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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평화기행(2025.1.18~1.21)
‘시민모임 독립’에서 주관한 일본 오키나와 평화기행에 다녀왔다.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가 원래 아이누족이 살던 땅인데 7세기~11세기 일본에 완전히 복속된 것처럼 오키나와는 류큐 왕국이었다가 17~8세기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 땅이 된 일본의 최남단 열도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작년 11월 말 오키나와 기행에 참여키로 한 후 한 번의 사전교육과 주최 측에서 권유한 두 권의 오키나와 관련 책을 읽고 나서야 오키나와 현대사와 1945년 3월 말부터 6월 23일까지 벌어진 오키나와 전쟁과 이후 1972년까지의 미군정. 그리고 미군기지를 둘러싸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오키나와 민중들의 고단한 투쟁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3박 4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70여년간 전쟁을 끝내지 못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기록으로 남긴다.
류큐(琉球) 왕국은 중국과 조공무역이 활발했으며 일본, 조선,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중개무역을 하는 독립된 왕국이었으나 1609년 일본 사츠마(薩摩藩)번의 침략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도 중국과의 관계는 인정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류큐번이 설치(1872년)됐고, 청나라 쇠퇴기인 1879년 오키나와(沖縄)현(폐번치현)으로 완전히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말 미군 지상전 병력 18만 명(후방지원 포함 54만 명)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여 일본군 10만 명(이중 1/3은 오키나와 징집 보조병력)과 지상전이 벌어진 83일간 20만 656명이 사망했다[일본 188,136명(군인·군속 94,136명, 민간인 94,000명), 미군 12,520명]. 그중에는 한반도에서 온 군 노동자나 일본군 위안부도 1만여명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의 패배가 자명했지만 오키나와는 본토를 지키기 위한 사석으로 활용돼 이른바 ‘국체호지’를 위해 주민을 전쟁에 끌어들여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1월 18일 오후 우리를 태운 버스가 오키나와 나하(那覇) 공항 주차장을 벗어나자마자 도로 양편에 늘어선 철조망을 볼 수 있었다, 왼쪽은 미군 부대 오른쪽은 자위대 주둔지다. 나하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처음 방문한 곳은 나하에서 북동쪽으로 10km쯤 떨어진 기노완(宜野湾)시 가카즈다카다이(嘉數高台)공원이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투(미군이 게라마 제도에 상륙한 1945.3.26~항복문서에 조인한 9.7까지) 당시 일본군이 많은 진지를 구축한 곳으로 미일 양군이 최초로 충돌한 ‘가카즈전투’가 벌어진 격전지 중 하나였다. 이곳 진지에서 한반도 출신도 400여명 사망했다고 한다. 공원전망대에서는 미군이 상륙했던 가데나만 요미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약 1km 떨어진 미군해병대 비행장인 ‘후텐마 기지’도 내려다볼 수 있었다. 3일간 우리를 안내했던 다카하시 도시오(高橋年男) 오키나와·한국 민중연대 사무국장이 전망대에서 커다란 현황판을 들고 후텐마 기지에 관해 설명했다. 1945년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인 건설한 후텐마 기지는 기노완(宜野湾)시의 중심부에 있다. 면적은 4.8㎢로 기노완시 전체 면적의 25% 정도에 해당한다. 특히 후텐마 기지 주변은 주거 지역이 몰려있어 주민들은 사고 가능성과 소음 및 공해 등에 노출됐다. 다카하시 사무국장은 신문스크랩과 각종 자료를 들고 피해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공원에는 한반도 출신 희생자 386명을 기리는 ‘청구의 탑(靑丘之塔)’도 있다. 공원과 마을 경계쯤엔 일본군 종군위안소 터도 볼 수 있었다. 기노완시에만 위안소가 7곳 있었는데 이 마을에만 4곳이 있다.
