못한 생경한 이미지의 구조가 아니라 핍진하며 익숙한 현실에서 그것을 다르게 인식해 마지막 문장까지 책임지는 태도라 할 것이다. 시의 표면적 새로움에 휘둘리지 말고 천착해나갈 때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박위훈의 ‘고래 해체사’ 외 2편이다. 사고의 전개와 대상을 응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웠고 타자와의 접촉에 있어 대범한 기질이 돋보였다. 한 고래의 주검을 통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는 감정은 귀하다. 버틀러는 ‘애도’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슬픔이 내가 되게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떠밀려지는 존재들과 접촉하며 상처받고 통제할 수 없이 슬퍼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당선작이 기성의 시들처럼 다소 숙련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점이 아쉬웠으나 패배감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높이 보았다.(김이듬, 배한봉)
20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선취소
골목의 번식/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
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
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
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
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심사평 : 다양한 목격서사 통해 우리 시대 골목론 새롭게 써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10명의 응모작 37편이었다. 심사위원들
은 이들 작품을 숙독한 후 5명의 작품을 놓고 거듭 읽었다. 전체적으로 잘 다
듬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들인 흔적이 역설적으로 기성품을 보는 것
처럼 익숙했고 개성이 없었다. 기존의 시 미학에 갇혀 안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신인이 될 수 없다.
내용적으로는 올 한 해 국내외에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들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곳에 눈길을 보낸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적 충동과 사유에 충실한 작품
도 고르기 어려웠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개인 서사에 집중하는 시들이 많았
는데, 미시적인 시·공간 속에서 사소하다 싶은 세목들을 짚어내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며 우선 논의한 내용은 시의 소통 가능성이었다. 요설
에 가까운 언어 비틀기나 이미지 왜곡 등이 지적되었고, 익숙한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나열하는 무딘 언어 감각도 건강하게 소통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
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피어라, 숲’ 외 3편, ‘배고픈 이름’ 외 3편, ‘보성 댁
출항기’ 외 2편, ‘간이’ 외 5편, ‘그늘의 곳간’ 외 2편이었다. ‘그늘의 곳간’은 잘
쓴 시였지만, 그 ‘잘’의 의미가 기성의 시 문법에 고루하리만큼 충실하다는 쪽
으로 해석되었다. ‘간이’는 외부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으나 시적 대상과
의 거리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산문화되고 말았다. ‘보성 댁 출항기’는 입담이
좋았다. 그러나 입담에 산문성이 더해지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배고픈 이름’은
잘 짜였고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도 좋았다. 그러나 아귀가 딱딱 맞아가는
시상 전개가 역설적으로 시를 단순하게 만들고 말았다.
심사위원들은 ‘피어라, 숲’ 외 3편 가운데 ‘골목의 번식’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앞서 언급된 시에 비하면 불안정한 면들이 있지만, 자기 목
소리에 충실하다는 점이 계속해서 시를 써나갈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골
목’에 ‘유기’된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목격서사를 통해 이 시는 우리
시대의 골목론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시를 써나가기를 당부한다.(심사위원 : 허영자 시인 · 문신 시인)
[2020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나의 나침판/ 하미정
풀잎하고 부르면 화살표가 나옵니다 당신이라는 낭떠러지는
나를 늘 그런 곳으로 이끌어 세웁니다
잠시 방위를 빌려보기로 하자 방향에 굴하지 않고
유연하게 나아가는 선택의 길에서 나는 늘 진로를 망설였고
우리의 목표는 정말 높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후 3시가 목표라면 그 안을 보는 일에
그는 늘 바깥 방향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한번은 밀어내고 한번은 끌어당긴다
자성 강한 잡념들도 나의 몸이 끌어당긴다
누군가를 밀어내면서 누군가의 어둠을 끌어안는다
어둠의 강한 자성에 내 방은 결국 자력을 잃었고
나는 그의 자기장에서 일 년을 붙어살았다
기울어진 힘점이 있다
나는 하루에 한번 넘어지며 균형을 잃는다
힘점에서 나를 빼냈다 공평함이 사라졌다
힘점에서 기울어진다는 건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
복잡한 머리를 용서하면
나의 좌표는 간결해 질 수 있다
여행은 마음의 풍경을 향해 가는 것
저녁의 산책이 걸음을 이해 할 때
나침판은 내 가슴에 와 박힌다
[심사평] 내면 진술하면서 객관화 신진으로서 패기 엿보여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1천여 편의 시를 읽어가면서 독자를 사로잡는 시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기존 시의 발상과 소재를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어디서 읽은 발상과 소재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신진시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또 하나 주목되는 현상은 내면의식을 서사화 하는 산문적 경향이다.
