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 방송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출연해 일출과 일몰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와 연령대를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출은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게 되므로 주로 젊은층
20대가 동해로 많이 간다고 했다. 또 일몰은 끝난다는 기분이
들므로 중년의 사람들이 찾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다. 그리고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내가 일출이 아닌 일몰을 찾은건... 절대로... 나이나 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해도 안뜬 추운 겨울 꼭두새벽에
일어날 자신이 없어서다. 사실, 일출은 시도는 몇 번 했다.
하지만 알람이 무색하게 잠을 잤고, 안자고 버틴다던 계획엔
비몽술몽으로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정신이 들곤 했다.
그리고 일몰에 대한 또 하나의 변명을 대자면
일출을 보면 2002년이 완벽하게 시작된거 같아 아직 음력설까지
미뤄두려는 게으름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변명과 이유를 늘어놓고도 일몰을 보러가는 안면도행
발길은
참으로 무거웠다. 그날 서울은 비가
왔다. 비오는 날 무슨 일몰이 보이겠나... 하지만 일주일
넘게 일기예보를 지켜봐도 날씨는 계속 '흐림'이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그야말로 하늘에 맡기고 간다. 에라
모르겠다 버스에 올라타고 두 눈 딱 감고 가는데 이게 웬일?
차창으로 눈부신 햇살이 뚫고 들어오는게 아닌가.... 커텐을
다 칠 정도였다. 내가 음덕이라도 쌓았나... 하여튼 대한민국 한반도 생각보다 넓은 땅덩이야.
한참만에 엉덩이가
슬슬 아파오는걸 느끼면서 둘러보니 다 온 듯 싶다.
어찌어찌
도착한 꽃지 해변은 좀 황량했다. 어느 겨울바다든 해수욕장이든
그렇겠지만서도 조금은 서글프고 처량한 모습이다. 꽃지는
생각보다 넓었다. 아니 길었다. 해수욕장 초입의 꽃다리라
불리는 다리 근처의 작은 항구엔 물이 빠져 갯벌에 배가
올라앉아 있고 쭉뻗은 해변엔 서해 바다물이 넘실거렸다.
모래사장과 인도인지 차도인지 구분이 안되는 그런 길이
있고, 그 길 넘어는 올 4월에 열릴 안면도 꽃 박람회장이다.
물론 아직 땅을 파고 있다. 옆에 이런 공사장이 있어서인지 깨끗한 인상은 아니다.
길
옆으로는
해물 칼국수며 조개구이에 '캬~'소리내며 '쐬주' 한 잔
씩 할 만한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다. 겨울이라 그런가 드문드문 문을 열었다. 꽃지의 포장마차들은 예의 그 파란 줄무늬
포장이 아니고 투명 비닐을 이용한 집이 많다. 아무래도
따뜻한 실내(?)에서 해변의 풍광과 낙조를 보라는 쥔장의
애틋한 배려를 위장한 상술아닐까 싶다. 아무튼 우동 한
그릇이라도
말아먹으면서, 다방커피 마시면서 난로불 쬐며 구경하는
것도 나름대로 맛이 있을거 같다. 하지만 뭐 낙조 크라이막스
순간엔 뛰쳐나오고 말겠지만.
서해바다라고
한껏 무시했더니 나름대로 바람도 불고, 파도도 친다. '고조~
동해에서야 저런 파도는
애들 물장구 수준이고, 이정도 바람은 어린애 콧바람도
안되겠지만서두...
제법 붑니다. 고조~어른 입 바람 정도는 되겠슴다! ' 해변엔
유명세를 탄 낙조 때문인지 카메라 다리를 짊어진 사람들과 연인들이
눈에 띈다. 차에서 내려 바다를 행해 기지개를 켜는 사람들,
파도와 장난치는 꼬마.... 어디서나 볼 수 있음직한 겨울바다
풍경이다.
길게난
해변 옆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다. 바람이 머리를 광녀로
만들어 놓고 머리속 마져 헤집어 놔 아무생각이 없이 멍하다.