이어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는 ‘사키마(佐喜眞)미술관’을 방문했다. 사키마 미치오 관장이 후텐마 기지였던 조상 땅을 반환받아 1994년 개관한 사키마미술관은 엄혹한 지상전의 아픔을 격은 후에도 여전히 거대한 미군기지가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컬렉션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과 전쟁’, ‘삶과 죽음’, ‘고통과 구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마루키 부부의 역작인 ‘오키나와 전의 그림’이다, 높이 4m 길이 8.5m 대작으로 오키나와 전쟁을 형상화한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참혹함과 안타까운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작품 앞에서 사키마 관장이 그림 속 이야기를 당시 상황에 맞춰 긴 시간 설명했다. 미술관 옥상에 가면 오키나와전 위령의 날인 6월 23일(일본군 사령관 자결로 전쟁이 종료된 날)을 상징하는 6개와 23개의 계단을 지나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6월 23일 일몰 석양빛이 이 구멍을 통해 비추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다음날인 19일엔 비가 추적 주적 내렸다. 오키나와 최남단 이토만(系滿)시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이곳에 있는 ‘평화의 초석’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을 추도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사망자 20여만 명의 이름을 새겼다. 사망자 신원 확인과 후손들의 동의를 얻어 이름을 새기는데 현재 한국인 이름도 381명,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이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 ‘조선’이었을 선조들의 이름이 여기서도 분단된 채로 새겨져 있음이 날씨만큼이나 구슬펐다. ‘평화의 초석’과 ‘한국인 위령탑’에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올리고 묵념한 후 공원 안 ‘오키나와현 평화기원자료관’을 둘러봤다. 1975년 처음 설립된 자료관은 1층 어린이 전시실을 지나 2층 역사체험 코너에 이르면, 오키나와 전쟁의 발발원인, 오키나와 주민 피해 상황을 입체 지도와 영상으로 전시했다, 또 주민이 겪은 참극을 지하(동굴)와 지상(죽음의 방황)을 통해 상징적으로 전시했고 오키나와전의 체험을 증언집과 영상으로 전시해 놨다. 마지막 전시실엔 전후 수용소 생활, 27년간의 미군 통치와 복귀운동, 평화를 추구하는 오키나와를 보여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원래 일정에는 없었지만 마침 식당 근처에 있는 ‘히메유리 탑’과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도 둘러봤다. ‘히메유리 학도대’는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현립 제일고등 여학교에 다니던 15세부터 19세 여학생 222명과 인솔교사 18명 등 총 240명으로 구성되어 주로 우군 병원에서 간호부로 근무했는데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입구에는 1944년 3월에 찍은 흑백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교장 선생님을 둘러싸고 해맑게 웃는 모습의 여학생들을 보며 그들이 90여 일 동안 격었을 참혹함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7~80년대 6.25 전쟁에서의 학도의용군 활약상을 담은 영화를 단체 관람한 생각이 떠올라 씁쓸했다.
이어서 ‘오키나와 육군병원 하에바루(南風原)호’와 ‘하에바루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하에바루호’는 언덕에 파놓은 방공호로 미군의 함포사격이 시작된 1945년 3월 하순부터 본섬 남부로 철수 명령이 내려진 5월 하순까지 사용된 야전 병원이다. 각 대피소에 부상병이 이송되면 군의관, 간호사, 위생병, 여학생(히메유리 학도대) 등이 치료했다. 하에바루쵸(町)는 전쟁의 참혹함을 전하기 위해 발굴·정비 작업을 거쳐 1990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여러 개의 방공호 중 20호 한 곳을 개방하고 있다. 길이 70m, 폭1.8m, 높이 1.8m의 20호 병원은 제2 외과의 중심구역에 해당하던 곳으로 환자의 병실, 수술실, 입원실, 근무자실 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수술실에서는 어두운 램프 불빛 아래 마취도 없이 수술이 진행됐는데 대부분이 상처 부위 염증 방지를 위한 수족 절단 수술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그때의 고통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좁은 공간 한편에 2층 침상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침상과 1m 남짓 공간을 통로로 사용했다고 한다. 2층 침상에 누웠던 부상병이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姜’자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조선에서 징병으로 끌려온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쓴 것으로 짐작된다. ‘하에바루 문화센터’는 우리로 치면 읍에 해당하는 쵸(町)립이다. 