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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許筠)생년1569년(선조 2)몰년1618년(광해군 10)자단보(端甫)호교산(蛟山), 성소(惺所)본관양천(陽川)특기사항권필(權韠), 이안눌(李安訥), 조위한(趙緯韓), 이재영(李再榮), 정응운(鄭應運), 조찬한(趙纘韓), 기윤헌(奇允獻), 임숙영(任叔英) 등과 교유
惺所覆瓿稿卷之一○詩部一 / 丁酉朝天錄 / 通州
通州控帝州。轉餉此咽喉。廛市陳蕃貨。江橋集海舟。逢人皆越客。沽酒上津樓。游子空留聽。蕭蕭兩鬢秋。
惺所覆瓿稿卷之一○詩部一 / 丁酉朝天錄 / 帝都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26 | 庭試에 합격하고 玉堂에 들어가다. ○ 咨文賫咨官으로 遼東에 다녀오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29 | 2월, 경연에 기사관으로 참여하다. ○ 4월, 重試 文科에 합격하다. |
帝都何巍巍。樓殿鬱雲虹。熾昌二百載。赫業何其雄。治風遍宇內。文物盛寰中。天子朝月朔。曉闢明光宮。鳴環集百辟。拂霧朝群公。仗引鉤陳轉。鐘鳴閶闔通。黼座擁矞雲。怳若日出東。遠人重譯至。萬里來觀風。庭實列貢篚。拜舞瞻重瞳。嗟爾箕封客。渥澤偏其洪。微禹吾其魚。感涕祝華崇。東海尙揚波。中丞受彤弓。願言宣九伐。終使除群兇。耕鑿再粒民。永頌吾皇功。
惺所覆瓿稿卷之一○詩部一 / 丁酉朝天錄 / 十五夜。使示以五言絶句七篇。用一年明月今宵多爲韻。仍奉和。
時序屬高秋。流年暗中失。賞月有佳篇。才情推第一。正値秋風節。金波漲滿天。夜闌偏皎潔。淸景最今年。浩彩流銀漢。寒輝漾玉京。嫦娥如欲語。轉作十分明。携影步中庭。寒光徹人骨。傳語李謫仙。把酒來問月。對酒惜淸景。愴然傷客心。古來人望月。何者到如今。故國亦明月。居人愁寂寥。應憐萬里客。天畔度今宵。北里姬彈瑟。東隣客按歌。吟詩酬勝景。月色爲誰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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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 허균은 정유 재란 때, 명나라에 가지 않았다
일송정 ・ 2023. 12. 2. 18:58
ㅇ:여기서 ‘朝天錄’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경위를 소개한다. 당나라 玄宗(明王)때에 范陽 節度使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현종은 사천성 검각현 인근으로 파천했다. 수십, 수백의 칼을 세워놓은 것 같은 산봉우리가 빽빽하게 둘러 있어 감히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곳이다. 아침마다 현종이 주제하는 조회에 늦지 않기 위해 대신들이 험난하고 가파른 朝天嶺을 넘어 조회에 참석해야 하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朝天錄’이다.
丁酉 朝 天 錄
(1)廣遠樓1597
높다란 다락이 바람 받아 툭 트였기에
부름도 기다리지 않고 한가롭게 올랐네.
난리 뒤에도 옛 모습 남아 있지만
시를 읊으면서 바라보기는 오늘 아침이 처음이네.
빗줄기에 씻겨서 푸른 산이 가까워 보이
안개에 잠겨서 파란 들판이 아득해
먼 길 나그네란 것도 스스로 잇고 있었는데
서쪽에 걸린 해가 긴 다리로 내려가네.
(교산 허균 시선. 허경진 옮김. 평민사. 37쪽)
ㅇ:1597년에 광원루에 올랐을 때 지은 시로 보인다. 1597년이면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데, 허균연보24
(허경진 지음, 보고사/ 67쪽)에는 1597년 8월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신으로 간 정사와 부사의 이름이 없다.
