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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6
나의 바램은 그 주에 있었던 데드 술자리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희경이가 제안을 했다.
술을 좋아하는 녀석도 아니고 중간고사가 끝났다 하더라도 주말 내내 할 레포트가 쌓여서 여유롭지 못한 때에
놀랍게도 아무도 이 술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부벌레인 민영이 까지도...
오래간만에 모인 데드 술자리엔 이젠 엄연한 데드의 일원인 유진도 합석했다.
한참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를 하고 있는데
-너네 요즘 좀 이상해
갑작스런 민영이의 말에 말없이 바라보니
-너 하고 유진이 말야
-뭐가...이상하다는 거야?
-유진이 남자친구하고 헤어진 다음부터 묘하게 붙어 다니잖아
-뭐가? 묘!한!게! 어떤 건데?
왠지 추궁 받는 느낌이 싫었고
민영이가 앞으로 어떤 말을 할지도 두려웠지만,
알 수 없는 화가 몸 안 어딘가 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문득 맞은 편에 앉은 유진을 보니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체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술집 올라올 때도 그래 그렇게 다정하게 팔짱끼며 걸어와야 돼?
왜 다른 애들은 그냥 다니는데 너희들은 캠퍼스 안에서 항상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고 다녀?
-그게 어때서? 다른 여자 애들도 손잡고 많이 다니잖아!!
-너흰 뭔가 달라
-뭐가?! 뭐가 그리 다른데?!
-느낌이 달라, 그냥 친구 사이가 아닌 것 같아 마치... 연.인. 사이 같아
일순간 술자리는 조용해 졌다.
직설적인 민영이도 말하기 꺼려했던걸 말하게 하고 말았다.
결국... 이런 거였군
조심한다고 했는데 들켜 버렸군
앞에 앉은 유진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기가 겁이 났다.
머릿속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술자리에 그리워진 정적을 깨기 위해 앞에 놓여진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민영아, 네가 오해 한거야 그게 말이 되니? 유진이와 난 친구 사이라구. 그럴리 없잖아
갑자기 심장 근처가 뻐근했다.
-그지? 그럴리 없지?
정 많고 마음 착한 원지가 아닐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재차 물어 본다
-그래....
힘없이 말이 흐려진다.
그래 그럴리 없잖아 ...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일어난다.
하지만 아이들을 향해 웃음을 보여 주었다.
지금은 유진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과 애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 있어, 이 말은 과 애들이 우리에게 해준 말이야
희경이가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말을 했다.
-그래? 누가 그렇게 말을 했든?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희경아...
젠장...목이 메어 온다
-희경아, 너 내 성격 알잖아 누군지 모르지만 날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
나에게 직접 와서 얘기해 주었으면 좋았잖아 모두 오해하지 않게 .
그런 오해 할 줄 몰랐었어,
난 나에게 내 단점을 거르지 않고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해
그러니까 너희 같이 직선적인 애들이랑 놀아주지 나 아니면 누가 놀아 주겠니
다시 희경이를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이 말을 다 마칠 때까지 내가 감정에 복받쳐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음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긴지 모른다.
나 때문이었다.
생에 처음으로 손과 손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좋아서 넘어서는 안될 감정의 선을 넘고 있었다. 욕심을 낸 나의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감정을 조절할 시기가 너무 늦게 온 것이다.
나 때문에 유진까지 그런 오해를 사게 놔 둘 수는 없었다.
이 술 한잔에 모든 걸 잊자고
그날 난 꽤 많은 술을 마신 것 같다.
하지만 한잔에 잊기엔 너무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또 한잔이 필요했고, 그래서 계속 마셔야만 했다.
그리고 간간이 나를 바라보는 유진의 불안해하는 눈빛을 보았다.
-조금만 마셔...
