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해. 한신해. 김연이
‘사학 매파’ 라고 불린 유명한 여자 전교사들
정복혜 : 7-1801, 세례명 칸디다. 서소문 밖에서 참수
한신애 : 7-1801, 세례명 아가타, 서소문 밖에서 참수
김연이 : ?~1801, 세례명 율리안나, 서소문 밖에서 참수
초기 한국 교회에는 유명한 여자 전교사들이 많았다. 이 가운데 김연이, 정복혜, 노비 복점 등은 양반 집 상민 집 할 것 없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며 선교하였고, 강완숙, 한신애, 신소사는 서로 처지가 엇비슷한 양반가의 후처 혹은 첩인 양반 부인들을 주로 상대하였다.
그리하여 박해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사학을 이 집 저 집 중매한 여자라 하여 ‘사학 매파’(邪學媒婆)라고 불렀다.
한글로 필사한 교리 서를 팔고 다녔던 정복혜
정복혜(鄭福惠, 칸디다)는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나 살다가 산림동으로 출가하였으며. 1790년 이합규(李鴿逵)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녀는 남동생 정명복과 아들 윤석춘 등을 입교시켰고, 양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많은 부녀자들에게 선교하였다. 정복혜는 강완숙의 집과 예산 군수를 지낸 조시종의 부인 한신애의 집,그리고 참판 이기양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기양의 집에는 그녀의 며느리가 유모로 들어가 있어 자주 왕래 하였다.
정복혜는 덕산에 사는 송가의 권유로 한글로 필사한 교리서들을 팔고 다녔다. 송가가 누구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혹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녀는 또 한신애가 자기 집 노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좋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이합규와 정광수를 그 집에 데리고 가기도 하였고. 최설애에게 선교한 뒤 이합규 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정복혜는 대부분의 초기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전기적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녀의 아들 윤석춘의 포도청 신문 기록에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어떤 이로움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천주교를 믿으면 평소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친부모 자식같이 서로 도와 준다.
너는 형제가 없어 고독한 사람이니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그 무렵 천주교를 선교할 때 대개 두 가지를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죽은 뒤 좋은 곳으로 간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윤석춘이 밝힌 바와 같이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환난상구(患難相救)의 정신, 즉 이웃 사랑의 정신이었다.
따라서 정복혜도 이러한 목적과 정신으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윤석춘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그 이듬해 3월에 온 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앓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셋째는,윤석춘이 천주교 교리를 더 깊이 알기 위해 주문모 신부를 모셔 온 지황을 찾아갔다가 그가 포도청에서 매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윤석준이 어머니 정복혜에게 지황이 죽은 이유를 묻자,천주교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지황과도 일찍부터 잘 아는 사이 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복혜는 상민 집은 포졸들의 수색을 받기가 쉬우므로 자기
집에 있는 교리서는 물론 다른 신자들 집에 있는 교리서까지 한데 모아 한신애의 집에 숨겼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한신애가 체포될 때 모두 압수되었고, 그녀도 그해 2월에 체포되어 “수많은 부녀자에게 선교하여 입교시키고, 교리서와 성물들을 모아 한신애의 집에 묻어 두었다가 박해가 지난 뒤 다시 천주교를 선교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4월 2일(양 5월 1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아들 윤석춘은 배교하여 기장으로유배되었고, 남동생 정명복은 전남 장성으로 유배되었다.
여성 신앙 공동체 중심에 서 있었던 한신애
예산 군수를 지낸 조시종의 후처였던 한신애(韓新愛. 아가타)는 양반 집안의 서녀(庶女)로, 일반 상민과는 다른 신분이었다. 그녀의 노비 소명이 “저는 본디 충청도 보령 신씨 양반 집의 종이었는데. 열여섯 살 때 안상전을 따라와 청교(淸橋)조생원(조시종)댁 종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소명은 그녀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몸종으로 보인다.
그녀의 입교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형조의 진술에서 “소명을 6년 전에 강완숙의 집으로 보냈고, 또 강완숙이 써 준 기도문 등을 보고 그녀의 전처 딸인 동정녀 조혜의와 함께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1795년이나 1796년경 강완숙의 선교로 입교하였음에 틀림없다. 그 후 그녀는 1800년 여름 강완숙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아가타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