ㅇ:위 시문 3번째에, ‘亂離餘舊賞(난리 뒤에도 옛 모습이 남아 있다)’라는 내용을 볼 때 임진왜란 때 광원루가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 1597년 8원에 명나라로 가면서 廣遠樓에 올라 지은 詩인지,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시간이 있어 廣遠樓에 올라 지은 詩인지는 몰라도, 정유재란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원병을 청하러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한가롭게 광원루에 올라 詩나 짖고 있을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ㅇ:한국 인명 대사전(한국인명대사전편집실 편/ 편집위원. 李熙昇, 朴鍾鴻, 李相伯, 白 鐵, 韓㳓劤, 鄭炳昱/ 新丘文化史)에, 1597년 허균은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뽑혔고. 1598년에는 황해도 도사가 되었는데, 서울에서 기생을 데려다가 별실에 숨겨 놓고 즐기다가 탄핵을 받고 쫓겨났다고 했다. 한국 인명 대사전에는 허균은 명나라에 간 기록이 없다.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의 사건을 한국사연표(다할편집실 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597년
1월; 20만의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옴. 정유재란.
2월; 이순신 무고로 하옥됨. 원균, 3도수군통제사가 됨.
7월; 원균, 칠천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함. 이순신 다시 3도수군통제사가 됨.
8월; 일본군이 남원성을 함락함.
9월; 이순신 명량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함.
10월; 이순신 함대가 고하도를 본영으로 삼음.
1598년
2월; 명 제독 진린이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옴.
6월; 성혼 사망.
9월,; 명의 유정이 순천의 고시니 군대를 공격함 일본군이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개시함.
11월; 이순신 남해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대파하고 전사함. 이순신의 난중일 기, 박인로의 태평사 나옴.
1599년
1월; 각지의 병마를 철수시킴. 명에 사은사 한응인을 보냄.
4월; 명의 군대가 대부분 철수함.
7월; 권율 사망.
8월; 여수에 鎭南館을 건립함. 의관의 제도를 복구하고 흑색의 團領을 사용케 함.
윤계선 ‘達川夢遊錄’을 지음. 한성 숭례문 밖에 南關王廟를 세움.
ㅇ:한국사 연표의 기록을 보면, 1597~1599년까지 조선정부는 원병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전무하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한응인을 사은사로 명나라에 보낸 것 이외에 누구도 명나라에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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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韓國 人名 大事典(新句文化史 편집실 편)의 1597~1599년 사이에 기록된 허균의 행적을 찾아본다보면, 1597년 文科重試에 장원으로 뽑혔다고 했지 명나라로 가는 청원사의 수행원으로 갔다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균 연보(허경진 지음, 보고사)에는 1597년 8월에 명나라로 가는 청원사의 수행원으로 허균이 동행했다고 하였다. 그러면 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가는 사신의 정사와 부사의 이름이 없는가?
ㅇ: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日本’이란 국호를 사용한 나라는 없었다. ‘倭’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무리들이 亂을 일으킨 것이지 ‘日本’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조선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일으킨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다. 왜인들이 일으킨 亂離일 뿐이다.
ㅇ:詩文 2번째, ‘閑登不特招(부름도 기다리지 않고 한가롭게 올랐네)’라는 뜻은, 황해 도사로 있으면서 서울에서 기생을 데려다가 숨겨 놓고 비밀리에 즐기다가 발각되어 쫓 겨났지만 언젠가는 다시 자기를 부를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울분을 달래기 위해 광원루에 올랐다는 뜻이리라,
ㅇ:詩文 3번째, ‘亂離餘舊賞(난리 뒤에도 옛 모습 남아 있지만)’의 ‘난리 뒤에도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亂離 뒤’는 임진왜란을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1597년 1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허균은 임진왜란이 소강상태 때(2차 통신사의 파견)에 광원루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 四十一 黃州牧 樓亭
廣遠樓: 樓는 무릇 3간인데, 단청한 기둥과 날아갈듯 한 지붕에 겹처마와 閣道요, 좌우 쪽에 사다리를 만들어 놓아서 난간을 붙들며 꾸부리고서야 올라가게 되어 있다. 樓 위에는 모두 선 두른 자리를 갈았는데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어서 항상 객이 올라와 노는 이가 있는 것 같았다. 樓 동쪽으로는 산이 막히고, 서남쪽으로 티였는데 붉은 흙의 들판이 평평하고 넓어서 1만 마리의 말을 세워도 어디 있는지 모를 만하다. 솔과 칡 덩굴은 산 아지랑이를 띠어 울창하게 푸르며 벼와 삼(禾麻)은 비를 만나 무럭무럭 자라니 이것은 이 樓가 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략>
ㅇ:광원루의 모습을 실제로 보듯이 정확하게 묘사해놓고 있다. 大朝鮮의 地理志인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府` 州` 牧` 都護府` 郡` 縣 등의 地名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는 거의 등재되어 있지 않다.
