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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녀암은 오르 내림이 까탈스럽지만 침니등반 기술을 익힌다면 수월하게 오를수 있다.
지금 설치된 로프가 많이 낡아서 로프를 가져가는게 좋고 자신이 없다면 안올라가는게 신상에 좋을것이다.
▼ 바로 옆쪽 신열암(13:57)
▼ 의론대에서 바라본 미타봉(14:01)
▼ 독녀암 방향
議論臺(의논대)_김종직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 김종직의 議論臺(의논대) 詩에 나오는 소림 선방에 대하여
미타봉(1164.9m) 뒤 송대 마을 쪽에 석굴이 있는데, 석실 내부에 바닥을 평탄(平坦)하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그리고 상 허리길이 고열암에서 미타봉으로 연결이 되는데, 삼열암의 승려들이 이 길로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의 지명은 암자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화암, 환희대, 의논대, 향로봉, 미타봉, 소림 선방 등 모두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환희대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10地) 중 첫 번째를 말한다.
☞ 환희지(歡喜地) :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 중 10지의 중 첫 번째를 말함.
그렇다면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나오는 '소림 선방'은 어디인가? 그동안 막연하게 '바위 사이 한 곳'을 미타봉으로 생각지만, 이번에 직접 석굴 내부로 들아가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조망 바위에 올라가니, 의논대와 고열암이 코 앞에 들어왔다. 또한 암봉 서너 곳에 일부 남아있는 석축은 수행하는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담장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타봉은 마미타불의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미타봉의 석실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胡僧(참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소림 선방'의 시어로 나타나 있다. '소림 선방'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 수행을 했다는 소림굴(小林窟)을 말한다. 미타봉은 아미타불의 형상으로 붙여진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인도 꿋꿋따빠따기리(계족산)에 있는 가섭이 부처님 가사를 가지고 들어가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리며 선정에 들어간 석굴을, 영신봉(계족봉)의 가섭대에 옮겨다 놓은 것처럼, 달마 대사가 면벽수행했다는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소림굴(小林窟)을 지리산 미타봉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송대에 사는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미타봉 아래에 인공으로 조성된 석축과 자연 동굴이 여러 개 있다고 한다.
<출처: 도솔산 연소재>
*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 :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산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의어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출처 : 다음 백과
▼ 창암산 방향
▼ 고열암에서 발견한 국화문양 청자
宿古涅庵(숙고열암)_김종직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 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 일강(一岡)길을 따라
▼ 중간에 경치 좋은곳에 휴게소로 사용 했을 법한 넓은 터가 있다
▼ 미타샘을 표시한 케른
▼ 아랫쪽으로 이어진 케른
▼ 물맛 좋은 미타샘
▼ 일강길 날머리 달마바위
▼ 미타봉 정상으로 가는 길
▼ 미타봉 정상에 올라(15:14)
▼ 소림선방을 지나
▼ 뒷쪽 전망대에 올랐다
▼ 구롱길을 한눈에 조망할수있는 곳
▼ 벽송사 능선을 따라
▼ 벽송사능선 장구목에서 두류암 북쪽대가 있는 좌측으로 내려선다(16:37)
頭流庵(두류암)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1. 1580년 변사정(邊士貞)의 유두류록
[원문]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 4月 初七日, 아침에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晨朝促喫. 過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 四月 初八日.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2. 1611년 유몽인(柳夢寅)의 두류산록
[원문]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 4월 3일,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頭流菴 贈慧日 兼示修師 - 柳夢寅
(두류암 혜일에게 주고 아울러 수선사에게 보여주다.)
先賢曾訪頭流境 路由義呑村之南 :
현들이 두류산 선경을 찾아 나섰으니/ 길은 의탄촌 남쪽을 경유하였지
我今尋眞入頭流 偶然一宿頭流菴 :
내 이제 진경을 찾아 두류산에 들어와서/ 우연히 하룻밤을 두류암에 묵었네
頭流菴在義呑上 我行適與先賢同 :
두류암은 의탄 마을 위쪽에 있으니/ 내 산행이 마침 선현들의 유람 길과 같네
[출처 : 지리산유람 기행시 1권]
3. 1867년 김영조(金永祚)의 유두류록
원문]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 8월 26일~29일,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장구목)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1박)-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4. 1871년 배찬(裴瓚)의 유두류록
[원문] 須臾四山忽黑海風. 甚冷凜乎. 其不可乆留也. 因促行還到馬巖幕. 從者先詣. 朝飯已熟矣. 飯後. 遂直下頭流菴. 小憇. 至五峯村後麓. 村人員簞食壺漿而來. 一行皆頼此免飢. 侯命給其價而謝之.
○ 1871年 9月 初7日 (하산길),조금 있으니 사방 산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해풍이 매우 차가워서 떨려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오봉리 독가]에 이르렀는데, 마을 사람이 밥과 음료수를 지고 와서 일행은 모두 이로 인해 갈증과 배고픔을 면하였다. 수령이 값을 쳐주어 사례하게 하였다.
[화림암-오봉리-사립재-쑥밭재-청이당(천녀당)-마암산막(1박)-중봉-천왕봉(2박)-마암산막(조반)-두류암-사립재-폐독가(늦은중식)-화림암]
5. 1922년 권도용(權道溶)의 방장산부(方丈山賦)
[원문] 惟禪應之指路 幾俗臘之古稀 得般若之道力 倏登陟而如飛 憩氷峙徐進 得盤陀之石磯 出二派而匯合 成 自然之淸潿 蒼藤古木湲依依 山禽效吟樵歌忘機 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 太守請余而錫名 名之曰三乂巖 溪壑荵蒨於耳 郭峯巒糾紛於眼簾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 則曰金剛門 亦禪師之權辭以拈眡
○ 4월 기망(旣望 *16일) [벽송사 출발],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 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출처 지리99 글쓴이 이재구 선생]
☞ 권도용(1878-1959)은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
6.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
[원문] 頭流庵. 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幽閑.今無.(천령지130)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두류암은)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
☞ 정수민(鄭秀民)이 천령지(天嶺誌)를 편찬한 시기(1656년)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가 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한 시점(1888년)에 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행 시점(1888년)에는 이미 두류암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이다.
* 참고자료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
<출처:도솔산연소재>
▼ 두류암 북쪽대에 올라서면 허공달골 계곡이 보인다(16:52)
▼ 창암산 방향
▼ 올려다 본 북쪽대
▼ 절구질하는 폭포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 물소리는 푸른 대숲을 통해서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폭포는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 두류암 추정지로 주소는 추성리93번지
트랙: 김종직 1구간 2020-10-03 093422(웨이포인터).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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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 설명과 오룩스맵을 함께 하니
그 길을 같이 걸은 듯하여 좋습니다.
어플을 사용해 산속에서도
지적도를 볼수 있어서
인문산행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꼭 활용해보세요
나두 욜케 올라보고 잡네요
ㅎㅎ
충분히 갈수 있겠죠~
좋은 곳 잘보고 간다
지리산 인문산행이 새로운 장르가 되길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