최근 유행을 따라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적확한 형식인지 찬찬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어를 끌고 가는 힘이 부쳐 호흡이 끊기거나 상상력이 빚어내는 언어의 탄력성을 갖춘 작품이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미정의 ‘나의 나침판’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내면을 진술하면서도 객관화 하는 힘이 주목됐으며, 언어가 수사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과감하게 펼치는 점이 신진으로서 패기를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작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도 있었다. 한 작품은 언어가 정확하면서도 탄력적인 것이 돋보였으나 마무리가 조금 아쉬웠으며 신진다운 패기가 더 있었으면 싶었다. 또 다른 작품은 발상의 재미가 있었고 언어를 끌고 가는 힘이 상당했으나 가끔 수사가 우세해 상이 흐려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당선작을 포함한 이들 작품들은 모두가 감수성과 더불어 시를 써온 내력이 적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래의 시인으로서 능력을 갖추었다 할 만했다. 다만 꾸준히 시를 쓰다보면 시적 대상의 확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다 폭넓은 확장을 기대해 본다.(노철 전남대 교수)
2020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 선혜경
-그런 걸 뭐하러 세어두고 있겠어,
-당신은 꿈에서도 폭우가 내린다는 사실을 모르나봐요, 창틀을 베고 누운 당신도 닫힌 서랍보다
늦게 눅눅해지는데
-궁금해
-그런 날의 당신은
-그림자 대신 검은 석유를 품고 다녔는지
-그런 날의 빗방울에게서
-풍경의 심장이 뚝뚝 떨어져 나갈 때
-벌려둔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는지
-새벽의 혀를 길게 베어 문 촛불처럼
-가장 빨리 죽는 건 악몽이라 믿으며
-밤새 얼얼하게 녹아내리는 것들은 모두
-내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를
-품,
-이라 발음하면
-옅어진 등불에 팔다리가 생겼는지
-촛농이 굳어버린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며
-빛에 익사하길 바랐다
-상처투성이의 손금을 털어내려고
-손바닥을 자꾸만 흔들어도
-온통 웅덩이였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여기저기 그리고 다녔다
심사평 : 지나칠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의 미학
최종적으로 살펴본 작품은 ‘보성댁 출항기’, ‘스타킹을 신고’, ‘등뼈 해장국’,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양귀비와 사귀다’, ‘아버지의 창고’ 등의 원고를 보낸 여섯 분의 작품
이었다. 금년 신춘문예 투고 작품들은 이미지를 위주로 한 작품보다는 말하기 방식에 기댄 작품
이 많았다.
‘보성댁 출항기’를 쓴 이는 시 쓰는 솜씨가 안정되어 있으나, 자기만의 어법이 없다. ‘스타킹을
신고’의 투고자는 ‘현재의 기억은 늘 과거의 기억에 불친절 해’ 같은 구절이 빛나지만, 몇 군데
시상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은 점이 걸린다. ‘등뼈해장국’의 경우에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솜씨
가 좋으나, 상상력에 새로움이 없다.
시는 모범 답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모든 답지를 지우고 난 후에 새로 쓴 한 줄의 고민
속에 있다. ‘양귀비와 사귀다’의 투고자는 구어체 활용 능력이 뛰어나고, 시상을 낯설게 전개하
는 솜씨는 좋으나, 작위적 수사가 많다.
‘아버지의 창고’를 투고한 이는 사투리를 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러나 시는 일상에서 주고받
는 말을 그대로 옮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고민 끝에 ‘빗방울은 몇 겹의 하늘을 깨고 달아나는지’ 외 2편을 투고한 선혜경의 작품을 당선작
으로 뽑는다.
선씨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읽으면 시어의 의미가 선명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 점이 씨의 약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골똘함, 명랑한 머뭇거림이 있다.