ㅇ: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취성군과 고령군은 없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황주가 湖北省과 廣東省의 두 곳에 있다고 했는데 필자가 찾는 황주목과는 거리가 멀다.
ㅇ:신증동국여지승람 황주목 조에, 고려 성종 2년에 黃州 天德軍이라고 했다.
*.天德軍(古今,137)~唐置.‘元和志’(天德軍本安德都護府.舊理西受降城.天寶中於大同川西築城.名曰天安軍.移理焉.乾元後改爲天德軍.西南移永淸柵.元和八年.復移軍於大同川之舊城.)按天德軍故城.在今綏遠境內蒙古烏喇特旗西北.
“당나라의 ‘원화지’에 따르면, (천덕군은 본래 안덕도호부이다. 옛날의 서수항성으로 천보 중엽에 대동천 서쪽에 서수항성을 쌓았다. 그리고 이름을 天安軍이라 하였다. 西 受降城을 옮겨서 건언 이후에 천덕군으로 26
개칭했으며, 서남쪽으로 옮겨서 영청책이라고 하였다. 원화 8년에 다시 천덕군으로 회복하였느데 대동천 있는 옛 성이다.)살펴보건대, 천덕군의 옛 성은 지금의 수원경내에 있는 오라특기 서북쪽에 있다.”
ㅇ:天德軍은 본래 안덕도호부라고 했으며, 옛날의 서수항성이라고 하였다.
*.西受降城(古今,349)~在綏遠境鄂爾多斯右翼後旗西北黃河北岸.唐中宗時朔方總管張仁愿築. <中略> ‘元和志’,(西受降城.蓋漢朔防郡臨河縣故理處.西南至定遠城七百里.)按定遠城在今甘肅平羅縣東南. <後略>
“서수항성은 수원 경내의 악이다사우익후기의 서북쪽 황하 북안에 있다. 당나라 중 종 때에 삭방 총관 장인원이 서수항성을 쌓았다.<중략> ‘원화지’에, (서수항성은 한나라 때의 삭방군 임하현으로 서남쪽 700 리 거리에 정원성이 있다.) 살펴보건대, 정원성은 감숙성 평라현 동쪽에 있다.”
ㅇ:서수항성은 ‘元和志’에, 한나라 때의 삭방군 임하현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때의 삭방군은 지금의 악이다사시를 말하며, 임하현은 지금이 파언뇨이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원루는 내몽고 파언뇨이시(臨河縣)에 있는 樓亭이다. 허균은 황해도(고려 성종 때의 서해 도로 지금의 청해성) 도사에서 쫓겨나자 서글픈 마음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내몽고 임하현(파언뇨이시)에 있는 광원루에 오른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ㅇ:광원루는 동쪽은 산으로 막히고, 서남쪽은 확 트여서 말 일만 마리를 두어도 될 만큼 시야가 넓은 곳이다. 시름과 좌절과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에 딱 좋은 곳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허균은 광원루에 올라 ‘翛然忘遠喀(먼길 나그네란 것도 스스로 잊어 버 리고 있었는데)’ 라고 하였다. 허균은 명나라에 청원사의 수행원으로 가며오며 광원루에 오른 것이 아니라 나그네(여행자)로서 광원루에 오른 것이다. 조선사의 黃海道(西海道)는 지금의 중국대륙의 청해성을 말한다. 허균은 황해도사(청해도사) 자리에서 쫓겨나자 동쪽으로 길을 잡아 임하현에 있는 광원루에 오른 것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41권의 黃海道 條에, 고려 성종 14년에 황주와 해주를 관내도에 속하게 하고 黃海道를 西海道라고 했다. 황주와 해주만을 빼어다가 한반도 황해도로 옮겨 놓은 것이다.