하고 아주 작은 소리로 날 염려해 주던 목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첫사랑...7
그날 이후로
강의실 맨 뒷자리에 가방을 던져 놓고 새벽 같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슬그머니 들어와 수업을 듣고 오후 강의가 끝나면 일찍 집으로 가버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텅 빈 강의실에 들어서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항상 1교시 오 분전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면 유진이 웃으면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여기야 여기!!
빽빽하게 들어선 의자들을 헤치고 억지로 만들어 놓았을법한 자리가 유진 옆에 보였었다.
내가 좋아하는 맨 앞에서 두 번째 자리를 매일 어김없이 만들어주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주위의 아이들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었다.
유진을 피해 학교를 다닌 지 한 달이 흘러갔다.
학교 근처가 집인 희경에게 놀러가 있었는데 유진이 전화해서는 내가 있으면 바꿔 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손짓을 보냈건만 무시한채 바꿔 주고ㅜ 희경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옆에 누가 있으면 신경 쓰여서 전화를 못하는 타입이라 희경 앞에서의 전화는 더욱더 어색해지고 말투는 내가 의도했던 것 보다 더 건조하게 나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듣고 있어
-요즘 왜 그래?
-뭐가?
-날...피해 다니잖아
-그런 적... 없어
-근데 왜 그렇게 얼굴보기 힘들어 ?
-요즘 좀 바빠서 그래
-그럼 날 피해 다니는게 아니야?
-응
-그래? 그럼 내일 학교에서 봐
유진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 여운으로 사라졌다.
전화를 끊은 나에게 희경은 말을 해보라는 듯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였지만
생에 첨 느끼는 사랑을 멀리하는 이 기분을,
그것도 대상이 우리들의 친구 유진이라는 것을
말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유진과의 우정을 유지하기엔 내 감정은 너무 깊었다.
밤새 잠을 설쳐서 몸이 곤하여 첫 강의 시작하기 40분전에야 학교에 닿았다.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최신가요를 들으며 유진이 아직 올리 없다고 확신하며 강의실 문을 여는 내 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거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의실엔 유진이 앉아 있었다!!!
유진이 가장 크게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에야 옆에 수경이와 몇몇 과 사람들이 보였다.
심장은 빠르게 쿵쾅거렸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을 지나 뒷자리 책상에 앉았다.
유진은 내 자리 앞으로 다가와 앉아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무슨 음악 들어?
말없이 최신가요 테잎의 껍데기를 보여 주었다.
유진은 테잎의 곡 수록순서를 바라보더니 내 이어폰 하나를 뺏어 자신의 귀에 꽂고는 워크맨을 조작하여 빨리 돌리기와 되감기를 반복했다.
그런 유진을 내버려 둔 채 최대한 무심히 1교시 책을 꺼내 보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더이상 냉정해질 자신이 없어서 화장실로 도망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노래만 같이 듣자
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쁘고 귀여운 얼굴
같이 들어줄 거지? 하는 듯 바라보는 크고 동그란 눈
그녀 너머로 보이는 수경이와 사람들의 시선...
내 계획대로 행동하길 원했다면 그 눈과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눈에 이끌려 자리에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귀에 들리는 음악은 그때 유행했던 UP의 노래 였다.
그 새벽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밝고 경쾌한 리듬에다 좀 유치하기 까지한 사랑 노래를 엉거주춤 앉아서 듣는 나는 벌을 서는 느낌이었다.
맨 마지막 후렴구 에서 여자 보컬이 다시는 혼자 두지 말아달라며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마무리가 들릴 때 난 드디어 끝났다 하는 안도감이 들었는데
-날 혼자 두지 말아 줘
유진은 단 그 한마디를 남긴 채 태연히 앞자리에가 앉았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희망이... 보이는 걸까?
가슴속에 응어리진 그 무언가가 풀리면서 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첫사랑....8
8
그 이후로 유진은 어떤 자리에도 항상 나와 함께 이길 원했고,
집에 가서도 종종 밤늦게 까지 전화 한 적도 많았다.
철저하게 친구로써.....
