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이 결여된 삶 / 민 14: 1-3,10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데 그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오늘 설교 제목을 “말씀이 결여된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무엇이나 결핍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영양이 결핍되거나 양식이 결핍되면 삶에 불균형을 낳습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경제파동이 발생한 것도 결핍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계가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도 영성과 말씀의 결핍이 아주 좋지 않은 불균형을 낳습니다. 이 영성의 불균형은 신앙에 문제를 야기하고 사고와 판단에 지대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착오하고 그릇 판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풍성한 영적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생명으로 말씀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주신 것이 천국에 대한 언약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제 일성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에 새 길을 제시하셨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안내하셨습니다. 그 언약과 말씀을 마음에 잉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과 언약에는 무한한 힘과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잉태하고 힘입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이 말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잘 나타나 있는 사례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모세는 마침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입구인 바란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12지파에서 1명씩 12명의 지도자를 차출해서 들어갈 땅 가나안을 실사하기 위해서 정탐을 실시했습니다. 13장21절을 보면 “신광야에서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광야는 가나안땅 제일 남쪽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맛 어귀는 최북단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땅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약 160km의 땅을 두루 살펴보고 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2명의 지도자를 엄선해서 중책을 맡겨 40일 동안 정탐을 실시하라고 보냈습니다. 그 12명의 정탐꾼들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침내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 내용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12명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긍정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 긍정은 절대적인 긍정이었고 그 땅은 언약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땅을 정복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고하고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땅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사람을 삼킬 정도이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장대 같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 그리고 그곳 성벽은 철벽으로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백성들이 누구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참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정신도, 생각도, 말도, 사고도, 판단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조직이 갈등하고 불화하고 분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10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잊었습니다. 그 언약은 신앙의 근거인데 불행하게도 그 언약을 잊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성경에 나오는 언약, 약속, 계시, 섭리,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약속, 계시, 말씀을 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래 불투명
미래는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내일, 미래, 장차, 먼 훗날, 저 산 너머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오늘 현재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미래는 천국입니다, 언약입니다,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면 그 천국이 보입니다. 언약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보입니다. 장차 있을 심판이 보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어질 상급도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장차 주어질 상을 보았습니다. 그 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상을 바라보고 매일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종살이를 하는 동안 인내로 이겨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에서 본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종살이와 옥중생활을 잘 이겨나갔습니다. 그가 일찍이 꿈에서 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내일, 언약,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을 보지도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꿈도, 미래도, 언약도, 말씀도 없으니까 가나안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의 땅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현실 더 부각
가나안땅에 가서 본 것은 그곳의 땅이 거칠다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키가 큰 것만 보였습니다. 성이 견고한 것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가져온 포도송이가 너무 커서 두 사람이 메고 온 것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견고한 성처럼 보였지만 어디엔가 허점이 있다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크고 견고하고 황무지 같은 땅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마음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언약도, 하나님 약속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모양에 덮여 버립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수없이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한 목적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한 것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수 없이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이 무서운 현실은 내 안에서 믿음이 약해질 때, 언약이 흐려질 때, 말씀이 고갈될 될 때 더 크게 나타납니다. 내 안에 믿음과 말씀과 영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현실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두려워하지도 무섭게 여기지도 않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피곤도 없습니다. 고난도 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찬송을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 언약과 약속과 말씀과 주의 영이 내 마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난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감사하고 기쁨이 있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언약이 흐려질 때는 앞이 캄캄해 옵니다. 가난이 무섭고 그래서 더 피곤하고 미래가 두려워집니다. 거기에서 무슨 소망적인 생각이 나오고 안목이 나오고 올바른 판단이 나오겠습니까. 그때 나오는 말은 불평과 불만과 짜증과 넋두리와 두려움의 말들만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 10명의 정탐꾼들은 마음에 언약도 말씀도 영도 고갈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갔다 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암담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현실과 그곳 사람들의 건장한 모습과 견고한 성만 눈에 강하게 띄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온 말이 모두 두려운 보고뿐이었습니다.
