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부산을 점령했다
거리가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도시가 이럴 수는 없다. 도시는 활기차야 하고 에너지가 폭발하듯 기운이 넘쳐흘러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한산하고 숨죽이듯 고요하다. 길거리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그 많던 자동차의 행렬도 멈췄선 듯하다. 도시가 패닉에 빠진 것일까. 「코로나19」의 공습이 있었다. 수도권에서 준동음(蠢動音)이 들리더니 대구를 경유하여 드디어 부산에 기착한 모양이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일지 알 수도 없다. 출생 시 이름은 「우한 폐렴 바이러스 감염증」이라고 했다. 「우한(武漢)」은 중국 도시 이름인데, 갑자기 우한(武漢)이 왜 유명해졌을까? 우한(武漢)이 함부로 자기 이름을 쓰지 말라며 발끈하니 순식간에 개명(改名)을 하고 「코로나19」라는 괴질의 본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지금 「코로나19」는 세계로 뻗어나가 각국의 요지에 웅거(雄據)하여 쉽게 자리를 내어줄 것 같지 않다. 그따위 것에는 관심없다.(우리나라는 24일 현재 감염자 수가 8백 명을 넘어섰다)
발등에 불 떨어진 격으로 내가 사는 곳에 그놈이 숨어들어와 활개를 치는 그게 나는 은근히 두렵다.
해운대의 좌장 거리 센텀마리나 도로(海雲臺路)에 사람과 자동차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별히 어제는 지인이 막내딸을 짝지어주는 날이라 해서 꼭 하객으로 참석하여야만 했었다. 삶의 환경이 먹구름으로 가득한 날이지만 외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더랬다.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웬걸, 거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뿐만이면 또 모르겠다. 평소엔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던 자동차의 행렬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주말을 기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확진된 환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은 물론 감염지가 전국으로 흩어져 있음에 경악할 일이었다. 23일 저녁을 기해 감염자의 수가 폭증했다는 뉴스가 방송을 탔고 그것이 빌미라도 된 듯 정부는 감염병 위기 경보를 최고 수위인 ‘심각’ 단계로 상향 조정하였다. 위기 경보가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상향되면 무엇이 달라지는 게 있나. 앞으로의 방역대책은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국무총리의 지휘하로 들어가며, 정부 각 부처는 「코로나19」와 관련된 업무를 강력하게 집행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예컨대 교육부는 휴업명령권을 발동하여 초중고교의 개학을 일주일 연기케 했으며, 감염원 차단이나 피해의 완화를 강구케 될 터였다. 전국 단위 개학 연기는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대중교통 운행과 관련해서는 아직은 변함없이 종전대로 시행되고 있지만 감염지가 확산되면 보다 엄격하고 강제적인 운행정지 등도 검토되고 있음을 비췄다. 아마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하철 벡스코역 승강장에 사람의 모습이 귀하다. 열차 안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적었다.
지하철 승강장에도 사람의 모습이 귀했다. 지하철 안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누가 다 먹었을까?)” 모두들 집안에 웅크리고 앉아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느라 외출을 삼가서 그럴 터였다. 나는 문득 사람들이 삶에 너무 집착하는구나 싶었다. 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조짐으로 알아챘다. 그건 욕심이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결국 그 잘못된 욕심과 선택으로 인하여 오히려 불의의 재난에 빠져들 수가 있다. 세상에는 삶에 합당한 태도를 지니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가급적이면 삶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하여 하늘이 선택적으로 사람들에게 선악을 베푸느냐 하면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천벌을 받아 죽어 마땅할 사람은 부드럽게 살아남는가 하면 애석하게 너무 아까운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걸 지주 보게 된다. 하늘은 정의를 실현하는 분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데 그건 착각이고 무지에서 오는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지 말라. 하늘은 오로지 섭리(攝理)를 다스릴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외출을 감행하였다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는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서길 싫어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참 편리한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하기야 당국에서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는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빠질 수 없는 자리에는 참석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고, 그래서 바깥나들이를 할 요량이라면 가능한 대로 안전한 방식을 택해 외출하는 것이 나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장소에서 마스크를 하지 않고 있다든지, 기침이 난다고 아무 거리낌 없이 기침을 앞으로 쏟아내는 사람을 보면 어찌 무식해도 저렇게 무식한 사람일까 속으로 핀잔을 주게 되는 경우와 맞딱뜨린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 옆에는 사실 가까이하기가 싫은 법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욕심으로 가득차 있고 자기의 몫은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고 눈을 부라리며 사는 사람과 섞여 살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예식장은 어떤 법칙이 적용되고 있을까. 사실 은근히 관심이 갔으며 궁금도 했었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니 생각 이상으로 많은 손님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혼주 역시도 마스크를 낀 채 하객들을 맞고 있었다. 이처럼 진기한 결혼식장 풍경은 처음 보았다. 「코로나19」가 비록 일시적이겠지만 우리의 사는 모습을 그렇게 바꿔놓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혼식장에는 혼주는 물론 하객 모두가 마스크를 낀채 악수하고 덕담들을 나누고 있었다.
예식장을 나와서는 서면으로 갔다. 아내가 엊그제부터 편도선이 엄청 부어올라 고통스러워하기에 병원약을 복용하면서도 부작용이 따르지 않는 보조제를 사기 위해서였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구강질환에는 “프로폴리스”만 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젊은 날 나도 자주 편도선염을 앓았었는데 선물로 받은 프로폴리스를 구강에 뿌렸더니 아주 좋은 결과를 경험했던 것이다. 때가 때니만치 아내는 내심 크게 불안해하는 모습이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착안한 끝에 프로폴리스가 도움이 될 것 같이 여겨졌었다. 약품이 아니고 건강식품으로 분류되는 제품이라 큰 부작용 같은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아무튼 사용결과가 좋았으면 싶은 심정이다. 늙어보니 사람 소중한 걸 알겠고, 어쨌든 한평생을 반려로 살아온 처지가 아닌가. 이런 때는 잘난 자식보다도 못난 아내가 그래도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고 소중한 존재이다. 젊었을 때의 미모는 가신 데를 모를 정도이나 이제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도 평생을 헌신하며 살아온 황혼이 그렇게 찬란하며 값질 수가 없어 내 마음이 따뜻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녁의 거리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적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