날 혼자 두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말은 그런 뜻이었던 것이다.
난 그녀의 말 한마디에 갇혀 헤어나지 못했다.
예전보다도 더 하루종일 그녀 옆에 있었지만, 그녀를 만질 수도 제대로 눈여겨 볼 수도 없었다. 내 눈빛, 내 손끝 ...
행동 하나 하나에 아이들 시선이 머물러 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순수한 친구로써의 행동이 와 닿는 순간부터 학교 생활은 지옥이었다.
이런 고통을 맛보느니 떨어져 있고 싶었지만 새벽 강의실을 가르던 그녀의 목소리와 날 바라보던 눈빛을 본 다음 부턴 예전과 달리 쉽게 헤어날수가 없었다.
오늘도 난 내 의사와 관계없이 희경, 민영, 유진이 함께 하는 단체 미팅이라는 자리에 와 앉아 있다.
미팅...
구시대적 유물같은 이 단어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경이와 난 1학년 때부터 미팅의 감초 역할로 인기가 많았다.
희경이는 누구에게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자길 선택하길 원했고, 난 남자에 관심이 없었으니 분위기 메이커로 종종 서로를 망가뜨려 가면서 그 자리의 서먹함을 매꾸어 주곤 했다.
하지만 난 예전과 달리 이상하게도 한마디도 하기 싫었고, 나의 지원 사격 없이 희경이 혼자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 윤진, 오 유진 이름이 비슷하네요
-....
-윤진아 ...?
-응....으응??
아까서부터 좋은 말로는 부자집 아들내미처럼 생겼고 나쁜 말로는 식용유 한 통 먹고 나온 것 같은 녀석이 유진에게 관심있어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희경의 말에 고갤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이름이 뭐더라....그래 현수라고 했던 녀석이 나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냥요... 내일 강의에 발표 있는데 어떻게 할지 생각했어요
.
.
.
드디어 지루한 한시간이 지나고 2차를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준비를 안 한거 같아서 이만 가 봐야 겠네요
더 이상 유진과 식용유 한 통을 보고 싶지 않아 뒤돌아 나오는데 현수가 따라 나왔다.
-잘 됐네요 저도 집에 일이 있어서 들어가 봐야 되는데, 집이 어디세요?
-w동이요
-가까운데 바래다 드릴게요
카페 유리 문앞에서 현수의 눈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유진에게서 벗어나고픈 사악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누군가를 이용하는건 정말 안 좋은 일이지만
난 생에 처음 겪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설명할수 없는 감정은 감당하기 힘이 든다.
-내가 맘에 들어요?
-네?
-맘에 드냐구요?
여자 나이 만 스물 둘...
예쁘지 않아도 꽃이 피는 외모라는건 이상하게도 친척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처녀적 예쁜 모습과 지금의 고모들과의 대조적 모습,
분명 내 친구와 닮은 사람임에 틀림 없는 어머니들의 모습 속에서
난 종종 그들의 꽃다운 미모들을 발견하곤 한다.
나도 꽃이 필 나이였기에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남자들이 꼬이는건 당연한 결과 였다.
난 처음으로 내 나이때를 이용하고 싶어졌다.
내 성격에 합당치 않았으나 그녀에게서 달아날수 있는 방법이라면 내 뜻을 굽히기엔 충분했다
그만큼 그녀는 날 힘들게 했고 위험한 존재 였으니까...
나의 갑작스런 말에 당황해 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소심하긴..누가 잡아 먹는데요. 맘에 들면 다시 만나자구요
그제서야 현수는 빙그레 웃었고 나는 그의 팔장을 끼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첫사랑....9
그녀를 가질 수 없다면... 빨리 포기해야만 했다.
이 생각만이 그 당시를 지탱할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 이었다.
같은 학교인줄 알았더니 미팅의 대타였던 현수는 타 대학 학생이었고 아마 여자였다면 성격에 반했을 정도로 내 이상형과 근접한 자상하고 잘 챙겨주는 성격이었다.
