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시절 고향 분강촌(부내 또는 분천동)에서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매일 도산서원 앞을 삽지껄 지나 다니듯이 드나들었다. 도산국민학교는 유서가 깊은 학교로써 1919년 1회 졸업생 가운데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저항시인 이육사(이원록 1904.5.18~1944.1.16 : 1944년 북경 감옥에서 39세로 순국) 선생이 있다. 도산서원을 가장 잘 나타낸 그림으로는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 이다. 이 그림은 도산서원(계상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진경산수화의 걸작품이다.
1970년대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자리에 점방이 두 개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강 건너 섬마 시사단 주변에 살았던 용운이 형님 모친께서 운영하시던 가게였다. 점방에는 관광 공예품과 음료수를 팔았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도산구곡 절반과 이 주변 일대가 모두 수몰되자 이곳에 있던 점방들은 현재의 도산서원 주차장 위치로 이전하였지만 옛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선착장 자리를 1970년대 당시의 풍경으로 조명해보면 이곳은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가 시작 되던 위치이자 옛날 조선시대 때 도산서원 앞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해 세운 하마비(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예를 갖추기 위해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함)가 서 있던 자리이자 또한 바로 왼편에는 삼밭골(삼바꼬ㆍ삼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 있었고 그리고 샅골(살골 혹은 전골)과 석간대(도산서원 주차장 뒷산), 동취병산(도산서원 오른편 산 지명)으로 올라가는 초입 길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분강촌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 도중에 도산서원에 관광을 온 외국인들이 이곳 점방에서 음료수를 사서 먹는 것을 보면 우리는 집에 가지도 않고 눈이 빠지도록 쳐다보면 먹고 있던 초콜릿과 마시던 오란씨와 콜라를 차마 다 먹지를 못하고 우리들에게 건내주면 아이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마구 몰려들어 받아 먹었다. 그 시절은 그랬었다.
"외국인들도 집에 두고 온 우리들 같은 자식들이 생각나서 그랬겠지. 그래서인지 그때 받아서 마신 오란씨 음료수 맛과 오란씨 병 모양을 평생 잊지 못하는거야..."
몇 년 전부터 쓰고 있는 수몰 지역인 고향 에세이 "도산골 이야기"와 "오란씨"에 담긴 추억담을 아내에게 들려주면 무척 재미있어 하며 듣다가도 오란씨 얘기가 나오면 가엾다고 울어요. 그녀는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지만 산간벽촌 촌놈이 마구 써 대는 에세이 "도산골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고 또 도산골 이야기 속에 탑재 돼 있는 도산국민학교 교가와 오란씨 CM송, 아리랑, 애수, 동구밖 과수원길, 들장미, 고향의 봄 등을 함께 부르고 피아노를 연주해 주어서 이것을 "도산골 이야기" 사이사이에 노래로 넣으니 이야기가 더 정감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아내와 "도산골 이야기"라는 제목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있는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도산골 사람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기도 하다. 아마 그 노래가 완성되면 도산골 이야기도 끝이 나겠지...
오늘은 유년시절에 있었던 "도산서원과 오란씨" 이야기를 스케치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시카고에 사는 친척 동생이 오란씨 이야기를 사진(아래 오란씨 캔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것을 보니 문득 지난 유년시절이 그립게 떠올라서 이곳 에세이 캔버스에 생각나는 대로 그려 보았다.
"오란씨"
병도 예뻤고
노래도 예뻤고
CM송을 부르는 모델도 예뻤고
우리들의 추억도 예뻤고
여태껏 세상에 머무는 그대 모습도 예쁘구나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왔어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오~오~오~오 오란씨
오ㆍ란ㆍ씨 파인~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첫번째 사진은 수몰 전 1970년대 도산서원 정문 아래 샅골(원래는 살골 혹은 전골이라 한다. 낙동강에서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장과 뒷산인 석간대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샅골이라고 불렀다. 샅골 입구에는 "하마비"라고 새겨진 푯돌이 있었다.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강 쪽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언덕 길을 샅골이라고 했다) 입구에서 섬마로 건너 가는 섶다리(청소깝 외나무다리) 풍경이다. 보이는 다리 왼편에서 50여 미터 산쪽으로 올라오면 분천동과 토계로 가는 강변 길인 신작로가 있었고 그 길 바로 안쪽에, 그러니까 지금의 선착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점방이 두 개 있었다. 우리들은 매일 이 길을 따라 왕복 이십 리를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다리 왼쪽 산 밑으로 비포장 신작로가 강을 따라 길게 나 있었다. 다리 왼쪽 위에 소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는 곳이 도산서원 입구이다.
