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 / 변혜지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심사평- 김영남, 이학성>
변혜지의 ‘언더독’은 남다른 사유의 깊이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장되지 않은 비유를 제대로 다룰 줄 알았고, 절제된 수사의 미덕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모자람을 찾기 어려웠다. 막힌 혈로를 뚫듯 날카롭고 예민하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아우르는 너끈한 묘사력을 겸비했으니, 이만한 사유의 세계라면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메우고도 남으리란 믿음에 선작(選作)으로 민다. 언제까지 무거운 짐을 걸치고 거침없이 나아갈지 모두가 기대를 걸고서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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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에서 밑에 깔려 패배할 확률이 99%인 개를 언더독이라고 하고. 위에서 누르고 있는 99% 이길 확률이 있는 개는 탑독이라고 한다.( *언더독 효과: 경기나 싸움, 선거 등에서 질 것 같은 사람이나 팀을 동정하는 현상.)
이 시에는 대중에 의해 영웅으로 조작되어 아름답게 치장된 죽은 나인 즉자화된 나와
이 세계의 구성방식 즉 평균화되고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과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그들'의 세계를 깨달은 대자화된 나 즉 화자가 등장한다.
이 세계는 꿈 속 즉 허상의 거짓으로 가득찬 세계인데 이것이 진짜를 행세한다. 이 세계는 대중에 의해 조작된 내가 대자화된 참다운 나를 보고 비웃고 있는 우스운 세계이다.우리는 돈을 많이 벌고 높은 권력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길들여지고 조작되어 그런 삶을 살다간다."그런 삶은 참다운 삶이 아니야" 라고 대자화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 승자는 누구인가? 누가 탑독이고 언더독인가? 일반적으로 보면 즉자화된 꿈 속의 나가 탑독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비록 대중의 외면을 받더라도 세계의 구성방식을 깨닫고 외로운 길을 가는 대자화된 존재가 탑독일 것이다.
화자인 대자적 자아가 꿈속의 관 속에 누워있는 즉자적 자아를 바라본다. 헤겔에 의하면 자기를 반성하는 존재를 대자적 존재라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사물은 즉자적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반성하지 않는 인간은 즉자화되는 경향이 있다.
사르트르의 개념에서는 의지가 중요한데 의지대로 존재하는 존재는 대자적 존재이다. 책상은 자기 의지대로 교실에 있지 않으므로 즉자적 존재다. 방에 앉이 있고 싶어서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앉아 있으므로 대자적 존재다.
그러나 자기 의지 없이 대중에 휩쓸리면 인간이라하더라도 즉자화된다.
이 시는 이 세계에 대한 데자뷰다. 대중에 의해 우상화된 것이 너무 많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조작된 것이 진짜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중은 박수를 친다. 에리히 프롬의 노예근성 개념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대중에 의해 휩쓸리면 노예이다.
<구체적 해설>
언더독 / 변혜지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사람들이 나를 영웅화 시킨다. 즉자화시킨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대자화된 화자가 그림자에 불과한 즉자화된 꿈 속의 나를 바라본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나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다.대중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꿈속 즉 허상세계 속에서 나를 조작하고 즉자화한다.그렇게 조작하는 사회가 진정한 세계가 아니고 꿈, 허상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 속에 살고 있고 허상 뿐인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세계는 그림자, 꿈, 죽음의 세계다)
(이 세계는 환경오염, 크고 작은 지역전쟁, 핵전쟁의 위험, 돈을 숭배하고 온갖 차별이 횡행하는 세계다. 이 시에서는 극단적으로 폐허가 된 도시로 상징화되고 있다)
(*대자화된 나는 조작할 수가 없다. 의지와 반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처음에 화자인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어서 이 상황을 즐긴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즉자화된 존재는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 이렇게 조작되어 죽은 나에 대해 애도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이다. 변덕스러운 대중은 나를 잊어버리고 또 다른 평범한 사람을 영웅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자기 자신에게 반문해 보니 내가 이 세계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대중에 의해 조작된 것일 뿐)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구했는지 이 세상은 관심이 없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엄석대는 사악한데 포장된 모범학생이다. 이 소설이 오버랩된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연인조차도 나를 즉자화한다)
(현실에서 연인은 여성인 애인를 가스라이팅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너는 정말 여성스러워. 현모양처감이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 세계에 갇히면 즉자화된다)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대중은 과정은 모른 채 우상화된 결과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화자조차도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지 알수 못하고 단지 아름답게 미화된 그 결과에만 휩싸인다)
(히틀러의 이미지 조작에 의해 국민들이 열광하듯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모택동과 홍위병의 선동의 예에서 보듯이)
(솔 벨로우의 소설 '오늘을 붙잡아라'. 주인공 토미가 남의 장례식에서 엉엉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실패를 거듭하며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던 토미는 얼떨결에 장례 행렬에 휩쓸려 장례식장까지 들어가게 되고, 낯선 망자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감정에 휩싸여 커다랗게 울음을 터뜨린다. 인간답게 살기를 고집하고 타인과의 연대 의식을 느끼려 분투하는 토미의 투쟁은 시대의 지배적 풍조에 타협하지 않고 고립된 삶을 긍정하는 삶이다)
솔 벨로우(Saul Bellow) 장편소설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 (tistory.com)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드디어 상황을 깨달은 대자화된 화자는 의지와 상관없이 즉자화된 꿈 속의 나를 향해 그것은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반성한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은 대자화된 화자인 나를 부정한다)
(대중들은 "너는 우리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우상이므로 너 스스로 반성하거나 정체성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묵시적 압력을 가한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대중에 의해 조작된 내가 대자화된 참다운 나를 보고 비웃고 있다. 정말 우스운 상황이다.누가 승자인가)
(우리는 돈을 많이 벌고 높은 권력에 오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길들여지고 조작되어 그런 삶을 살다간다.그건 아니야 라고 대자화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이 상황도 솔 벨로우의 소설과 유사한 상황이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방식을 알 것 같았고,
(대자화된 나는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이제 정신차리고 이 조작되고 평균화되고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함과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그들'의 광기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생각을 해야 했다)
(꿈의 세계 즉 허상의 세계에 대해 깨달은 대자화된 나는 이제 진정한 반성을 한다. 그렇다면 누가 탑독이고 언더독인가. 자기 반성없이 대중에 의해 휩쓸리는 대로 사는 꿈 속의 나, 화관에 누워 있는 나인가 아니면 비록 대중에 의해 부정되지만 이 세계의 구성방식을 깨달은 대자화된 나인가? )
첫댓글 https://youtu.be/02ZmEaBqu88?si=JJyLCa5tYnpV5U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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