오히려 이런 상태가 편하단 생각이다. 무뇌아가 된 기분이지만
머리속이 실타래처럼 얽힌들 또 무엇이 다르랴. 겨울바다엔
바다를 보러 가는게 아니라 이 겨울 바다 바람을 맞으러
오는건가싶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가끔씩
서서 보는 서해 바다는 열심히 파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황량해서, 사람이 적어서 파도 치는 것이 더 잘 띄이는가
모르겠지만 서해에서의 파도는 약간은 의외다.
한참을
걸어가면 이제야 제대로 된 건물들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더
가면 롯데 오션캐슬이다. 얼마전에 지어진 콘도형식의 숙박업소로
해수탕, 사우나 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주변에서
제일 크고 제일 화려한 숙소다. 안에는 들어가 볼 일이 없었지만
밖을 말하자면 오션캐슬의 뒷 마당쯤 되는 곳이 여름밤에
제격일 것 같다. 나무바닥을 깔아놓았고 자연스레 구불구불 자라는
소나무 사이로 바다와 모래사장이 보인다. 지금이야
의자와 테이블이 한쪽 구석에 치워져 있지만, 한 여름
바다 바람에
스피커를 통해서긴 해도 음악 들으며 맥주 한 잔 하기 좋겠다.
밤 하늘에 별이라도 반짝인다던가 낙조가 멋지다던가하면
분위기상 상대가 누구라도 작업
성공률 90% 쯤 되겠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동안 하늘은 맑았다. 비교적. 간간히 햇빛도 비췄으니 오늘
일몰은 기대해 볼 만 하겠다. 필름을 더 준비할 걸 그랬나?
자리를 맡아놔야 할까? 여기 말고 더 멋진 곳은 없나...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런데 이게 이게 웬 하늘의 장난? 점점 밀려드는
바닷물에 한눈을 팔고 있는데 어느새 하늘엔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아예 햇빛이나
비추지 말고 첨부터 흐렸으면 기대나 안하지. 기대는 잔뜩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음덕은 무슨 음덕... 혹시나가 역시나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때가 되니 어느새 낙조 사진에 빠지지 않는 장소, 할머니
할아버지 바위 주변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카메라 다리로
먼저 자리 잡아놓고, 서로 사진 찍어주며 손바닥 만큼 비춘
저녁놀이건만 이것도 언제 없어질까 불안한지 '빨리빨리'를
연발한다. 하지만 오늘의 구름 낀 흐린 날씨는 뜻밖의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혹 이게 일출이 아닐까 하는 분위기.
저 밀려드는 파도가 동해가 아닌가, 지금이 새벽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일몰이야 일출이야...?
저녁시간의
서해바다는 서해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한껏 올라온 바닷물은
꽃지 해수욕장의 모래밭을
거의 다 삼켜 버려 저만치서 철석거리던 파도가 부쩍
차 올라왔다. 고장난 듯 개벌에 놓여있던 작은 고깃배들은
바다 물이 가득차 제법 항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파도도
조금은 거칠어 진 듯 방심한 젊은 남녀의 발을 홀딱 젹셔놨다.
하지만 그들이 발인들 시려울까....
처음
도착해 황량해 한 꽃지 해수욕장은 저녁이 되니 오히려
활기가 느껴진다. 또 가득찬 바닷물이 서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한다.
그리고 그동안 머문 몇시간이 친숙함을 만든건지는 몰라도
이제는 좀 덜 쓸쓸해 보인다. 재기하는 왕년의 스타 모습인가...?
아무튼 여름의 왕성함은 아니지만, 멋진 낙조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운치있다. 토요일 오후 조금 서둘러 가볍게 다녀
올 만하다. 차가 없어 불편했고 어쩔 수 없이
꽃지에만 머무른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에 차로, 그리고
일행을 하나, 둘 끌고 오리라 다짐한다. 바람 맞은 광녀의
머리를 매만지면서 터미널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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