첫번째 사진의 다리 위에 계시는 어르신 행장으로 보았을 때 1970년 이전에 촬영한 모습으로 보인다(작자 및 출처 미상). 두번째 사진(출처: 58회 카페방, 아름다운 풍경)은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전경이다. 사진 왼편 위로 강 건너에 있는 시사단 모습이 보인다. 옛날 이곳 지명인 샅골에서 섬마로 건너가는 섶다리 즉, 청소깝 외나무다리로 들어서기 전에 토계로 가는 신작로 큰 길이 있었고 왼편 산 밑에는 점방이 두 개 있었다. 둘 가운데 하나는 섬마 용운이 형님의 어머님이 운영했다. 양철 지붕을 입힌 이 작은 가게에서 오란씨, 콜라, 환타, 칠성사이다 등의 음료수와 함께 관광 공예품을 팔았다. 세번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 점방의 모습이 실제로 보인다. 이정섭 선생이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197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네번째 사진(작가 미상)은 안동 도산골에 있는 도산서원(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 전경이다. 퇴계 이황(1502.1.3~1571.1.3)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4년에 건립되었다. 도산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다섯번째 사진(작가 미상)은 도산국민학교 등하굣길 왕복 이십 리 신작로 주변 풍광이다. 지금 보아도 강변길을 따라 길게 펼쳐진 만만찮은 등하굣길이었다. 첫번째 사진에 있던 옛날 섶다리가 장마기 홍수에 없어지고 돌더미만 남아 있다. 수몰 바로 전 해인 1975년 경으로 추산된다. 사진 왼쪽 중앙에 훤한 곳이 지금의 선착장이자, 당시의 샅골 입구이다. 수몰 후 선착장 윗쪽에 지금의 도산서원 주차장을 만들었다. 필자의 고향인 분강촌은 다섯번째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 있었고 도산국민학교는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 끝에서 다시 1.5km 정도를 더 가서 나타났다. 사진 왼쪽 중앙 지점인 훤한 곳에서 신작로를 따라 100여 미터 올라가면 왼편에 도산서원 정문이 있었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코 앞에 두고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닦느라 산 속에 공사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사진 왼편 산 중턱을 보면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만들기 위해 파헤쳐진 산의 속살이 곳곳에 붉게 드러나 있다. 구예안과 분강촌과 도산서원 앞 일대(의인, 섬마)는 1976년 8월 15일 오후 4시~5시30분경 사이에 완전히 수몰되었다. 안동댐 준공식은 두 달 후인 10월28일날 치러졌다.
여섯번째 사진은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다섯번째 사진 일대가 완전히 만수된 광경이다(2023.7.15). 지난해 7월 장마기 때 물에 완전히 잠긴 도산서원 앞 섬마(섬촌) 전경이다. 사진 왼편에 강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시사단의 모습이 경이로와 보인다. 도산서원 앞에서부터 분강촌 전체가 물바다가 되었다. 이 사진은 분강촌에 살았던 영월 할매 자제분인 오연이 할배(64ㆍ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가 지난 장마기간 중에 보내왔다.
첫번째 사진 속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옛날 섶다리가 보인다. 도산서원 아래에서 섬마(섬마을 또는 섬촌)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였다. 여울진 낙동강에는 하얀 포말이 피어나고 그 강물 위에는 청소깝 외나무 다리(섶다리)가 파란 비단띠처럼 푸른 강물 위에 그림같이 걸쳐져 있었다. 우리는 도산국민학교 등하굣길에 우리 동네(부내, 분천동, 분강촌) 용규와 재락이와 돼지(택윤)와 성자(재향)와 유혁이와 순옥이와 낙구와 재웅이와 섬마에 사는 철연이와 해수와 다리 위에서 길싸움을 하며 놀았다. 아~ 그리운 유년시절이여! 옛사람과 옛산천이 아련하고도 그립게 다가온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1970년대 도산서원 어귀(현재 주차장 아래 섬마 건너가는 시멘트 다리가 있는 선착장 초입) 샅골 앞에 있던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전경이다. 산 아래 비포장 신작로가 보인다. 소나무가 서 있는 가로수 길을 따라 200여 미터 위로 올라가면 도산서원 정문이 나온다. 세계 어디를 둘러 보아도 소나무가 이렇게 멋지게 가로수 길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정말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 조차 없다.