ㅇ:지금의 중국 청해성 동북쪽 지역에는 黃南이 있고, 海北이 있고, 海南이 있고, 海西가 남아 있다. 모두 黃州와 海州의 남은 흔적이다.
ㅇ:허균은 타고난 바람둥이며, 선천적으로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필자는 허균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허균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출간 되었는데, 어떤 책은 허균을 긍정적인 인간으로 평가하여 시대에 앞서가는 인물이라고 좋게 평가한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더러 있다.
ㅇ:허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허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명나라로 간다고 하여 의주에서 송별연을 열었는데, 그 중에 짓궂은 사람이 작란기가 발동하여 둘러서 있는 기생들을 향해, 허균과 잠자리를 한 번이라도 한 기생은 옆으로 나서라 고 했더니 30여명의 기생이 옆으로 나섰다고 한다. 배웅 나온 친지들27
이나 떠나는 사람이 박장대소하며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허균의 아버지 許曄은 동인의 영수로 있을 때, 閑職인 同知中樞府事로 전임되었는데, 尙州 客館에서 기생과 동침 중에 급사했다.
ㅇ:허균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운명이 아닌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역마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균에 대해서 쓴 어떤 책을 보면, 관직에 오래 있지도 못하고 계속 사고를 치거나 대신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만을 골라서 했기 때문에 대신들 중에는 허균을 ‘괴물’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허균은 관직에 오래있고 못하고, 나중 에는 자신의 마음조차 다스리지 못하여, 불교에 심취했다가 탄핵을 받자 또 천주교에 몰입하여 명나라까지 가서 천주교 기도문을 얻어오는 등 그의 행동은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만이 추구하는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아니면 임진왜란 때(24세) 사랑하는 아내와 첫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허균의 마음 깊은 곳에 큰 상처로 남아 있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으로 변했는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百祥樓 1597
누각은 하늘에 솟았고
아래는 긴 강
한가한 날에 병을 무릅쓰고
산에 올라 애오라지 머물렀네.
고개 들어 향로봉 보니
구름 위로 울긋불긋 떠 있어라
밀랍 바른 신을 신고
정상에 올라 봐야 할 텐데. <후략>
(허균선집. 정길수 편 역. 돌베개. 19쪽)
ㅇ:같은 제목의 시가, 교산 허균 선집(허경진 옮김. 평민사. 38쪽)에도 있다. 번역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소개한다.
높은 다락 하늘에 치솟고
그 아래로 긴 강이 흘러가네.
겨를을 얻어 병든 몸 이끌고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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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잡고 올라서 잠시 머무네.
고개 들어 향로봉 올려다보니
구름 위로 울긋불긋 둥실 떠 있네.
어찌하면 밀 바른 신 다듬어 신고.
저 높은 봉우릴 곧장 올라가 볼거나.
ㅇ:정길수 편 역의 내용 중에, ‘暇一扶我病(한가한 날에 병을 무릅쓰고)’라는 내용은, 허균은 평소에 소갈병이라는 지병이 있는데 지금의 당뇨병을 말한다. 당뇨병으로 고생 하면서도 백상루에 오른 것이다. 또 정길수 편 역의 백상루에, ‘攀陟聊淹留(산에 올라 애오라지 머물렀네.)’로 번역했는데, 허균은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백상루에 올라 한가롭게 머무른 것이다. ‘下當理蠟屐(밀 납 바른 신을 신고)’라는 詩文 중에 ‘蠟’은 꿀벌이 집을 지을 때, 복부의 3~4째 마디에서 ‘蜜’을 분비해서 정교한 6각형의 집을 만든다. 밀랍에 초를 섞어 꿀벌이 생산하는 밀과 비슷하게 가짜 밀랍 판을 만들고 그 위에 육 각형 모양의 무늬를 찍어낸 것을 소초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나무틀에 붙여 꿀벌 통에 넣어 두면 꿀벌들이 알아서 집을 짓는다. 육각형 모양의 꿀벌 집이 완성된 것을 소비라고 부른다.