속도 위주의 세상에 이런 느림 하나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씨의 손을 들어준다.
(심사위원 : 이대흠 시인)
2020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키, 키, 키,/한병인
키는 어딘가의 구멍에 꽂힌 채로 계단 하나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있을 것이고
키는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구멍 하나의 길이로 밖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오늘이라는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상상한다
새의 감정은 한사코 키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구멍을 물고 있는 저 키의 속성이 새
의 부리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키와 새의 부리가 키, 키, 키, 웃음을 만들어낸다 서
로 너무 꽉 맞아 떨어지는 속내를 키는 키 만큼의 길이로 유희하고 전유하는 까닭이다 쪼는
저들의 관성에서 부리는 점 점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러나 언제고 다시 풀리는 키와 구
멍들, 키를 닮은 수많은 부리들이 구멍을 통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환상에 갇힌다 허공 어디쯤
에서 키, 키, 키, 잠시 웃음을 만들어 낼 때에도 웃음이 울음에서 왔다는 소리의 의혹을 키,
키, 키,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키들은 단단한 부리를 부비며 한껏 오므려 보이
는 것이다 오늘은 너무 뾰족하게 발음되는 키의 모양새를 제외하면 키, 키, 키, 웃음 몇 개는
여전히 내일에 남겨질 것이고, 키, 키, 키, 더 완벽한 웃음을 위하여 계단을 오를 것이고, 이제
는 키, 키, 키, 울음에도 섞이고 키, 키, 키, 조금은 숨죽이다가 키, 키, 키, 낮게 흥얼거리다가
키, 키, 키, 울먹이다가 키, 키, 키, 소리 지르다가... 드디어는
키,
키,
키,
더 깊은 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다
심사평:사유·다양한 시적 구사 위한 궁리 돋보여
1000여 편의 엄청난 응모작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임효빈의 ‘나는 언제나
파혼한다’, 김정아의 ‘미라처럼’, 한병인의 ‘키, 키, 키,’ 등 세 편이었다.
‘나는 언제나 파혼한다’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을 본 것처럼 ‘빠져드는 시’
였다. 익숙한 세계와 시어를 다루지만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일테면 나뭇가
지에서 다른 나뭇가지 끝으로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듯한 시 쓰기가 예쁜
파문을 연속적으로 일으켰다. 어떤 면에선 나무랄 데 없는 시였지만 마찰이나
거슬림이 끼어들 여지가 적어서 주저되었다.
‘미라처럼’은 마른 멸치를 통해 자유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을 겹쳐놓고 거기서
멸치 머리와 배를 따듯이 마지막까지 내줘야 하는 것들을 분해해 내는 솜씨는
분명 큰 덕성이지만, 시가 어떻게 끝날지 훤히 알 수 있다는 점이 아쉬었다.
고민 끝에 ‘키, 키, 키,’를 당선작으로 민 이유는 앞의 두 시편보다 철이 덜 든
언어의 맛, 그리고 사유와 다양한 시적 구사를 적용해 보려는 궁리가 투고된
전체 시 가운데 가장 돋보인 때문이다. 특히 몇 줄쯤 없어도 좋을 느슨해진 뒷
부분의 동어반복이 자꾸 마음에 쓰였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시적인 촉수가 민
감하다는 것을 믿었다.
키는 키 너머에서 무언가를 발생시키기 위해 공을 들인다. 키는 “구멍에 꽂힌
채로” 몸을 한 번 바꾼 다음 “오늘의 높이에 매달려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된다. 이제 하나이면서 둘인 ‘키’는 비웃음 같은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 “더 높은 구멍으로 향하고”, 그리고 “환상에 갇힌다”. 그러나 종국에는 “더 깊
은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야만 한다. 그런 나락이 음울하지 않고 경직되어 있
지 않은 점이 그의 시의 장점이다.
키는 매달려 있지만 일이 있고, 새의 부리는 다물리고 아프지만, 날개가 있다
. 인생은 고달프고 몸은 무겁지만 너와 나, 혹은 두 세계를 잇는 통로라 할 법
한 ‘흥얼거림’이나 ‘울먹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가 그런 흥얼거림
이나 울먹임으로 살짝살짝 날개를 들어올리며 공중으로 나아가는 그런 시였으
면 좋겠다.