현수 덕분에 드디어 과 친구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생각지도 않은 늦은 밤 도서관에 마중 나와서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강의시간이 비교적 한가한 수요일날 현수가 학교로 놀러와서 거닐고 있다가
그때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다트 장과 사격장을 보더니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기를 걸자고 했다.
현수의 소원은 말은 안했지만 뻔했다.
순전히 내 의도에서 그렇게 된 거였지만, 이상하게도 난 대학 3학년말이 되어가도록
적지 않은 남자들을 사귀어 봤지만 아직 첫 키스를 해 본적은 없었다.
남자 친구 들과의 모습들은 식구들과 과 친구들에게 보여질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 과의 육체적 접촉은 아무 것도 내키지 않았고, 감히 여자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여자라서 당연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게 괘씸해서 해 보자고 했다.
군대를 아직 가지 않았던 현수와의 대결은 여자치곤 운동신경이 발달했던 나의 승리였었고,
현수와 팽팽한 격전 끝에 그 사격장에서 최고 점수 갱신까지 해서
보너스로 내 취미와는 전혀 안 맞는 인형까지 탔다.
인형은 왠지 현수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주려 했지만 한사코 받지 않아서 집에 가는 길에 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무척 아쉬워하는 녀석을 놀리며 날 감동시키라는 주문을 내 걸었다.
잠시 고민하던 현수는 학교 연못가로 데려가서 고등학교때 자작곡 했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현수의 행동에
늦은 가을 밤 남성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귀를 감미롭게 했다.
현수는 예상외로 다양한 재주가 있었고, 노래 또한 무척 잘했다.
그렇게도 내 이 상형에 걸맞게 자상하고 재주도 많았던 현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 없는 친구 같은 느낌 뿐이었다.
현수와 사귀는 동안 유진은 자주 전화 걸어서 무얼 했는지 아주 소소한 것까지 물어 보았고,
나 또한 모든걸 숨김 없이 다 말했고
일부러 감정을 부풀려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얘기했다.
그렇게 말하면 정말 내가 행복해 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유난히 꼬치꼬치 캐물었던 유진의 목소리는 그다지 밝진 않았다.
지금도 가끔 궁금하지만 그녀는 그때 날 정말 100% 친구로만 보았을까 ?
그 즈음 유진도 식용유 한통과 잘 되어 가고 있는 듯 보였다.
유진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재미 있다고 했다.
현수가 마중 나오지 않았던 늦은 가을 밤
귀가길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
식용유의 장점을 한참 얘기하던 유진이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넌 내가 그 오빠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누구? 아...그 식용유...?
잠시 많은 감정이 교차 했다.
내가 뭐라고 말할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갑자기 왜?
-월요일엔 내가 보고 싶어서 2층 강의실을 다 뒤지고 돌아다녔대
-노친네 정력이 뻗쳤네
그 느끼한 녀석이 머리에 기름칠을 하고 떡두꺼비 같은 얼굴을 들고
우리과 강의실 문을 여는 모습만 상상해도 갑자기 멀쩡한 속이 느믈거리기 시작했다.
-말해줘.... 넌 나와 그 오빠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무슨일 있었어?
-어제 만났는데...
그 녀석이 순진한 유진을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키스를 시도하려 했는데
유진은 너무 놀라 단호히 고갤 돌려 거부했고
자존심 상한 식용유는 그대로 말없이 집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때까지 2년 동안 cc였던 유진 역시 첫 키스를 안 한 이상한 녀석 중 하나였다.
유진이 첫키스를 못했던 이유는 구시대적 유물인 정조 관념을 그녀의 어머니가 뼈속까지 깊숙히 심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 했고 유진의 [마마 걸] 증상은 항상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야, 힘도 세고 나름대로 대처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지만,
갑자기 그 장면이 상상이 되면서
연약한 그녀에게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없어, 어떻게 해야돼?
