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7 연중6주간 목 – 133위 063° 김선양 요셉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133위 063° ‘하느님의 종’ 김선양 요셉
이름 : 김선양 요셉
출생 : 1808년, 공주
순교 : 1866년 12월 27일, 교수, 홍주
김선양 요셉의 본관은 경주이고, 고향은 공주 새재(현 충남 공주시 봉정동 조령리[0.1])이다. ‘선양’은 그의 자(字)였고, 1866년 홍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최 마리아는 그의 부인으로, 둘 사이에는 아들 요한이 있었다.
김선양 요셉은 30세가 되던 1838년에 가족들과 함께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이듬해 온 집안이 전라도 고산 시어골(현 전북 익산시 여산면 대성리의 세목)로 이주했다가 기해박해로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이때 김선양 요셉도 포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김선양 요셉의 집안은 충청도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을 거쳐 전주 약바위(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로 이주했으며, 이곳에서 다시 한번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에 공주로 가서 살다가 서산 강당리(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0.2])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선양 요셉의 가족이 강당리에 정착한 지 6년 정도 되었을 때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박해 초기에 그의 가족은 산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는데, 같은 해 11월 9일(음력 10월 3일)에는 강당리 회장이 체포되었고, 12월 13일(음력 11월 7일)에는 홍주 포교들이 다시 들이닥쳐 마을 신자 17명을 함께 체포하였다. 이때 김선양 요셉도 아들 요한과 함께 체포되면서 많은 매를 맞아야만 하였다.
포교들은 마을 신자들을 묶어 홍주로 가던 중 원벌(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 주막에 이르러 신자들의 재산을 적몰한 돈으로 술을 마신 뒤, 김선양 요셉에게 “교회 서적을 가져다 바치라.”고 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의 아들 요한이 “아버지 대신 젊은 내가 형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서적을 갖다 바치자, 포교들은 요한을 석방하고 김선양 요셉과 마을 신자들을 오라로 묶어 홍주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홍주 진영에 도착하자 영장은 포교들의 보고를 들은 뒤 일단 모두를 하옥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3일 만에 문초와 형벌을 가하고 다시 옥에 가두었다가 며칠 뒤에 17명을 모두 끌어내 교수형에 처하였다.[1][1.1] 이때 그들은 모두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순교했으니, 때는 1866년 12월 27일(음력 11월 21일)로, 김선양 요셉의 나이는 58세였다.[2] 이후 관아에서는 17명 순교자 모두를 한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3]
김선양 요셉이 순교한 뒤 그의 아내 최 마리아도 아들 요한 대신 체포되어 1867년 1월 22일(음력 1866년 12월 17일)에 홍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4]
[註]__________
[0.1] 공주시 봉정동 조령리 : 새재(조령산)는 한산(공주 웅진동 산 38 일원)에서 봉정동 저지대로 넘어오는 고개다. 조령리 뒤에 있는 높은 산으로, 산의 모습이 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새재라고 부르는데 산의 아랫마을도 새재 또는 조령리라고 부르며, 승방이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승방이(승방골)은 감토봉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여승이 사는 절이 있었다. 여승이 사는 절 근처에 마을이 생겼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승의 목탁 소리에 자기네들을 의지하는 듯 기쁨 속에 살았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 크게 수해가 나서 사태가 나며 마을도 떠내려가고 여승이 사는 절도 떠내려갔다. 그 후부터 승방(僧房)이라 부르던 것을 승방(升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혁명 때 군량미를 쌓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산을 파다 보면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한다.
[0.2] 서산 운산면 용현리 : 마애삼존석불과 보현사지가 있는 골짜기 마을. 합덕·우강 사람들은 ‘강댕이골망’이라 불렀다. 입구에 방윤석 베르나르도(1950-2012) 신부님이 성장한 곳이 있었다. 지금은 수몰되어 ‘고풍저수지’가 되었다. 합덕·우강 사람들은 달래도 우는 여자아이한테 ‘너, 강냉이 골망으로 시집보낸다’하면 뚝 그칠 만치 범과 여우가 우글거리는 깊은 산고랑탱이었다. 1990년 중반까지 강댕이골에는 4~5개의 옹기·사기가마터가 용현계곡을 따라 죽 있었다. 용현리 강댕이 사기 굽이나 굽술이나 굽꼭지 모양이 진천 배티에서 발견된다. 옹기나 사기의 모양을 통한 천주교 전래나 교우들의 이동을 조사·연구할만하다. 서산 운산면 강댕이골길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시대에 ‘중국 → 서해 → 태안·서산·당진 → 덕산 → 삽교 → 예산·홍성·대흥·신양·청양 → 공주·부여’로 이어지는 사신로(使臣路)였다. 그 사신로 길목에 마애불·석불이 포열(布列)되어 있다. ‘태안 백화산 마애불’, ‘서산 운산면 용현리 마애불’, ‘홍성 홍북읍 용봉산 상하리 마애불’, ‘예산 봉산면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삽교읍 신리 수암산(법륜사) 마애불’, ‘삽교 신리 수암산 석조보살입상’, ‘예산 광시면 장신리 마애미륵불’ 등등이다.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면 내포 땅이다. 충청도 내포지역 마애불·석불이 지리·문화적 이동이나 포진(布陳)과 무관하지 않듯이 내포 천주교의 확산도 서출동류(西出東流) 격이기는 마찬가지다.
[1] 김선양 요셉과 동료들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다(『병인치명사적』, 1권, 156면). 그러나 당시 홍주 진영에서의 처형 방법에서 볼 때 교수형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1.1] 교회사나 자료에 나타나는 “홍주”는 홍주목에 속한 모든 군·현을 구분 없이 기록할 때가 있다. 조선 후기에 내포 홍주목에는 홍주와 해미에 양 진영이 있었다. 특히 진영장에게 처형권이 부여되었던 병인박해(1866-1872) 때 홍주진과 해미진에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경쟁적으로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한국천주교 초기 박해(1791-1839) 때는 홍주나 해미에서 신자들을 체포하여도 감영이 있는 청주로 대부분 압송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박해가 지지부진해지면 군현옥에 갇힌 신자들을 방치하여 병사·기사·동사·도주하기도 하였다. 처형권이 없는 지방수령에 의한 박해일 때 가혹한 고문(특히 매질)이나 방치(질병·굶주림)로 죽게 하여 자연사한 것처럼 꾸며서 보고하여 직권남용죄는 피하고 실적은 올렸다. 홍주목은 상위기관으로서 행정은 목사(牧使)가 국방·치안은 토포사(진영장)가 담당하지만(두 직무를 겸하기도 하였다), 해미진은 현감이 진영장을 겸하여 행정·병영을 담당하였다. 해미현은 평시에 국방에 대한 비중이 컸지만, 박해시기에 치안이라는 특수 목적을 담당하였다. 한 순교자의 출생·거주·순교지를 두고 ‘홍주다’, ‘해미다’, ‘면천이다’, ‘덕산이다’라는 이견이 보일 때가 있다. 기록상으로는 상위기관인 홍주이지만, 구전 자료나 인물 관계나 상황으로는 실제 장소가 홍주가 아니라 홍주목에 속한 군현일 수 있다.
[2] 순교 당시 김선양 요셉의 나이는 58세(『치명일기』, 정리 번호 680번; 『병인치명사적』, 1권, 154면) 또는 56세(『병인치명사적』, 1권, 158면)로 나온다.
[3] 『치명일기』, 정리 번호 680번; 『병인치명사적』, 1권, 154-156. 158-161면; 2권, 150-151면.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681번; 『병인치명사적』, 1권, 156-157.162-163면; 2권, 1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