누군가 좋은 시가 아닌데 좋은 시처럼 보이려는 것을 독자는 제일 싫어한다라
는 말을 했다. 한병인씨를 시단에 내보내면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좋은 시인
이라는 것이 확인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선자(選者)의 기도와도 같다. 당
선을 축하드린다.
한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열세 살 어린이 김한희가 응모한 사실이다. 그
시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했다. 무럭무럭 크고 점점 나아질 것이니 많이 읽
고 많이 쓰기를 부탁한다.(심사위원 : 황학주 시인)
2020,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머지 인간/김범남
허름한 옷 입고 재즈만 듣는다. 사랑의 원가에 애착의 비용을 들인다. 가끔 일상은 사람을 멀어지게 만든다.
거리와 집착의 변수에 비례해 망각된다.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으로 허덕거린다.
나머지도 인간이다.
이틀간 잠만 잔다. 수면 부족과 의욕상실증이 만든 침착함이다. 잉여가 없는 느린 속도를 즐긴다. 기억은 꿈을 만들고, 우연은 희망이 된다. 액세서리 지식을 걸치고 동굴로 들어간다. 틈을 타고 빛이 침투한다.
방관자도 나머지 일부다.
역방향과 정방향, 선택을 종용한다. 기울어진 생각으로 방향을 찾는다. 모순이다. 모서리와 모퉁이도 나머지다. 일부가 모여 전부가 된다. 구석을 찾을수록 신경은 예민해진다. 평면의 날카로움이 보인다.
남는 인간이 나머지다.
남은 인간도
나머지다.
김범남 △1973년광주출생△조선대경영학과 △현 ㈜더펜 콘텐츠창작소 이사
<심사평>:시를 읽는 사유의 맛…시인 역량 가늠하기 충분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었을까요. 간절함이란 상자를 설렘으로 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읽으면서 먼저 심사기준에 못 미치는 시를 상자에서 덜어내었습니다. 억지로 쓴 시, 형식만 시인 시, 엄살과 과장이 넘치는 시, 시적 자유란 이름으로 비문을 마구 늘어놓은 시, 밋밋한 문장을 행만 갈라놓은 시 등이 먼저 상자를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나머지 인간 외 4편과 지리산 편지 외 3편이 남았습니다. 다시 몇 편을 더 뽑았지만, 또 두 편 만 남아서 우열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당선돼도 영광스러운 제1회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겨루다가 선에서 밀려난 작가의 작품은 삶을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읽어내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문장을 명랑하게 다루면서도 의미의 벼릿줄을 놓치지 않는 시였습니다. 그런데 왠지 오십 년 이전의 어느 농촌 마을을 거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춘문예 응모가 아닌 개인 시집에 들어가면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새로운 시와 시인을 기다리는 신춘문예라서 아쉽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선작으로 뽑힌 나머지 인간 외 4편은 행간이 넓고 의미가 깊게 압축된 시였습니다. 언뜻 보면 불친절하지만, 촘촘한 의미의 집을 열고 들어가면 시를 읽는 사유의 맛을 한층 느낄 수 있는 시들이었습니다. 각 연과 행이 직조한 복층 구조는 시인의 역량을 가늠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공감과 감동이라는 보편적 예술 가치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나 혼자만의 어깨 울음에서 모두의 어깨춤으로 나아가는 시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선에서 밀려난 분들에게는 곧 더 좋은 일이 당도하리라 믿습니다. 거듭 당선을 축하드립니다.(이정록)
2020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순환선/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 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이도훈(본명 이양훈)
1971년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온새미로 동인. 시마(詩魔) 발행인
심사평: 열차 순환선에 숨 멎은 도시인의 삶
본선에 올라온 작품들은 합당한 길이에 반해 너무 긴 것들이 많았다. 표현하려는 내용에 걸맞은 길이가 아니라 신춘문예를 의식해서인지 길게 잡아 늘려 집중력과 긴장감이 떨어지곤 했다. 이는 오래 하는 지루한 얘기나 수다처럼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시는 꼭 짧거나 길어야 하는 게 아니라, 몸에 맞는 옷처럼 생각과 말이 하나의 틀 속에 잘 어우러져야 한다.