오키나와 전쟁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하고 ‘육군병원 하에바루호’의 내부를 모형으로 전시한 것을 보니 방금 다녀온 방공호 병원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셋째 날(1.20)은 이번 기행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바로 ‘헤노코(辺野古) 신기지 건설’ 반대 현장 방문이다. 공사장 출입구에서 주민들의 기지건설 반대 집회에 함께 참여하는 일정이다. 마침 날씨가 맑았다. 1995년 기노완시 ‘후텐마 기지’ 소속 미국 해병대원으로 인한 소녀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자 오키나와 주민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시가지에 위치해 위험한 기지인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고 나하에서 60km 북쪽에 있는 나고(名護)시 헤노코 앞바다를 메우는 신기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지역주민과 오키나와 주민은 몇 차례 선거를 통해 반대 의사를 밝혔고 신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해상투쟁, 차량 출입구 앞 농성 등 꾸준한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기지반대 운동 30년과 20년 넘게(방문 당시 7580일째) 투쟁 중인 농성 천막에 둘러 동네 여성으로부터 헤노코 기지의 부당성과 반대 운동 상황을 청취한 후 신기지 공사 게이트 매립저지 농성장으로 이동했다. 게이트 앞을 가로막은 청원 경비인력 앞에 주민들과 함께 한국에서 온 기행단 17명 전원이 간이의자를 펴고 앉았다. 한·일 시민 대표의 발언에 이어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을 불렀고 일행 중 한 분이 깜짝 이벤트로 하모니카로 아리랑도 연주했다. 우리가 집회 농성을 하는 동안 매립지로 들어갈 덤프트럭들이 길가에 늘어섰다. 3~40분 지났을 때쯤 청부 인력과 경찰이 다가와 비켜주라고 요청했고 자진해서 일어나거나 의자에 앉은 채로 들려 나갔다. 모든 농성참가자들이 게이트 앞을 비우자 대기하던 트럭들이 매립지 안으로 들어갔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백 대도 넘는 듯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9시, 12시, 15시 하루 세 번 5백 대가 들어간다고 한다. 주민들은 매립 차량 출입을 이렇게 3~40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투쟁한다고 한다. 투쟁의 성과가 꼭 있기를 기원하며 헤노코 현장을 떠났다.
오후에 방문한 곳은 태평양 전쟁 때 오키나와에 강제 징용돼 억울하게 돌아가신 조선인을 추모하기 위해 요미탄(読谷)에 세운 ‘한의 비(恨의 碑)’이다. 오키나와에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은 당시 경북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키나와 강제징용 피해자로 경북 영양 출신인 강인창 선생이 추진한 ‘한의 비’가 1999년 3월 영양에 세워지고 그로부터 7년 뒤 2006년 이곳 요미탄촌 ‘한의 비’가 세워졌다. 둘 다 긴조 미노루(金城実) 조각가 작품으로 그날 마지막 일정으로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 8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40도 안동소주를 안주 없이 마시는 유쾌 발랄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의 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치비치리 가마’가 있다. ‘가마(ガマ)’는 천연 동굴을 뜻한다. 1945년 4월 2일 요미탄촌 해안에 집결한 미군 함대를 보고 많은 지역주민이 ‘가마’에 피신했다. 미군에게 잡히면 여자는 강간당하고 모두 사지가 찢어져 죽는다는 일본군 교육에 공포심이 일어 혈육끼리 서로 죽이는 ‘집단 자결’이 일어났던 현장이다. ‘치비치리’ 동굴로 피난 온 140여 명 중 83명이 죽었다. 전후 오랫동안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다 1980~90년대에 공론화되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가마 입구 왼쪽에는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도 함께 새겨져 있다. 추모비 사진을 확대해보니 3세, 5세 유아부터 다수의 10대와 2~30대, 4~50대 60대 등 희생자 연령층이 다양하다. 전쟁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참혹한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오키나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72년 5월 15일 일본으로 복귀될 때까지 27년간 미국 군정이 실시됐고, 일본 국토의 0.6% 면적인 오키나와에 75%의 주일 미군기지가 밀집해 있다.
* 본 글은 ‘시민모임 독립’의 ‘오키나와 평화답사 자료집(미야우치 아키오, 최리아)’과 ‘오키나와 평화답사 교육 -생명은 보물이다. 오키나와 평화 저항 행동의 역사- 자료집(고유경)’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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