ㅇ:안주에 百祥樓가 있다고 했는데, 안주는 두 곳에 있다. 하나는 新增東國輿地勝覽 1卷 京都 條에 있는데, 먼저 京都의 형상을 설명한 내용을 소개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 一 京都 上
“古朝鮮은 馬韓의 지역이다. <서울은> 北으로 華山을 鎭山으로 삼아, <동과 서는> 龍이 서리고 범이 쭈그리고 앉은 형세요, 남쪽은 漢江으로써 襟帶를 삼았으며, 멀리 왼쪽으 로는 大關嶺을 당기고 오른쪽에는 渤海를 두르고 그 형세가 훌륭하기는 東方의 으뜸으로서, 진실로 山河니, 百二의 땅이다. 백제 중엽에 漢山에서 옮겨와 살다가 얼마 후에 남방으로 파천하였다. 고려 숙종이 南京을 두었지마는, 가끔 와서 巡行하였을 뿐이었으니, 다 그 형세의 훌륭한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太祖 康獻大王이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고 여기에 都邑을 정하여, 사방에서 조정으로 오는 길을 균등하게 하고, 萬世에 빼지 못할 큰 터를 세우니, 東京` 西京` 開京 의 三京의 형세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여기에> 방불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하여라.”
ㅇ:대조선의 경도 상권의 내용 중에 나오는 지명을 고찰한다. 또 三京을 설명하는 내용도 살펴본다.
(1)북으로 華山을 鎭山으로 삼았다고 했다. 華山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34쪽에, 太華山이라고 했으며, 태화산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44쪽에, 陝西省 華陰縣 남쪽 십리에 있는 산으로 조선의 五嶽 중에 하나인 西嶽(대표적인 봉우리가 삼각산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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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남쪽에 漢江으로 襟帶를 삼았다고 했다. 중국의 고대사를 왜곡하여 재편성한 세력들이 지금의 중국대륙에 있던 大朝鮮을 한반도로 옮겨놓으면서 陝西省 寧羌縣 북쪽 嶓冢山(파총산)에서 발원하는 漢水의 강 이름을 그대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앙을 흐르는 강에다 붙여 놓았다. 분명한 것은 한강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남쪽에 있는 강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의 강임에도 불구하고 ‘漢江’이라고 부른다. ‘韓江’으로 고쳐야 되는 것 아닌가?
(3)멀리 외쪽(동쪽)으로 大關嶺을 당긴다고 한 대관령은 지금의 山東省의 泰山(조선의 五嶽 중에 東嶽)을 말하며, 오른쪽(서쪽)에는 渤海를 두른다고 한 발해는 내몽고 五海市(오해시에 발해만<지금은 해발만으로 바뀜>이다.)에 있는 발해만을 말한다.
(4) 百二의 땅이라 함은, 하남성에서 섬서성(京畿道)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東關인 函谷關(東關)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샛길이 나있고, 좌우로 산이 절벽같이 둘려있어서 백 명(百)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두 사람(二)이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5)백제 중엽에 漢山에서 옮겨와서 살았다고 한 漢山은 山西省 運城市의 垣(원)曲縣` 夏縣` 永濟縣에 걸쳐있는 中條山을 말한다. 그리고 남쪽으로 파천했다고 했는데 播遷(파천)이나 蒙塵(몽진)은 황제가 난리를 피해 도망하는 것을 높여서 하는 말이다.
(6)우리 태조 강헌대왕은 이성계를 말한다.
(7)만세에 빼지 못할 큰 터를 세우니, 東京` 西京` 開京의 三京의 형세로, <以下 省略> 이성계 시대에 三京을 두었는데, 東京은 지금의 河南省 洛陽을 말함이요, 西京은 陝西省 西安을 말함이요, 開京은 河南省 開封市를 말하는 것이다. 洛陽은 西安의 동쪽에 있어 東京이라고 했고, 西安은 洛陽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西京이라고 했으며 開京은 高麗의 首都다. 참고로 宋나라의 首都는 陝西省 延安이다.
