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이 지은 아래 시는 흔히 순흥안씨 집안의 화려한 명성을 찬양한 것이라며 잘못 인용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문 주석에도 그렇게 써 놓았다.
죽성군(竹城君)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죽산안씨나 죽산박씨 등 본관이 죽산(죽주)인 사람들에게 내리던 봉호로 순흥안씨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순흥안씨가 죽성군에 봉해진 사례도 없다. 순흥안씨가 죽계(竹溪) 안씨로 불리기도 하지만 순흥안씨 중에 죽(竹)자가 들어가는 봉호를 받은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 목은시에 나오는 죽성군(竹城君)은 공민왕비 정비 안씨(定妃 安氏, ? ~1428)의 부친 안극인(安克仁, ? ~ 1383)으로 (구)죽산안씨이다. 안극인은 우왕(禑王) 3년(1377) 정사(丁巳)년 문과의 지공거를 맡았으므로 당시의 문생 급제자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여기에 목은도 참석하였다가 시를 짓게 된 것이다.
[주] 지공거(知貢擧)는 고려시대 예부시(禮部試)라고도 하는 과거 본고시를 관장한 시관으로, 처음에 1인을 두었다가 나중에 정·부(正副) 시관을 지공거, 동지공거(同知貢擧)라고 하였다. 지공거는 좌주(座主)라고도 불리며,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여 고려시대 관료 사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다.
고려사 권73 志(지) 권제27 선거1(選擧 一) 과목 1 과거장 성석연 등이 급제하다 일자 1377년 04월 미상 (음) 〈우왕(禑王)〉 3년(1377) 4월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이 지공거(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權仲和)가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성석연(成石珚) 등 33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목은시고 제29권 / 시(詩)
죽성군(竹城君)이 문생 급제자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름을 적은 족자를 좌주(座主)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 두 분 시중(侍中)은 동쪽을 향하였고, 판삼사(判三司) 성 정당(成政堂)과 한 정당(韓政堂) 및 나는 북쪽에 있었고, 정 남경(鄭南京)과 민 밀직(閔密直)과 안 밀직(安密直)은 서쪽을 향하였고, 문생들은 동쪽 대청에 있었다. 기악(妓樂)이 교대로 울리는 가운데 연구(聯句)를 지으며 매우 즐겁게 노닐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竹城君讌門生及第。爲其呈名簇也。兩侍中東面。判三司成政堂,韓政堂及穡在北。鄭南京,閔密直,安密直西面。門生在東廳。妓樂交作。聯句樂甚。入夜而歸)
죽성의 풍도와 운치 우리 동방에 가득한데 / 竹城風韻滿東方 옥순이 또 벌여 서서 화려한 집을 비추누나 / 玉笋森森映畫堂 엄격히 선발된 청전이라 재주와 덕망이 뛰어나 / 妙選靑錢才德茂 높이 드리운 흰 비단 위에 성과 이름도 향기롭네 / 高垂白絹姓名香 동년이 거의 다 죽었으니 공도 늙은 줄 알고말고 / 同年甚鮮知公老 밤 되어 돌아갈 즈음에 나의 광기가 또 발동했네 / 入夜將歸發我狂 총재가 모두 임석했으니 얼마나 성대한 자리인가 / 冢宰俱臨眞盛事 예로부터 성조에서는 문장을 소중히 여겼느니 / 聖朝從古重文章
[주] 옥순(玉笋) : 급제한 문생을 가리킨다. 당(唐)나라 이종민(李宗閔)이 시관(試官)이 되어 선발한 문생들 모두가 저명 인사였으므로 당시에 옥순이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74 李宗閔列傳》 [주] 청전(靑錢) : 재능이 출중한 급제자를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장작(張鷟)이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건미도(騫味道)가 그의 문장을 마치 청동전(靑銅錢) 같다고 칭찬한 뒤로부터 그를 청전학사(靑錢學士)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61 張薦列傳》
순흥안씨의 잘못된 주석 죽성(竹城)의 …… 가득한데 :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안의 화려한 명성을 찬양한 말이다. 안축(安軸)ㆍ안보(安輔)ㆍ안집(安輯) 삼 형제가 등과(登科)한 뒤를 이어, 안보의 세 아들이 다시 등과하였으며, 또 안축의 막내아들인 안종원(安宗源)의 삼 형제가 등과를 하였다. 제목에 나오는 죽성군은 바로 안종원으로, 목은과는 신사년의 진사시(進士試)에 함께 입격한 인연을 갖고 있다. 죽성은 죽계(竹溪) 즉 순흥의 별호이다. [주] 위 해석에서 죽성(竹城)은 죽산안씨 안극인을 가리키며 순흥안씨와 무관하므로 잘못된 주석이다. 순흥안씨 안종원은 죽성군 아닌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되었다.]
신죽산안씨들도 죽성군이 안원형(安元衡)이라며 이 시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안원형은 죽성군 아닌 광산군(光山君)이므로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안원형(安元衡)이 지공거가 되어 문과 급제자를 발탁한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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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목은 이색의 시에는 죽성군(竹城君)이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목은집의 위 시 바로 앞에 나오는 시에 죽성군(竹城君) 안공(安公)이 연회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을 보내왔다고 하였으므로 그가 바로 안극인(安克仁, ? ~ 1383)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순흥안씨 안종원(安宗源)도 1382년 지공거가 되어 문과를 관장한 적이 있기는 하나 당시 그는 죽성군 아닌 순흥군(順興君)이었다. 위 시의 제목에 나오는 죽성군 안극인이 주최한 연회에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참석한 안 밀직(安密直)이 안종원으로 보인다. 목은이 1378년에 지은 하죽계안씨 삼자등과시서에 안종원의 관직이 밀직첨서(密直簽書,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로 나온다. 순흥안씨 안종원도 위 연회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주최자 죽성군(竹城君)은 어디까지나 죽산안씨 안극인이다.
고려사 권73 志(지) 권제27 선거1(選擧 一) 과목 1 과거장 유량 등이 급제하다 일자 1382년 05월 미상 (음) 〈우왕(禑王)〉 8년(1382) 5월 순흥군(順興君) 안종원(安宗源)이 지공거(知貢擧),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윤진(尹珍)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유량(柳亮) 등 33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