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을 벗고 가죽옷을
1999년 6월 13일 / 대예배 / 창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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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몸의 70% 이상은 수분이다. 수분은 곧 피를 말한다. 몸에 상처를 입으면 어디든지 빨간 피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들추면 어디를 펼칠지라도 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즘은 노란 금색 칠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경책에 빨간색을 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짜보면 네 가지 피가 나온다. 양, 염소, 비둘기, 송아지 피가 그것이다. 그러나 신약에는 이러한 피가 없어지고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 피는 곧 생명이다. 성경은 피가 흐르는 책이다. 성경은 생명이 흐르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믿으면 영생을 주시는 피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성경에 흐르고 있는 피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 피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어야 구원받는 성도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만 씻어낼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피의 복음이요, 피를 통한 구원을 받게 되는 복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벗기시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이 어떤 옷이고 우리가 왜 이 옷을 입어야 하는지 살펴보겠다.
1.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은 완전한 옷이다.
어느 곳이 과거 에덴동산이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설사 정확하게 그 자리를 찾아낸다 하여도 그 땅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에덴동산일 수는 없다. 학자들은 지금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일 것이라고만 추정하고 있다.
베이커라고 하는 성서학자가 창세기 1장에서 3장까지의 주석을 쓰기 위하여 그 지역에서 지내며 직접 실험을 해보았다. 옷을 벗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다. 한시간이 지나자 말라 부스러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옷은 한 시간용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조심하지 않으면 긁히고 찢어져 버렸다.
베이커씨의 결론은 이렇다. “사람이 새벽 6시에서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활동한다 치고 아무리 조심해도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은 옷을 입고 하루를 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적어도 10벌은 있어야 하루를 지낼 수 있다. 저녁이면 아담과 하와는 내일 입을 옷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들은 내일 입을 옷을 준비했다. 그러나 아침이면 준비해 놓은 모든 옷들이 말라 부서져 버렸다. 무화과 나뭇잎 옷은 만들어 두었다가 입는 옷이 아니라 즉석에서 만들어 입는 옷이었다.”
하나님은 그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가죽옷 한 벌이면 평생을 입을 수 있었다. 가죽옷은 헤어져 입지 못하는 옷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인간은 불완전한 옷밖에 만들어 입지 못한다. 완전한 하나님은 완전한 옷을 만들어 인간에게 입혀 주셨다. 마귀는 완전을 불완전으로 바꾸어 버렸지만 하나님은 불완전을 완전으로 바꾸셨다.
■ 어느 믿음의 가정이 있었다. 그 가정의 아들이 좋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불러서 조용하게 나쁜 친구들을 만나지 말도록 타일렀다. 그때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제가 그 친구들을 변화시키면 되잖아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말에 일리(십리가 아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은 친구들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어느 날 덜 익은 사과 6개와 썩은 사과 1개를 아들의 방에 갖다 놓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일주일쯤 지나면 덜 익은 사과도 익고 6개의 사과 때문에 1개의 썩은 사과도 온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1개의 썩은 사과가 6개의 덜 익은 사과를 썩혀 버렸다. 그때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불량한 친구들을 끊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하려고 세상 종교라든가 철학 그리고 윤리가 노력을 했지만 타락한 인간은 전혀 변화되지 못하였고 모양만 보였을 뿐 사람의 근본인 마음은 결코 변화시켜 완전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하게 변화시키실 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2.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은 신본주의 옷이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가 죄와 수치를 해결키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에게서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벗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든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요,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다. 인간의 생각은 그 근본이 인간인 반면, 하나님의 생각은 그 근본이 하나님이셨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는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숨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는 무서운 하나님의 하나님 앞에도 나갈 수가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유명한 사도 바울도 아니 베드로도 가죽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처음 대면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출 3:4-5)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5)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엡 4:22-24)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마음과 생각(마음의 영)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의 형상대로(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인본주의를 벗어버려야 하나님께서 새 옷을 입혀주시는데,
1.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인본주의를 벗어버려야 한다.
