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촌리 신의련과 영모정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과 덕태산이 동쪽에 자리 잡고있는 노촌리는 마치천을 따라 상류쪽으로 올라가면서 원노촌, 신기, 마치 마을이 있고 원노촌 마을 남쪽에 있는 미재천을 따라서는 하미, 비사, 상미 마을이 위치한다. 산이 깊으면 물이 많다. 또 한편 은둔하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백운면의 성수산과 덕태산의 깊은 산속을 배경으로 운둔하며 살아간 선비들을 만나보자. 노촌리에는 임진왜란 때 효행으로 아버지 목숨은 물론 이곳으로 난을 피해온 피난민을 구한 선비가 있는데 그가 신의련(愼義連)이다. 그와 관련된 것이 노촌리 어귀에 자리한 신의련효자각과 그 옆 하천변에 세워진 영모정이다. 먼저 신의련이 누구인지 그의 유적비의 내용에서 만나본다. 미계 신선생의련 유적비는 광무 11년 정미년 모춘에 숭정대부 홍문관 제학 동양(東陽) 신기선(申箕善)이 찬(撰)한 것이다.
신의련의 휘는 의련이요 자는 의숙이니 진안현의 미계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대로 미계(美溪)로 호를 하였다. 본관은 거창이다. 1546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커서는 안으로는 가정교육을 받고 밖으로는 사우들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에 전력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니 소문이 멀리 퍼졌다. 임진년 난리에 열군이 함락되니 사민들이 놀라서 도망쳤으나 공은 그때 바야흐로 부모의 병을 구완하고 있었는데 적들이 졸지에 들이닥쳐 사나운 칼날이 병든 아버지를 겨냥하자 공이 몸으로 아버지를 감싸고 자신을 대신 죽여달라고 애원하니 적들이 말하기를 ‘이자는 효자이다’ 하고 성명을 물어서 종이에 적어 불 속에 던지자 불에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가니 적들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저희 패거리들에게 전하여 해치지 말라 하고 동구밖에 방을 붙여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고 그 지경을 빙 둘러 들아가지 못하게 하니 원근에서 피란하여 와서 산 이들이 모두 온전히 살아났으며 정유재란에도 또 적들이 경계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전후로 거기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거의 5만인에 가까워 그 골짜기를 오만동(五萬洞)이라고 부르고 그 들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은 덕태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평(海平) 윤상공(尹相公, 이름은 두수(斗壽))이 조정에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 가상히 여기셔 수의부위(修義副尉)의 품계를 내리고 정려를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이 사실은 명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철종 병진년(1856)에는 사림들이 충효사(忠孝祠)에 배향하였다.
신의련 효자각은 선조 때 수의부위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는데 현존하지 않고 지금의 신의련 효자각은 순조 1년(1801)에 세워진 것으로 중수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건물은 기와 팔작지붕이다. 효자각 바로 근처에 있는 영모정(永慕亭)은 미재천변의 절벽 상에 세워져 있다. 이곳을 흐르는 미재천은 동쪽에 자리한 덕태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으로 평장리를 거쳐 원운마을을 지나 섬진강 본류에 합류한다. 영모정이 자리한 계곡을 이루는 암반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 편마암으로 정자 주변의 노출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곡이 굽이 돌아가는 암반의 절벽에 자리한 영모정은 누정이 세워지는 전형적인 공간구조를 따르고 있다.
영모정은 조선 고종 때인 1869년 효자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고 그를 본받기 위해 세운 누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층 누정 건축으로 지붕은 얇은 돌조각을 기와처럼 이은 돌 너와를 사용하였다. 정자 아랫 부분 두 기둥은 거북 머리 모양의 둥근 받침돌을 사용하고 있다. 누정 남쪽 내부의 중앙에는 영모정이 아니라 영벽루(影碧樓)라 쓰여진 현판과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尹成鎭)이 지은 상량문이 걸려 있다. 이곳에 걸려 있는 영모정기는 진안문화원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별도로 소개하고 있다.
진안현치의 남쪽 20리 이른바 미계촌이 있으니 바로 미계 신선생이 태어나서 은거하신 곳이다. 시내의 근원은 덕태산에서 발원하여 오만동을 굽이도는데 시내 위에는 10여 길이나 되는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는 오두적각(烏頭赤脚, 비석은 검고 비각은 붉음)의 정려(旌閭)가 있으니 미계 선생의 효자 정려로 고금에 빛을 발하는 곳이다. 언덕의 허리에는 반반한 큰 바위가 있어 10여 인이 앉아서 놀만한데 그 위에 몇 칸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영모정(永慕亭)이다. 영모의 뜻은 대대로 선생의 자손되는 사람들이 첨앙(瞻仰)하고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오호라! 선생의 두터운 덕과 지극한 행의는 명(明)나라 조정에서 포장(褒獎)하니 그 영향이 이적(夷狄)에게까지 올라 빛나는 영총(榮寵)은 앞으로도 백세가 지난다 해도 묻혀지지 않을 것이다.