최종심에 오른 '섶섬이 보이는 풍경'(김영욱)은 상당 부분 사물을 의인화함으로써 대상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는 있으나, 길게 이어지는 묘사가 어떤 울림으로 연결되지 못해 아쉬웠다. 또 이런 묘사 방법은 이즈음 많이 차용되는 것이어서 새로움이 덜했다.
'로제트 식물'(노수옥)은 무리 없는 상상력의 전개와 시를 이끌어나가는 여유로움이 믿음을 주게 하나, 대상과 화자의 균형이 깨어져 이질감을 보였다. 같은 이의 '시침, 뚝'은 절제된 시각으로 매력 있는 언어 구사를 하고 있는 반면 시인의 의도가 잘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노래를 잘 해요'(김미경)는 4·3의 아픈 가족사를 긴 서사의 담화체로 생기 있게 노래하고 있지만 노래가 너무 길다. 그 노래를 다 들으려면 힘이 빠질 것 같다. 1~6번까지 붙인 것을 2개 정도로 줄이고 좀 더 다듬었다면 당선작과 겨뤘을 것이다. 노안이 시작되는 나이의 슬픔을 여러 상상의 빛깔로 수놓은 '돌, 어슴프레한'도 일정한 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도훈의 시들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외피 안에 잘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옷 입은 이와 그의 옷이 썩 어울리는 것이다. 선자들이 당선작으로 합의한 '순환선'에서는 숨 멎은 한 도시인의 삶이 열차의 순환선에 비유되고, 그것은 마침내 읽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반복적 삶을 각성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적절한 언어를 배치하는 역량이 그의 다른 시들에 고루 나타나 있는 점도 그를 당선자로 정한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힘들지만 행복한 시의 길에 들어서려는 분들에게 축하와 위로의 악수를 건넨다. 머지않아 시의 순환선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김병택(시인. 평론가) 나기철(시인)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객공(客工)/한영미
재봉틀 소리가 창신동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담장이 막다른 대문을 맞춰 다리면
원단 묶음 실은 오토바이가 주름을 잡았다
스팀다리미 수증기 속으로
희망도 샘플이 되던 겨울
어린 객공은 노루발을 구르다 손끝에 한 점
핏방울을 틔우곤 했다 짧은 비명이
짓무른 패턴에 스미면,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었다
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붕대처럼 동여맨 구름
자수(刺繡)의 밤하늘은 그녀의 눈물을 진열한 쇼핑센터가 아닐까
화려하게 화려하게
너무나 눈이 부셔서
쪽가위처럼 날카로운 바람에
이따금 실밥처럼 잘려나가는 유성을 보았다
한영미
서울 출생. 2019년 시산맥 신인 시문학상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절망의 그늘에 햇살 녹아드는 모습도 포착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전국에서 응모된 편수가 천 편을 넘었다. 시집은 팔리지 않는데,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씁쓸하다.
예심 본심을 거쳐 세 사람의 시가 결심에 올라왔다. 정옥희 님의 ‘아버지의 의족’ 외 2편, 전진욱 님의 ‘빗살무늬 고3’ 외 2편, 한영미 님의 ‘객공’ 외 3편이다.
정옥희 님의 ‘아버지의 의족’은 불편한 몸으로 가족들을 위해서 당당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담담히 써 내려간 수작이었다. 걸리는 부분은 다른 2편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연결어미의 사용을 자제했으면 좋았다.
전진욱 님의 ‘빗살무늬 고3’은 선 자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재기 넘치는 시였다. ‘블루계열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은 딸’이며, ‘빗살무늬는 참 솔직한 것 같아/알잖아, 애써 단속해도 시험만 보면/그 무늬, 지천으로 나댄다는 거’ 같은 표현.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불필요한 감정을 쏟아내고 말았다.
한영미 님의 ‘객공’ 외 3편은 고른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신뢰가 갔다. 어린 객공의 작업을 떠올리며, 엉킨 실은 부풀어 오른 손가락 감고/밤하늘 별자리를 이었다/이제 그 슬픔도 완제품이다. 기시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대한 객관적 거리에서 차분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좋았다.