-어떡하긴 뭘 어떡해?! 헤어져!!
-그래도, 그 동안 재밌었고 만난 사람 중 가장 괜찮았는데, 다시 화해 해야 되지 않을까?
-화해는 무슨!! 그 녀석 첨부터 느끼하게 굴어서 맘에 안 들었어 너랑 전혀 안 어울리니 헤어져!
난 닥치는 대로 말을 내 뱉기 시작했고 유진은 계속 내 말에 반박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진이 내 말만 듣고 순순히 식용유와 헤어졌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라
주위에서 이상한 사랑에 빠진 친구가 순순히 당신의 말을 듣고 헤어지던가?
절대 아니였다.
그래서 한편으론 유진의 행동이 신기하고 혹시나...? 하던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현수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다.
다시 유진에게 걸었던 실낱 같던 희망과,
더이상 내 감정을 속일수 없어서 였기 때문이다.
냉정한 유진과 친구로 보낸 한 시간이 절망이었지만 더 행복했고,
자상하고 배려 깊은 현수와 보낸 한 시간이 지루 하진 않았지만 아무 감정 없던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사회에 들어와서 여자들과 힘들고 아픈 이별을 할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내가 철 없던 시절 사귀었던 남자들에게
이자리를 들어서 사죄 한다.
그들을 만나는 동안 난 정말로 사랑이란 감정을 몰랐고
그래서 그들에게 너무 냉정하게 대했던 모든 것들을 사과하고 싶다.
아마 그들을 울려서
내가 여자들과 헤어질때 마다 고통스러워 울게 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해 본다.
여전히 여자들은 나를 울리고
남자들은 아주 쉽게 나에게 다가온다.
이건 내가 매력적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아직은 결혼 적령기인 꽃이 지지 않았기에
나이 때문에 얻어진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이를 좀더 먹으면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 또한 나에게 관심이 없을 거란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반 사회엔 나이든 사람이 보기 드물고
내 미래 또한 낙관적이지 않다는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여자들을 헤매이는 여자라는 것에 변함이 없다.
내가 유진으로 인해 알게 된 [사랑] 이라는 것에 희망을 버리진 않는 이상....
그리고
난 그시절
결국 유진에게서 달아나지 못했다.
첫사랑...10
3학년 2학기 겨울 방학에 희경과 윤지가 동남아 여행을 간다며 계획을 짜는 것을 그냥 바라만 봤다. 가고 싶었지만 공부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못 해서 돈도 없었고 둘 만 간다는 여행에 부풀어 있는 아이들한테 한 명이 더 낀다는 건 껄끄러울 것 같았다. 어딜 가든 짝을 맞추어 가야 재미있는 법이다.
그런데 윤지네 부모님이 절대로 허락을 안 해 주셔서 여행은 수포로 돌아가던 중 유진이 여행을 하고 싶다며 다시 희경과 뜻을 모았고 둘은 다시 여행 계획에 부풀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부터 4교시 강의까지 듣고 점심을 먹고 다시 시작할 엄청난 강의에 머리를 식히려 캠퍼스를 거닐고 있었다.
-이게 뭐야 대학이 [꿈과 낭만이 있는 캠퍼스] 라는 건 천국에나 있는 소리였어 ...
오늘 따라 머리가 지끈거려서 투덜투덜 거리며 걷고 있었다.
희경이 씨익 미소를 띄우더니
-그 대신 방학이 있잖아 사회 나가봐 누가 2개월이나 되는 휴가를 주겠니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동남아 여행 가자
속으론 좀 놀라고 한편으론 기뻤다.
유진이 여행에 동참하는걸 안 다음 부턴 은근히 더욱더 나도 여행에 끼고 싶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너네 둘이 가라 셋이 가면 짝이 안 맞아서 어딜 가든 불편할거야
-뭐 어때? 돌아가며 바꿔 앉으면 되지, 유진이도 네가 같이 가길 바라던걸
-어? 그으래? 왜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웃게 되고 말꼬리가 길어진다.