지도자는 그래서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꿈이 없고 말씀도 없고 언약도 안목도 없는 지도자는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보고를 듣고 자신들만 비관한 것이 아니고 온 백성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였고 낙심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여 그 순박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힘
말씀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희망이고 가능이고 긍정이고 소망입니다. 말씀에 의지해 살고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 살면 환경과 처지와 상관없이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 그곳은 어디나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대답이나 언어나 말이나 생각은 한결같이 밝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영에 의지하지 못하고 말씀을 떠난 삶에는 현실만 강하게 대두되고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불평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 10명의 지도자들은 언약을 잊었고 말씀의 힘도 상실했으니까 나오는 생각은 모두 부정과 불신과 불가능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특히 신앙지도자의 요건은 말씀에 대한 의지력이고 성령에 대한 의지력과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자신감이, 믿음이, 긍정의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사고가 긍정적이어야 하고 미래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그런 안목이 없다면 그 조직은 불행하게도 전진하거나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대부분 역사가 후퇴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때 그 10명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생긴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명단이 민 13장4-16절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그것은 대대로 씻어지지 않는 수치였고 불명예였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출애굽의 목적지인 가나안을 앞두고 그 역사의 길을 가로 막았던 장본인들을 역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들은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억지로 가로막았던 사람들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악평을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결과 온 백성들이 그날 밤 소리 높여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질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희망을, 소망을, 기대를 꺾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흘러가야 할 역사를 멈추게 하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로를 가로막는 것도 다 죄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내 마음에서 원망이 솟아나오거나 요즘 특히 웬일인지 짜증이 많이 나온다거나 누군가가가 괜히 보기 싫어진다거나 미래가 암담하다거나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온다거나 하면 여러분 자신을 한번 깊이 살펴보십시오. 살펴보면 틀림없이 내 안에 말씀이 결여되어 있거나 영이 고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모세는 보내기 전에 기도회를 하고 보냈어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하나님께서 수차례 주신 언약들을 다시 확인시키고 말씀을 회복시킨 후에 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것들을 생략하고 그들을 그냥 보낸 것이 잘못입니다.
섭리 잊음
이 대목에서 가장 슬픈 현실은 그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주어졌던 하나님의 섭리를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수차례 주신 언약의 말씀들을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기까지 나타났던 수많은 기적들을 그들은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출애굽할 때까지 주어진 10가지 재앙들, 홍해를 건널 때 있었던 그 통쾌한 기적, 마른 광야에서 주어진 구름기둥과 불기둥, 반석에서 물을 내 마셨던 일, 만나를 먹었던 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적들을 손쉽게 물리쳤던 일 등 얼마나 많은 섭리와 기적과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10명은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키가 큰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 땅의 박토를 보는 순간, 견고한 성을 보는 순간, 그 섭리들과 기적들과 하나님의 손길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철병거가 쫒아올 때 불기둥이 막았던 것도, 홍해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해서 쩔쩔맬 때 넘실거리던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져 유유히 건너가던 일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 풍랑이 너무 크게 보였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 순간 방금 전에 있었던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이시던 그 섭리의 주님이 그 옆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넘실거리는 파도가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0명의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보고 뿐 아니고 사실도 왜곡했습니다. 너무 커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온 포도송이를 가져왔으면서도 그 땅이 사람을 삼킬 만큼 박토라고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는 좋은 면은 안보이고 좋지 않은 면만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언약도 잊고, 말씀도 상실하고,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만 낙심했으면 괜찮은데 자신은 물론이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파급되는 효과가 너무 컸습니다.