솔로몬은 성막을 성전으로 바꾼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지으면서 물질적 부요를 자랑하기 위하여 물두멍, 번제단, 금촛대 등 모든 성막의 기구들을 열 개씩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지, 못 하나하나도 다 금으로 만들었다. 주전 900년경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으며,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가루가 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장면이 있다. 이스라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다. 솔로몬 성전을 지을 당시 동쪽벽은 귀족들이 지었다. 남쪽벽은 부자들이 지었다. 북쪽벽은 정치가들이 지었다. 그러나 서쪽벽은 서민들이 지었다. 바벨론이 솔로몬 성전을 함락시킨 후 금을 가져가기에 혈안이 되어 성전을 완벽하게 무너뜨렸고, 모든 금을 가루로 빻아가지고 가버렸다. 귀족과 부자와 정치가들이 만든 성전의 벽은 초토화가 되었지만, 서민들이 눈물 흘리며 믿음으로 지은 성전의 벽은 3,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든든히 서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 정성과 마음을 기울인 믿음으로 드려진 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2.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순종치 않고 세상으로 사는 것이 인본주의를 벗어버려야 한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니느웨로 가지않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인본주의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히 하나님 앞에 할 일임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인본주의이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내 입장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 인본주의이다.
3.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사랑하는 것이 또 인본주의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소유 전답을 다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그러나 땅에 대한 욕심도 있었기에 절반을 숨겼다.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될 때에 그 성에서 구원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땅의 부요도 잃어버리기 싫었다. 불 타 없어지는 재물이 아쉬워서 뒤를 돌아다 본 연고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철저히 다루셨다. 여리고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게 하신 하나님은 별 것도 아닌 아이성과의 싸움에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또 아간이라는 사람이 소유욕에 빠져 물건을 훔쳐 감추었다고 하여 36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게 하셨다. 그리고 회개하는 여호수아에게 멋대로 행동한 아간과 그의 식구들까지 처단하라고 하셨다. 그 후에 다시 아이성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아닌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범죄한 것을 크게 다루신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명령의 중요성과 그 길만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요,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들을 심하게 다루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우리를 철저히 교육시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인가 하여 잘 살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결코 차단되어야 할 점이다. 차라리 어리숙하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것이 곧 축복의 지름길임을 늘 마음에 담아야 한다.
3.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은 보호의 옷이었다.
범죄한 후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형벌이 주어졌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다. 남자에게는 땀흘리는 노동의 수고가 주어졌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날에는 가시와 엉겅퀴는 없었다. 그것은 범죄 이후에 저주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자기생각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그것은 금방 부서지고 없어질 옷이었다. 가시와 엉겅퀴가 많은 세상에서 무화과 나뭇잎 옷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다. 긁히고 부서지고 찢기고 피를 흘리게 된다.
타락한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며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가죽옷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4.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은 피묻은 옷이었다.
가죽옷의 안쪽은 피로 얼룩져 있다. 죄 없는 짐승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었고 자기의 가죽은 그들을 위한 옷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왜 짐승의 가죽옷을 해 입히셨겠는가? 곁으로는 입은 사람을 보호해 주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해 준다. 비록 짐승이기는 하였지만 죄없는 짐승이 나를 위하여 생명을 받쳤다는 생각으로 아담과 하와의 숙연해 졌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다면 늘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생각할 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짐승이 아닌 육을 오신 하나님이셨다. 그러한 죄없으신 분이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두면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피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더불어 더욱 경건하게 살기를 다짐해야 한다.
사람의 신장은 두 개다. 그 중 하나를 떼어주어도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이는 곧 그 사람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 자기 신장을 떼어주는 분들이 있다. 한 사람이 신장을 떼어줌으로 죽을 한 사람이 살아난다. 대단한 사랑이다. 큰 사랑이다. 두 개의 신장 중 하나만 있어도 살 수 있기 때문에 떼어 준 것만은 아니다. 상대방의 죽어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상대방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일을 행한 사람을 향해 신장이 두 개가 있으니 하나를 떼어 준들 어떻겠느냐고 아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북아현동에 있는 큰 형님을 찾아 뵐 때마다 건강이 어떠냐고 묻는다. 신장 한 개를 떼어서 전혀 연고가 없는 시골의 한 사모님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생명에 지장이 없는지를 항상 묻게 된다. 혹시라도 하나밖에 없는 신장이 이상이 있으면 큰 일이기 때문이며, 혹시라도 하나밖에 없기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그러나 형님은 염려할 것이 아니라고 대답을 한다.
그런데 단 하나 뿐인 생명을 기꺼이 주신 분이 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그것도 죄악에 빠진 더러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분이시다. 두 개인 신장 중 하나를 떼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뿐인 그의 생명을 의인도 아닌 죄인들을 위하여 값없이 거저 주셨다. 단지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한가지 이유 때문에 말이다.
5.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은 약속의 옷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루터에게 책을 펴 보였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 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다 기록되었다. 그 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다. 그러니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다. 루터는 그 말을 들을 때에 기가 막히고 낙심되었다. 그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한다. 마틴 루터가 그 사단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다고 한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듯이, 구원받은 사람이 엉겅퀴와 가시덤불 같은 이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