-우리 둘은 해외 여행 경험이 없어서 좀 걱정되거든. 넌 작년에 유럽도 갔다왔으니까 네가 같이 가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
-응...생각해 볼게
그런 이유였군,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일상의 탈출구이자 취미였다.
아빠가 [네가 다니는 학교는 여행사냐?]고 비꼬실 정도로 한창때는 한 달에 네 번도 다녀 온 적이 있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 나라 구석구석 잘도 돌아 다녔고, 돈을 더 모아서 유럽 배낭여행도 갔다왔다. 지금은 대학생의 해외 여행이 마치 봄 소풍 갔다 온 것 정도로 취급되지만 구 십년 대 중 후반엔 대학생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던 때라 배낭여행 갔다온 사람이 드물었다.
가끔은 그때처럼 어느 조그만 시골 역에 새벽 두 세시쯤 내려 친구들과 별을 헤다가 라면도 끓여 먹고 어릴 적 놀이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조그만 대합실에서 잠들어버려 아침에 시골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래진 표정과 마주치던 그런 풋풋한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
여하튼 그래서 과 애들은 여행하면 나 [조윤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나와 같이 가고 싶은 이유가 단지 내 경험 때문이라는 느낌에 서운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가고 싶었다.
우선 용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점심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고, 집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다녔고, 그 좋아하던 술자리도 누가 사주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얼추 돈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택도 없었다.
결국은 자존심을 꺽고 식구들에게 손을 벌려서 여비를 마련했다.
영영 안 올 것만 같았던 겨울방학은 드디어 시작되었고, 우린 12월 중순에 홍콩을 경유해서말레이시아로 떠났다.
도착 첫날 여관 수준의 숙소에서 짐을 풀고 편한 옷으로 막 갈아입었을 때
-야 너네 둘이 서봐 내가 사진 찍어 줄게
희경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말했다
-싫어! 화장 지웠단 말야
유진이 소리 질렀다.
-반항 하지마 ^0^
희경은 웃으며 소릴 지르더니 유진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날 유진 쪽으로 밀었다.
-엇!
중심을 잃은 날 유진이 뒤에서 안 듯이 잡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모습이 찍은 사진이 우리 여행의 첫 사진이 되었다.
12월은 동남아시아가 우기 인 시절이다.
숙소에서 나와 우리 나라의 민속촌 격인 곳을 찾아가서 구경하다 스콜을 만났다.
맑던 하늘이 먹구름이 가득 끼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스콜인데 너무 기온이 높게 올라가 물이 빨리 증발하면서 일어난다고 한다. 현지인 들은 너무 익숙한지 비가 내리자마자 벌써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렸고 우린 막막했다.
상점 앞 처마에서 비를 피하다 그칠 기미가 안보여 혹시나 하고 여분으로 가져온 우산 하나를 피고 몸이 가장 약해서 비 맞으면 감기 걸리는 희경이(사실 이건 순전히 스스로의 주장이었지만) 소지품을 들고 유진과 나는 비를 맞으며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래 간만에 맞는 비였다.
중학교 땐 비 맞으며 고래고래 노랠 부르며 하교 하는게 취미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땐 왜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유진이 비 맞으며 걸어가면서 너무 처량 맞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오호 그럴리가?
마침 길에 물웅덩이가 있어서 유진이 지나갈 때 두발로 힘껏 제자리 뜀뛰기를 해서 물을 튕겨 주고 뛰기 시작했다.
-야!! 너 거기 안서
열 받은 유진은 더 큰 물웅덩이에서 나를 처절하게 응징해 주었고, 우린 비를 맞는데다가 흙탕물까지 뒤집어썼지만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희경 주위를 맴돌며 뛰어 다녔다.
그러다 현지인과 마주치면 그냥 씨익하고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줬다.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이다.
