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십이월 어느 날, 연간으로 펴내는 회지 출판기념회 겸 송년회가 열렸다. 회원들이 한 해 동안 수필 공부를 하면서 써온 글을 모아 내는 책이다. 그 성과의 보람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보낸 한 해의 의의를 기려보자며 마련하는 자리다.
회무를 맡은 몇 사람은 그 행사를 어떻게 재미있고도 뜻깊게 꾸며 볼까 하고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 그 시간이 왔다. 사무국장은 행사 시작 전에 회원들에게 주머니 하나를 내밀면서, 까닭을 묻지 말고 주머니 속 접힌 쪽지 하나 집어서 펴보지도 말고 호주머니 속에 잘 넣어두라 했다. 펴보지 말라니 더 궁금했다.
의식이 진행되었다. 축시 낭송에 이어, 회장이 회지 발간 의의와 그 성과를 자축하는 인사를 할 동안 남몰래 쪽지를 살짝 펼쳐 보니 번호와 한 회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걸로 무얼 하겠다는 건가? 궁금증이 더해 갔다. 내 궁금증과는 상관없이 한 해 동안 각종 문예 작품 공모에서 입상한 회원들에게 축하 화환을 증정하고, 몇 사람이 나와 책에 실린 자작 수필을 낭독했다.
기념 떡을 자르고 악기 연주에 재주가 있는 몇 사람이 나와 축하 연주를 했다. 어느 회원은 오카리나로 「숨어 우는 바람 소리」를 불고, 또 두 회원은 기타와 타악기 연주를 반주로 「걱정 말요 그대」를 불렀다. 그 노래들과 함께 한시를 좋아하는 회원이 주렴계의 ‘애련설愛蓮說’을 성독聲讀하는 구성진 목소리에 이르러 출판기념회는 절정으로 오르는 듯했다.
바람 소리는 숨어 우는데, 숨겨 둔 쪽지는 언제 펼쳐 볼 수 있는 걸까? 걱정은 없지만, 궁금증은 더해 간다.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함부로 만질 수는 없다.可遠觀而不可褻玩焉’하는데, 함부로 펼쳐 볼 수 없는 것이 내 주머니 속에 있다. 큰 글씨로 적힌 그 번호며, 그 아래 적힌 이름은 무엇인가. 펼쳐 볼 수 있는, 펼쳐 봐야 하는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사회자의 멘트가 이어진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수필 낭독도 잘 듣고 노래 연주도 잘 감상하고, 귀한 한시 성독도 감동적으로 들으셨지요? 이제 우리 출판기념회가 절정으로 갑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만면에 피운 웃음으로 좌중을 둘러 본다. “더 즐겁고 재미있게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만찬장으로 옮겨서 진행하겠습니다.” 만찬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만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식 행사 자리와 층을 달리한 가까운 자리에는 맛깔스러운 술과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한 해를 보람되게 정리하고 새해를 새 뜻으로 맞자는 회장님의 건배사에 이어 사무국장은 맨트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수필 공부하면서 선생님께 늘 듣던 말씀이 있지요? 쓰기와 읽기는 항상 같이 가야 한다는 말씀, 쓰기의 바탕이 곧 읽기라는 말씀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새기면서 그 뜻을 어떻게 이 출판기념회에서 새겨 볼까 하는데, 회원 한 분이 멋진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 그 회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아이디어가 ‘책 나누기’를 하는 것이란다. 쪽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이 자리 참석 준비물로 좋은 책 한 권씩 지참하라 했던 예고를 상기시켰다. 각자 가진 책을 들고, 쪽지를 펼쳐 놓으라 했다. 또 한 주머니에 든 같은 내용의 쪽지 하나를 회장님이 제일 먼저 뽑아서, 회장님 책을 그 번호 이름이 불린 회원에게 주면, 책을 받은 회원이 쪽지를 뽑아 그 번호와 이름을 불러 책을 주는 순서로 진행될 것이라 했다. 사슬처럼 이어나간다는 거다.
모두 둥그런 눈동자들 이리저리 굴리기에 바빴다. 어떤 이 무슨 책이 누구에게, 그 책을 받은 이는 무슨 책을 누구에게? 번호와 이름을 부르면 불린 이는 뛰어나가 책을 받고, 그 사람은 또 누구를 뽑아 자기 책을 주었다. 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자기가 아껴 읽던 책을, 새로 나온 좋은 책을, 베스트셀러를 곱게 포장도 하고 예쁜 리본도 달아 책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작품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술의 흥도, 음식의 맛도 더욱 정겨워져 갔다.
사회를 맡은 사무국장의 추첨 순서가 되었다. 몇 번 누구하고 부르는데,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회원들 모두 친한 사람들이지만, 사무국장은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던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나에게 건네주는 책 제목이 심상찮다. 시 해설을 잘하는 정재찬 교수의 시 강의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었다. 정다운 사람으로부터 좋은 책을 받는다는 게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내가 추첨할 차례다.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의 장난이란 말인가? 나에게 불린 사람은 바로 사무국장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며 모두 환성을 터트렸다.
나는 사무국장에게 계간 수필 전문지를 주며 말했다. 우리가 다양한 교양을 담거나 깊이 있는 사색을 새긴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글쓰기에 중요한 공부가 될 것이라 했다. 국장과 나는 둘이 서로 주고받은 셈이다. 책 나누기는 이어지고 송년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다. 이슥한 시간이 흐르고, 내년에는 더욱 좋은 글로 쓰기의 보람을 찾아보자며 자리를 일어섰다.
내가 받은 책에는 마음, 공부, 가진 것, 동행, 열애, 배움, 건강 등 우리기 인생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에 관한 시와 사색이 담겨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쓰기와 더불어 오늘 우리가 함께한 일들이 모두 인생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책 나누기는 인생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이벤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책들 속에 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 않으랴.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이-.♣(2024.12.31. 0:10)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인생이란 단어는 묵직하게 느껴지는데 선생님께서는 출판기념회 겸 송년회 다정다감한 그날을 소박하게 담아 마음 뭉클하게 합니다.
늘 글쓰기에 본보기가 되지만 새기면서 맴돌면서 잡을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라는 글로 담아 주셨습니다. 맞아! 이런 것들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지, 새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즐거운 일이 흐뭇하게 떠오릅니다. 그날 이벤트에 기쁘게 받은 숙제를 많이 준 책을 펼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추운 날씨 부디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이제야 오셨군요. 궁금하고 걱정도 조금 했습니다.
손은 좀 어떠신요? 다시 반갑네요.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인생 아닙니까?
다만 무심코 그냥 흘리지 않을 때 말이지요.
선생님께서는 한 시각도 허투루 쓰시지 않는 것 같아
늘 존경스럽습니다. 새해에도 부디 강령시기 바랍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