행복도 전염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소망, 희망, 행복은 전염되는 효과가 너무 작습니다. 그에 비해서 어두움, 절망, 낙심, 분노, 부정은 전염성이 너무 큽니다. 백성들에게 오직 희망과 소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분노하고 절망하고 밤새 통곡하다가 마침내 돌을 들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10명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너무 불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듣고 분노하고 불신하고 통곡했던 그 백성들도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모세도 아론도 기성세대들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그 백성들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40여 년간 광야에서 재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그런 생각, 사고, 자세, 불평, 불신 등 언약을 잊고 말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서 이 말씀과 언약의 믿음을 갉아먹고 잊어버리게 하고 영을 소멸시키는 모든 질투, 투기, 경쟁심, 물욕. 현실집착 삶, 탐욕들을 조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이 10명과 똑같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즉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어진 천국도 잃어버리게도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이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이 말씀이 내게 힘과 깊은 안목과 능력과 언약을 믿게 하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이 내게 꿈과 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도 가지게 합니다. 겨자씨는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 씨가 땅에 심겨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의 근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이 말씀과 언약이 있으면 주님은 내게 말씀으로 오시고 주님으로 오시고 구세주로 오시고 메시야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움직여 주어진 소명의 삶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정필도 목사 / 이스라엘 백성의 통곡 (민 14:1-10)
우리가 어떤 의식구조를 가지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6.25 사변 직전에 대학은 물론 중?고등학교까지 공산주의 사상이 번져가서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갑자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선생님을 때려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에서도 그런 일이 막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가정에서는 같은 형제지만 공산주의 편에 서는 형제와 그것을 반대하는 형제가 원수가 되어서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살아야 할 형제들이 원수가 되어 버렸어요. 심지어는 부모와 원수가 된 사람도 있어요. 고등학교 학생 정도라면 그저 공부나 열심히 해야 할 그런 나이인데 이 세상을 공산화해야 한다고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반대하는 자는 다 죽여버려야 된다는 악독한 생각을 가지고 사랑해야 할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는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잘못된 사상이 이렇게 사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의식구조가 달라요. 그 사람이 어떤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집니다.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의식구조에 따라서 보는 눈이 다르고, 그 사건에 대한 반응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달라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의식구조를 가지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대표로 뽑힌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했습니다(민 13:25). 그리고 돌아와서 이 가나안 땅에서 가져온 실과를 백성들에게 보여 주면서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클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신장이 얼마나 큰지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그들과 비교해 보니까 꼭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다 틀렸다”고 말했어요. 이 때 갈렙은 백성을 안도시키며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말했지만 아무도 이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10명의 정탐꾼들이 하는 말만 듣고 온 백성이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통곡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막 원망하면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시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했어요. 이 때 여호수아가 옷을 찢으며 갈렙과 함께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좌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게 외쳤지만 온 회중이 돌을 들고 때려죽이려고 했어요.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게 됐어요.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이들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말하는 것이 머리 속에 일단 입력이 되니까 “아. 이제는 죽었구나. 야 거기는 성읍이 굉장하고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우리는 메뚜기와 같아서 게임이 안 되겠구나. 우리는 죽었다. 끝났다.” 그 생각으로 꽉 차버리니까 아무리 믿음의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반대하는 말을 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넘치는 거예요. 아직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이미 자기들은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통곡을 해요. 이 모습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셨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틀렸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없어졌는데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여러분 여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신문이나 방송 등 여론을 형성하는 매스컴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이상하게 수군거리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그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면 세상이 갑자기 뒤집혀요. 이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신문사나 방송국에 많이 들어가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같은 목사도 영향력이 있지만 언론기관에 들어가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으로 모든 여론을 형성하고, 이 백성들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면 굉장히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이 여론의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고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의식구조가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네 여자를 데리고 살았어요. 레아를 통해서 아들 여섯 명과 딸 한 명을 얻었고 레아가 늘 데리고 다니는 여종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또 레아의 동생 라헬을 통해서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라헬의 몸종 빌하를 통해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아들 단과 납달리를 낳았어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한 남자에게 네 명의 여자가 있고, 어머니가 서로 다른 자식이 열세 명이나 있는 그 집안 꼴이 어떻겠는가 상상해 보세요. 