당시 도산서원 정문 아래(현재 도산서원 앞마당 왼편 천연대 전망대 자리 아래)에는 낙동강이 깊고도 넓게 펼쳐졌다. 옛날 도산서원 앞 강물에 띄워져 있는 나룻배가 강 건너 섬마에 있는 시사단 아래 나룻터로 마실 사람들을 수시로 태워서 나르고 실어왔었다. 사진 제목은 "사라진 의촌리 외나무다리"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라고 해야 정확한 묘사가 될 것 같다. 위에 서술한 흑백 청소깝 외나무다리 사진과 비교해 보면 둘다 "섬마로 건너 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를 중심으로 촬영한 풍광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구도의 사진이긴 하지만 등장인물의 옷차림을 놓고 보았을 때는 흑백 사진은 196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흑백 사진 속 다리를 건너오는 어른의 행장이 검은 갓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상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위 에 있는 컬러 사진은 이서락 선생이 1974년 촬영해서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것이다.[출처: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지난번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회>를 마치고 고향 산천이 그리워 도산서원과 부모님 선영을 찾았다(2023.1.9). 사진은 현재 도산서원 입구, 관광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과 주차장이 있는 자리이다. 상점 뒷산은 서취병산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석간대로 불린다. 보이는 상점 바로 뒷산이 선영이다. 선대 조상들과 부모님께서 영면해 계신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첫번째 사진은 도산서원 앞마당 천연대에서 동북방향을 바라보면서 촬영한 시사단, 섬마, 의인 전경이다(사진 속 인물은 매형이 되신다). 네번째, 다섯번째 사진은 최근(2023.1.7)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회 겸 의인에 살았던 이창우(이갑수) 친구의 세관장 명예퇴직 경축 행사 사진이다.
두번째, 세번째 사진은 도산서원 앞마당 좌측에 있는 천연대에서 남쪽 먼곳을 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수몰된 그리운 고향 마실 부내(분천동 또는 분강촌)의 옛 터전이 산 밑으로 길게 티처럼 펼쳐지고 있다.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진경산수화인 계상정거도(겸재 정선ㆍ1746) 중앙에서부터 좌측 끄트머리 산과 강이 길게 접해져 있는 바로 그 전경과 일치하는 광경이다. 도산국민학교와 도산서원과 분강촌이 내 인생에 남겨 준 아름다운 유산과 맑은 정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은혜와 축복된 삶을 선사해 주었다. 아! 고마운 도산골이여! 그리운 산천이여! 언제나 보고 싶은 벗들이여!
♤사진 종합 설명(caption)
[수필 속에 나오는 도산서원 "하마비" 내력과 전경]
하마비는 옛날 안동댐 준공 해인 1976년 이전에는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끝 지점(샅골 입구) 산 밑에 있었다. 하지만 안동댐 수몰 후 현재 주차장 오른편 도산서원 건물 위치판(건물 안내도) 우편 바로 아래로 옮겨왔다. 수몰 전에는 물론 선착장은 없었고 지금의 선착장 자리에는 낙동강 왼편 산 밑을 따라 토계로 가는 비포장 신작로가 강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산서원에는 퇴계 사후에 서원의 삽지껄(어귀)에 세운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옛날에 도산서원 아랫 길이 수몰되기 전에는 살골(현재 주차장 아래에 있는 선착장 끝 지점) 초입에 관광공예품을 팔던 상점 뒷쪽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도산서원 주차장 오른편 서원 건물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 바로 우편으로 옮겼다. 옛날 조선시대 때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 이 지역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서 가라는 일종의 푯돌이다. 하마비는 궁월이나 서원, 고궁, 향교 등의 입구에 설치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일종의 '예를 갖추라'는 표석이다. 하마비 사진은 필자가 촬영했다(2023.1.9).
♤그림 종합 설명(caption)
윗 그림은 이호신 화백의 2008년 작품인 "도산서원" 전경이고 아랫 그림은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인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1746)"이다. 도산서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윗 그림에 고택들이 많이 운집해 있는 곳이 도산서원이다. 아랫 그림은 겸재 선생이 도산서원 주변 풍광을 좀 더 세밀하게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두 그림 제일 왼쪽 산 아래에 강과 접해서 분강촌이 누워 있었는데 날마다 도산서원 앞을 지나 왕복 이십 리 길을 오고가며 도산국민학교를 다녔었다. 도산서원 입구 못미처 강변 위 신작로 옆에 점방 두 개가 있었다.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이 위치한 곳이다. 윗 그림 제일 왼쪽에 강과 산이 접해 있는 분강촌을 출발하여 강변 길을 따라 굽이굽이 산모롱이를 돌아나가서 저 끝에 보이는 산을 마지막으로 돌아서 지금까지 왔던 길의 반 만큼을 다시 더 가야 도산국민학교가 있었다. 왕복 이십 리 등하굣길이었다.
♤70년대 오란씨 광고모델 이옥미 선생의 모습.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라는 그 광고 CM송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모델이다. 오란씨는 동아오츠카가 1971년 출시한 탄산음료이다(출처: 나무위키 오란씨).
♤추억이 가득히 담긴 오란씨 음료수 병이다(출처: 블로그. 양수기 민속품).
♤최근 시카고 어느 슈퍼마켓(supermarket)에 진열돼 있는 캔으로 만든 오란씨 음료수 모습.
♤아내 앤과 함께 한 추억의 오란씨 CM송.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왔어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오~오~오~오 오란씨
오ㆍ란ㆍ씨 파인~
첫댓글 이래서 작명이 중요한건가 하는 생각이 드네 ㅎㅎ
오란~씨
정말 정겹고도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음료수 이지~
이번 동창회 삽입 사진이 좀 흐리게 들어 갔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