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 공동체 - 이스라엘 사해지역 -
쿰란 문서의 발견과 쿰란 유적지의 발굴 이후 쿰란 공동체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이 제기 되었다. 필로(Philo Judaeus, 기원전 15/10∼서기 45/50), 요세푸스, 소 플리니우스(Plinius Minor, 61/62∼113?) 등의 문헌에서 에세네파(Esseni)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고전적 사료들이 보도하는 에세네파에 관한 내용과 쿰란 문서에 묘사되어 있는 공동체의 조직·생활·사상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기에 쿰란 공동체에 대한 에세네파 가설이 지금까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 기원과 역사
에세네파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초의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마카베오가 독립전쟁(기원전 166∼160) 시기에 마따디아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모인 다양한 여러 그룹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헬레니즘과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에 반대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1마카 2,29). 하시딤은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은 지지하였지만 그들의 정치형태는 비판적이었고, 결국 요나단 마카베오(기원전 160∼143)의 통치시기에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로 분열되었다.
2) 조직과 생활
쿰란 공동체는 쿰란 문서에서 자신들을 ‘공동체’, ‘다수’, ‘회중’, ‘빛의 자녀들’, ‘정의의 자녀들’, ‘충실한 자녀들’, ‘경건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등으로 표현한다. 공동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생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델로 조직 되었는데 ‘광야’라는 신학적 주제는 쿰란 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즉 공동체는 율법 연구를 통해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로 가서 생활하였다.
쿰란 공동체의 규칙서는 재산을 공유하는 독신자들의 공동체를 묘사하는데,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공동식사를 하였다. 공동 식사는 공동체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성전의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 식사의 중요한 두 구성 요소는 빵과 포도주이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과 동일한 정결의 수준이 공동체에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식사에는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는 정식 회원만이 참석할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정결례를 위한 침수 예식을 거행하였다. 공동체는 이 예식을 통해 자신의 정결과 거룩함을 유지하였다. 이것은 문헌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증거들에서도 입증된다. 즉 쿰란 공동체의 유적지에서는 제의적 정결 예식에 필요한 정교한 수리시설과 정결예식을 위한 물웅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3) 종교사상
쿰란 공동체는 유대 전통에 충실하고 율법에 철저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참된 이스라엘, 남은 자, 새로운 계약의 공동체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로 이해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예정론을 따랐다. 예정론적 사고는 이원론과도 관련이 있다. 쿰란 문서의 여러 사본들에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 등의 이원론이 발견된다. 특히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대한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을 빛의 자녀들로 여겼고, 악한 영이 지배하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곤경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고 여겼다.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성전의 제사도 거부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한 것으로 여기고,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성전의 제사를 대신하였다. 공동체는 하루에 두 번씩 정해진 시간에 공동 기도를 바쳤는데, 그들은 공동체의 전례를 통해 천상 천사들의 전례에 참여한다고 이해하였다.
이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중요한 종교 사상인 새로운 계약 공동체, 예정론과 이원론, 성전 비판과 성전으로서의 공동체 이해, 제사를 대신하는 기도와 공동식사, 메시아사상과 종말론 등은 고대 유대교뿐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교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쿰란 문서와 신약성경의 관계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약성경의 인물들 즉 세례자 요한, 예수, 야고보 등이 쿰란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에 대한 가설들이 제기되곤 하였지만 가설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1947∼1956년까지 사해 연안에 있는 유대 광야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 문서들을 넓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고 하며 특별히 사해 북서 연안에 위치한 키르베트 쿰란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50여 종류의 문서가 좁은 의미의 사해 두루마리 즉 쿰란 문서이다.
20세기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라 불리는 쿰란문서는 1947년 봄 베두인 목동인 무하마드 아드-디브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쿰란 근처에서 가축 떼를 돌보던 중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이 쿰란 첫째 동굴에서는 이사야서, 공동체 규칙서, 전쟁 규칙서, 찬양시편, 하바쿡 주해, 창세기 외경 등 7개문서가 발된 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아마포에 싸여 항아리에 넣어졌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이 문서들의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2-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제4 동굴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것만도 382개의 사본 군에 속하는 수천 개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쿰란동굴의 것만도 대소 400개 이상의 사본 또는 그 일부, 4만 개 이상의 사본단편이 소장되어 있다.
쿰란의 11개 동굴은 발견된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졌고 각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의 번호(1∼11)와 동굴의 위치(Q), 문서 이름의 첫 글자가 붙여져 각 문서의 약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