굳이 주문한다면, 절망의 그늘에 햇살 녹아드는 모습도 포착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응모해 주신 모든 분께는 문운을 빈다.(대표집필 김성주 시인)
[2020 뉴스N제주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
-실상사 약사전/황세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단 얘기 탓인지
불상의 양 손이 시커멓게 닳았다
누가 오나, 주윌 살피던 누군가
더듬었을 두 손에 목탁소리 이고 온
햇살이 올라서는데, 가만 곁을 살피니
사하라, 사나운 모래바람 앞인 듯
게슴츠레 뜬 저 두 눈!
피부 곳곳 긁히고 멍이 든 흔적!
혹시 그는 지금 공중에 앉아
부동으로 각 처를 돌아다니는 중이신가
하늘 안방에 들앉은 태양처럼
칩거로 전국을 유람했을 법한
저 약사불!
그의 말씀이었을까
마사하면* 소원이 이뤄진단 얘기!
세간을 풍문으로 떠돌다 모른 척
가부좌 틀고 앉은 이 철제여래속설에
흑심의 손바닥이 얹힌다
문득 북적대는 소리, 솟을꽃살문 틈을 보니
앞마당 석탑 앞 합장과 탑돌이 기와불사들
땡볕이 슬며시 두드리자 살갗문 열고 나와 뻘뻘
흐르던 불심佛心의 물주머니에 담기는 그들
정신을 다시 방에 들여놓으니
시커멓게 닳은 내 손을 불상이 쓰다듬고 있다
게슴츠레한 눈, 결가부좌로
허공에 올라앉은
내 양손을
*손으로 주물러 어루만진다. 또는 손으로 문지르다.
황세아(본명 황재윤) 1980년 경남 마산 출생. 현 서울 거주. 경주대학교 졸업
[심사평] 비유로 무장된 탁월한 시상
이번 신춘문예는 ‘뉴스N제주’라는 신문사와 ‘시를사랑하는사람들 전국모임’과 ‘한국디카시연구소’라는 전국적인 단체가 ‘공동주최’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타의 신춘문예와는 차별성이 있었다.
시 부문만 1113명이 3507편을 응모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응모작을 확인하기도 했다. 결론은 주최 측의 열정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응모자들이 메이저급이 아닌 소위 말해서 하향 지원을 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성을 이유로 너무 난해하게 쓴 것은 제외 했다는 운영위원장의 귀띔에서 시가 요구하는 근본 방향을 잘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신달자 시인과 허형만 시인, 필자는 이 작품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을 응모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예심을 통과한 52편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작품은 각기 우수한 작품이었다.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황세아)와 <숨바꼭질>(신계옥)이 그것이었다. <숨바꼭질>은 잃어버린 엄마와 그 이후의 아버지 시간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어쩌면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앞뒤 구도는 서로 다르다.
엄마를 잃어버린 시간에는 슬픔을 숨기기 위해 허둥거리기도 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혀끝에 놓이기도 하면서 그 공간에는 아버지의 서툰 앞치마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비 한 쌍 해후의 기쁨으로 하늘은 날아오르고 양위분은 목관에 나란히 눕게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술래의 자리! 나비의 해후, 별것 아닌 구도로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는 불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부처의 영험에 대한 작품이다. 너무나 사람들이 불상의 두 손을 만져서 반질반질 닳았다는 이야기다. 부처로 들어가서 시인은 부처도 사찰에 있는 부처가 아니라 열사의 사막 사나운 바람 쓸고 지나가고 피부가 긁히고 멍이 든 상태의 지극한 통고의 부처로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침거로 전국을 유람하는 저 약사불이요 공중에 앉아 부동으로 돌아다니는, 또는 가부좌 틀고 앉은 변화무쌍의 부처이다. 시는 마지막 연에서 어느 순간 시커멓게 닳은 내 손을 불상이 쓰다듬고 있다는 반전의 극이다. 이미지와 비유가 더할 수 없이 정교하고 기초가 단단한 교과서적이므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고할만하다.
이 시인은 이 점에서 신인이 신인을 벗어나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 선자들은 그런 점에서 <숨바꼭질> 쪽에서 눈길을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로 이동하여 들여다보며 당선의 손을 잡아주었다. <숨바꼭질>의 시인도 분발하며 차기를 위해 준비해 주었으면 한다.
본심위원 신달자, 강희근(글), 허형만
예심위원 윤석산, 이어산, 현달환, 장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