왜구의 칼날 앞에서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자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였던 신의련의 효행은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효란 무엇인지 또 부모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구일 양처사 절의비(九逸梁處士節義碑)
영모정에서 미재천을 거슬러 하미길을 타고 올라가다 하미마을 못 미쳐서 도로변 좌측에 구일 양처사 절의비를 만날 수 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30년간을 산속에서 숨어 살며 고사리 등으로 연명하고 삼이나 칡으로 몸을 가렸던 선비가 구일 양처사이다. 우리는 백이숙제(伯夷叔齊) 형제의 고사에서 수양산에 숨어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였던 이제(夷齊)의 청절을 익히 알고 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지식인들이 보여준 선비정신은 다양하였다. 특히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주창하였던 처변삼사(處變三事)16는 국란을 당했을 때 선비가 행하여야 할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구일 양기주는 근대화 시기에 운둔의 삶을 선택했던 선비였다.
공의 휘는 기주(基柱)이며 자는 재영(在英)이고 구일(九逸)은 그의 별호이다. 철종 신유년(1861) 아버지 양치한(梁致漢)과 전의인(全義人) 이영만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남다른 데 있어 아비의 병환에 나는 거위가 메기를 떨어뜨렸고, 어미의 병환에는 반딧불과 무지개가 길을 인도하기도 했다. 정성에 귀신도 감동하여 죽순과 잉어 등을 내린 것과 같다. 노사 기정진 선생에게 사사하여 칭찬과 사랑을 받았고 매천 황현과 더불어 도의에 관해 강마하였다. 문사가 해박하고 붓을 들면 문장을 이루어 여러 번 향시에는 들었으나 한번 과거시험에 응시하니 돈 냄새가 가득하여 아주 돌아와 버렸다. 시가 있는데 이르기를 ‘옛적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나아갈 때를 잘못 알았네’ 라고 하였다. 도연명집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유(己酉)년에 모상을 당하고 경술(庚戌)년에 사직이 망하자 체읍(涕泣)하고 다음 해 모상의 복을 벗고는 곧장 덕태산 비사동으로 들어가 제진론(帝秦論)을 지어 노중연(魯仲連)의 뜻을 추모하였다. 또 시를 짓기를 ‘중국이 변하여 오랑캐가 되니 내가 어디로 갈까?’ 라고 하였다. 사는 집을 이름하여 삼유장(三幽莊)이라 했으니 산도 사람도 물도 모두 그윽하다는 뜻이다. 거실에도 왜(倭)를 배척하여 남창은 막고 반드시 북을 향하고 앉았고, 달 밝고 서늘한 밤이면 출사표를 읊고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에 우주남아(宇宙男兒) 일개무(一個無)의 자구에 이르면 눈물이 쏟아져 옷깃에 가득하였다.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에는 높은 산에 올라 오열하여 목이 메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암(望巖)이라 불렀다. 30년간을 산에서 살며 고사리 등으로 연명하고 삼이나 칡으로 몸을 가렸다. 임종에 이르러 자식들을 불러 나는 근 팔십을 살았으니 죽어 여한이 없다만은 오직 한이라면 나라의 광복을 못 보고 죽는 것이다. 하고 다시 치가(治家) 보가(保家) 정가지도(正家之道)를 훈계하고 말을 마치자 운명하였다. 이때가 정축년(1937) 2월 12일이었다.
구일 양기주는 매천 황현처럼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과장의 타락상을 목도(目睹)하고 시골로 돌아왔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은둔의 삶을 택했던 양기주는 도연명의 삶을 좇으며 노중련의 선비정신과 문천상의 절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죽을 때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선비였다.
구일양처사절의비 우측에는 만휴당 양선생유허비가 있는데 만휴당(晩休堂)은 양하룡(1699〜1784, 梁夏龍)으로 구일 양기주의 선대조이다. 양하룡은 남원 죽곡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부모의 명에 의해 진사시에 나갔으나 입격하지는 못했다. 70세 이후에 이곳 노계(蘆溪)로 이거하였다. 경학에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노촌리의 깊은 산속 비상동에 은둔했던 구일 양기주는 1861년 태어나서 1937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30대 초반일 때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40대 초반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이후 을사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치열하게 항일구국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 일부 지식인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망명하기도 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학교를 세우거나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수없이 많은 독립군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근대화 시기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지식인들 중에는 시대적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솔선수범을 보이며 의로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세상일을 등지고 은둔의 삶을 선택한 선비도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선비로서의 절의를 보여준 경우도 있었다. 선비정신은 시대 상황에 따라서 그에 맞게 표출되어진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어떤 선비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노촌리 구일 양처사 절의비 앞에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출처] 전북문화살롱 통권30호(2021년 05월)-섬진강에 감도는 메아리 제1부 제룡강濟龍江에 굽이도는 이산구곡가駬山九曲歌 셋(장현근 북원태학장)|작성자 전북문화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