ㅇ:京都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필자가 느낀 것은 원문의 많은 내용을 교열하면서 삭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맥의 연결이 안 되고, 중간 중간에 꼭 있어야할 중요한 내용들이 없다. 이를테면, 고조선은 마한의 지역이다 해 놓고 갑자기 이성계 조선의 경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고조선과 이성계 조선이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었는지 모르지만 마한과 이성계 조선의 경도 사이에 있어야할 내용이 삭제된 것이다. 뒤를 이어 느닷없이 백제가 中條山에서 옮겨와 살았다고 했는데, 백제의 어느 왕이 무슨 이유로 中條山에서 남쪽으로 파천했다는 내용도 삭제되었고, 갑자기 고려 숙종이 남경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본래의 원문의 내용을 중간 중간 뭉텅 잘라버린 것이다. 고려 숙종이 남경을 설치했다는 내용에 이어 느닷없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삼경을 설치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ㅇ: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일제의 교열을 피할 수는 없다. 분명히 조선사편수회에서 교열하고 첨삭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재탄생되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특히 大朝鮮의 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1권 경도 상권에 “新增 國都”라는 표제아래 명나라 사람 동월이 썼다는 조선부의 내용을 삽입한 것을 볼 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大朝鮮에 인재가 없30
어 명나라 사람 董越이 잠시 조선에 머물면서 접반사 허종이 제공한 자료를 참고로 쓴 조선부를 大朝鮮의 地理志 京都 上卷에 삽입한 것은 분명히 의도가 있다. 지금의 중국대륙에 있었던 大朝鮮을 한반도로 옮겨 놓고, 한반도로 옮긴 조선을 小國으로 만들어놓고, 大國(皇帝國)인 明나라에 조공이나 바치는 屬國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로 조선사편수회가 고의적으로 삽입한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조선사편수회는 大朝鮮의 皇帝를 王으로 격하시켜 놓고, 大朝鮮의 藩國(변두리에 있는 나라)인 명나라 王을 皇帝로 둔갑시켜 지금의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大明 皇帝로 곡필했다. 대조선 황제의 年號를 마치 명나라 왕의 연호인 것처럼 도용했다. 大朝鮮과 明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무슨 이유로 명나라 사람 동월이 쓴 ‘朝鮮賦’를 대 조선의 地理志인 京都 上卷 序文에 삽입했는가? 그것도 許琮으로부터 받은 자료에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첨가여 쓴 것을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 상권에 동월의 조선부를 삽입해 놓은 것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安 州(1)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 一 京都 上
<전략> 安州는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를 내려다본다. 위에는 百祥樓가 있는데, 즉 隋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安興館이 있다. 郡으로는 肅川이 있고, 邑으로는 順安 이 있는데, 地勢는 다 들판에 있지 않고, 樓는 肅寧(肅寧館 앞에 樓閣이 있다)이요, 館은 安定(館의 이름인데 順安縣 안에 있다)인데 地勢는 조금 너그럽고 편편하다. <후략>
ㅇ:안주의 屬郡으로 肅川郡이 있고, 屬縣으로 順安縣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 五十二 肅川都護府
建置沿革; 본래 고려 平原郡인데 태조 11년에 鎭國城을 옮겨 쌓고 이름을 通德鎭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肅州라 일컫고 방어사를 두었다가 뒤에 지군사로 고쳤으며, 본조 태종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의하여 승격시켜 都護府를 삼았다.
ㅇ:안주의 屬郡인 肅川을 고려 성종 2년에 肅州로 고쳤다고 했으며, 조선조 태종 16년에 전례대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肅州(古今,1119)~遼置肅州新陵軍.金廢.故置在今奉天開原縣東北.
“숙주는 요나라의 숙주 신능군으로 금나라 때에 폐하였다. 지금의 봉천 개원현 동북에 있다.”
ㅇ:안주의 屬郡인 숙주가 봉천 개원현 동북에 있다고 하였다. 開原縣은 본래 금나라의 상경회령부 경내에 있는 지명으로, 원나라 군사가 상경 회령부를 훼파하자 상경 회령부 경내에 새롭게 開元路를 설치한 것으로 명나라가 開原縣으로 바꿨으며 지금의 내몽고 열하 경내의 토묵특우기 로 肅州는 土黙特右旗(朝陽縣, 營洲, 薊州, 薊門의 煙樹인 薊丘, 燕京, 析津府<지금의 天津市>, 大都)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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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安州의 屬縣으로는 順安縣이 있다고 하였다.
*.順安縣(古今973)~遼置.元廢.今奉天北鎭縣地.
“순안현은 요나라 때의 현인데 원나라가 폐하였다. 지금의 봉천 북진현이다.”