미친 짓을 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숙소를 잡으면 3인용이기 때문에 대부분 더블 침대와 싱글 침대가 있는 방이다.
희경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유진과 내가 같은 침대에 쓰도록 했다.
그럼 난 속으론 무지 좋으면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땐 여자와 여자 사이에 좋아하는 감정이 남들과 다르면 육체적인 일도 부합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그런 일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그저 단순하게 유진과 같은 침대를 쓰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두근거렸다.
한편으론 침대 속에서 왠지 몸이 닿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닿을까봐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유진과 같이 침대에 누우면 아이들은 쉽게 잘 수 있어도 난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태국 해변에서 물놀이를 했을 때의 일이다.
한참을 물에서 놀다가 숙소로 돌아가다 문뜩 생각 나는게 있었다.
아침에 주인이 오늘 공사 때문에 저녁에 물이 일찍 끊길 거라고 말한 사실이다.
저녁시간이 다되어 가는데 세 명이 차례를 기다려서 샤워를 하다간 물이 중간에 끊길 테고 분명 셋 중 둘은 짝을 이루고 하게 될 것 같다. 그럼 난 누구랑 해야 하나?
갑자기 유진과 함께 샤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희경에게
-야 목욕할 때 나랑 하자
-왜?
-그냥...
-아까부터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그거야?
-생각해 보니까 오늘 물이 일찍 끊기잖아 그런데 유진이는 목욕을 길게 하는 편이고, 너와 난 빨리 끝내는 스타일이니까 너와 내가 먼저 들어 가는게 낳지 않을까?
-야, 너 답지 않게 치밀한 분석을 하고 그래 , 그런 건 성격상 내가 하는 거잖아
-아니, 여행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근데 문제는 숙소 가서 일어났다.
목욕할 것을 챙겨서 내가 먼저 들어갔고 희경이 들어오려 했다.
내가 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야 나 먼저 하면 안돼? 저번에 비 오래 맞아서 감기 기운 있어서 빨리 씻고 싶어.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럼 네가 먼저 해
희경은 저번에 자신만 우산 쓴 일이 미안했는지 너무 순순히 양보를 했다.
이게 ...아닌데 ...
난 벗던 옷을 다시 입어야 하나 ...갑자기 난처해지기 시작했고, 이 상황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속옷을 황급히 입고 벗는 척 시도하려는 어정쩡한 포즈로 있는데 유진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최대한 자연스럽게...침착, 침착, 침착, 침착.......
침착하자구 윤진아, 넌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어.
맘속으로 나를 타이르며 나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유진과 반대 방향을 비스듬히 보며 서 있었다.
근데 문제는 샤워기도 하나고 비누도 하나고 거품 내는 타월도 하나라는 거다
유진을 전혀 안 볼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전면 거울을 아주 살짝, 정말 아주 살짝 보면서 유진이 타월로 비누에 거품을 내서 몸을 닦는 진행 정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언제 끝나나... 그러면서 괜히 물을 계속 몸에 뿌렸다.
-여기 있어
유진이 타월을 내민다.
유진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유진의 손에 있는 타월에 시선을 최대한 고정시키려 노력했다.
유진이 썼던 비누 거품을 헹구고 다시 비누칠을 했다.
막상 비누 거품이 몸을 덮으니 긴장이 풀려서 서서히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유진은 아직 비누 거품을 닦아 내지 않고 있었다.
가슴이 작다고 놀렸었는데 생각 보단 컸다.
썬텐을 잘 한 사람처럼 매력적인 갈색 피부에
대드 애들이 볼륨 없는 일자 허리라고 놀려대던 군살 없는 허리와 얇은 허벅지, 그 사이로 미끄러지는 비누 거품 ......
안 보려고 했는데 어느덧 보고 있었다.
유진 역시 거울을 통해 내 몸을 보다가 눈이 마주 쳤고,
둘 다 가슴 부위를 닦아내듯 가리고 있는 모습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 샤워 이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