ㅇ:안주의 속현인 순안현이 북진현에 있다고 하였다. 북진현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90쪽에, 수나라 개황연간에 醫巫閭山을 북진으로 봉했으며 이로 인하여 얻은 지명이다. 醫巫閭山은 음산의 지맥인 松嶺의 正脈으로 내몽고 熱河 경내의 土黙特左旗와 右旗 사이로 약 200 리에 뻗쳐있는 산맥이다. 중국지형지도에 大靑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松嶺(古今,497)~在奉天省西境遼河西岸.其脈起於陰山.東南歧出.斜(빗길사)實熱河承德縣境.橫分老哈河蘭河之源.是爲七老圖山脈.迤東至柳條邊牆之松嶺子門.峙(치)爲松嶺.更東越 淩河.起頂爲醫巫閭山.淹英六重.秀出遼西. <後略>
“송령은 봉천성 서쪽 지역의 遼河西岸에 있다. 송령은 음산에서 發起한 산맥으로 동남쪽으로 양 갈래로 뻗어서 하나는 열하 승덕현 경내로 들어와 횡으로 뻗어 칠노도산맥이 된다. 한곳에서는 노합하가 출수하고 또 한곳에서는 난하가 출수되는데 칠노도산맥이 동쪽으로 뻗어 유조변장의 송령자변문에 이르러 하늘 높이 치솟은 산이 송령이 되고, 송령이 동쪽의 대능하를 월경하여 발기한 드높은 봉우리가 의무려산이다. 여섯 겹으로 둘려 있어 6중산으로 부르며, 송령의 지맥 하나는 요서지방으로 뻗어 나간다.” <후략>
ㅇ:송령은 봉천성 서쪽 지역의 遼河 西岸에 있다고 한 봉천(지금은 요녕성으로 바뀜)은 내몽고 호화호특의 별칭이다. 또 송령이 陰山에서 뻗어 나왔다고 말한 음산은 내몽고 호화호특시 북쪽에 있는 장백산을 말한다. 음산(장백산)에서 發起한 松嶺이 양쪽으로 갈라져 그 하나가 열하 승덕현 경내로 진입하여 칠노도산맥으로 불렸다. 여기서 말하는 승덕현은 심양으로 내몽고 호화호특 서쪽에 있는 지금의 包斗市를 말한다.
ㅇ:承德縣을 市로 바꿔서 가짜 하북성으로 옮겨놓고 대신 그 자리에 포두시를 꽂아놓았다. 난하와 노합하가 출수하는 칠노도산맥을 하북성 승덕시 북쪽의 위장만족자치현 동쪽으로 옮겨 놓고 노합하와 영금하도 칠노도산맥 동쪽으로 옮겨 놓았으며, 난하는 하북성 승덕시 서쪽의 이름 없는 강에다 난하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醫巫閭山 은 동 삼성의 요녕성으로 옮겨 놓았지만 그곳에 음산은 없다.
ㅇ:安州의 속현인 順安縣이 北鎭縣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즉 의무려산이 있는 곳에 순안현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소유한 중국지형지도를 보면 내몽고 호화호특 서쪽에 石拐區라는 지명이 있고, 석괴구 옆에 大靑山이 있다. 이 대청산이 의무려산이라고 필자 는 판단하고 있으며 의무려산 남쪽에 순안현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의무려산 남쪽에는 금주부, 광녕부, 의주, 금현, 의현, 광녕현 등이 있다.
ㅇ:허균이 올랐다는 안주의 백상루는 지금의 내몽고 열하 경내의 土黙特右旗에 있으며 土黙特右旗는 사서에서의 朝陽府, 營州다. 토묵특부의 추장 掩答이 順義王으로 봉함을 받은 庫庫和屯(후에 순의현)이고, 고32
구려의 현토군이고, 조선사의 歸化縣이다. 土黙特右旗 경내에는 前燕의 首都 薊州(燕京, 遼의 析津府=지금의 天津市)가 있으며, 燕京八景 중의 하나로 유명한 薊門의 煙樹가 생기는 薊丘가 있다. 허균은 계문의 연수를 보려고 安州로 갔다가 계문의 연수를 못보고 百祥樓에 오른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출처] 3편 - 허균은 정유 재란 때, 명나라에 가지 않았다|작성자 일송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