이 아이들 중에 누가 가장 삐뚤어지게 자랐을 것 같습니까? 실바와 빌하는 몸종들입니다. 똑같은 야곱의 아들들이지만, 돈으로 사고 파는 아주 미천한 몸종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어렸을 때는 모르고 자랐지만, 조금 자라나서 철이 들고 운명적으로 자기들은 종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임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에는 증오심이 막 생겼을 거예요. 자기 부모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원망했을 거예요. “왜 나를 하필이면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게 했느냐? 왜 하필이면 나를 미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나게 했느냐?” 그 원망하는 마음이 쓴 뿌리가 되어서 어렸을 때부터 아주 절망적이고 부정적이고 증오심으로 가득 찬 악독한 마음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창세기 37:2) 요셉이 이복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면서 이 형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에게 다 고했다고 그랬어요. 이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해서 아주 늙어서 얻은 열한 번째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랑해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채색옷을 입혀서 마치 왕자처럼 구별을 해서 키웠어요. 똑같은 아들들인데 그 중 한 아들에게만 제일 좋은 비단옷을 입혔으니 요셉이 얼마나 밉겠어요. 그런데다가 어느 날 희한한 꿈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무슨 왕이나 될 것처럼 다른 형들이 자기에게 복종하는 꿈 이야기를 하니까 형들이 더욱더 미워했다고 그랬어요. 아마 그 마음 속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겁니다. ‘저 조그만 놈 죽여버려야겠다.’ 요셉의 형들이 모두 다 똑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생각이 전체를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열 명의 형들의 생각이 다 똑같지는 않아도 대다수의 생각이 나머지 사람들을 정복해 버리게 된 거예요. 이렇게 평소에 요셉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요셉을 없애버릴 기회가 왔어요.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이 양치는 곳에 먹을 것을 갖고 왔어요. “저거 죽여버려서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기회가 오니까 평소의 생각대로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행동하게 된 거예요. 다행히 르우벤과 유다의 반대로 죽이지는 않고 노예로 팔아버려서 목숨은 건지게 됩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자체가 야곱의 형편없는 열두 아들의 자손입니다. 그렇게 엉망으로 자라난 그들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훌륭한 믿음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몇 프로나 되겠습니까. 아마 10%도 안 될 거예요. 대부분은 믿음이 없는 부모이거나 믿음이 있어도 별로 신통치 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그런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을 거예요. 그러므로 특별히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잘못된 성품, 잘못된 인격, 잘못된 의식구조를 가지고 사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라면서 본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탄은 계속해서 잘못된 생각을 우리 마음 속에 집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뚤어진 생각을 하기 쉽고 잘못된 의식구조를 가지고 살아가기 쉬운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영의 생각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만이 영의 생각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그런 못된 생각만 하고 못된 짓만 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만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어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많이 합니까? 영의 생각을 많이 합니까? 육신의 생각을 많이 합니까? 철야기도회에 나오신 분들,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적어도 영의 생각을 따라서 온 것입니다. “오늘 내가 철야기도 나가겠다. 이게 사는 길이다. 철야기도 나가면 은혜 받는다.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이 영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잘못된 의식]
1. 고아들이 가지기 쉬운 의식
고아들이 가지기 쉬운 의식 가운데 아주 잘못된 의식은 <자기는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사랑 받아야 되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때 증오심이 제일 커지는 것입니다. 원망이 제일 커지는 거예요. 이 버림받았다고 하는 생각이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만드는지 몰라요. 세상에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마음이 항상 원망 불평으로 가득 차서 증오심과 반항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거예요.
또 고아들이 가지기 쉬운 의식은 <자기는 불행하다>는 거예요. 자기가 건강한데도, 얼굴이 그렇게 잘 생겼는데도 그냥 불행하다는 의식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거예요. 실제 상황이 불행하지 않고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불행한 의식을 가지고 살면 그 의식이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우리가 행복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행복하다는 그 의식이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자입니다. 구원받았으니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니 행복자입니다.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사람이니 행복자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나는 행복자라는 사실을 아셔야지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불행하다는 생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고아들이 가지기 쉬운 의식은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버렸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 차서 세상에 대한 반항심이 그 마음에 끓어오르는 이 악한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는 거예요.
2. 실패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잘못된 의식
실패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잘못된 의식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나는 이제 희망이 없으니 차라리 자살해버리는 것이 낫겠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생각은 얼마나 무서운 잘못된 생각인지 몰라요. 이건 마귀가 주는 거예요.
또 실패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의식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 소망도 없고 바라볼 것도 없고 끝났다는 생각은 사탄이 주는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마귀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가이드포스트 책에 보니까 미국의 예쁜 처녀가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은 처녀여서 낙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예요. 대신 이 처녀는 자기 뱃속에 생긴 아이를 통해서 이 아이를 생기게 만든 그 악독한 어떤 남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쥐약이라도 먹고 죽어버리려고 하기 쉬운데, 은혜 받은 이 처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았는데 자기 얼굴을 쏙 빼 닮은 예쁜 딸을 낳았어요. 자기가 기를 수가 없어서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서 키웠어요. 미국에서는 한국과는 달리 데려다 키운 아이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주고 자라나면 그 아이의 부모도 만나게 해주는데 20년쯤 지난 후에 그 어머니와 드디어 만났어요. 그 딸도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얼마나 예쁘게 잘 자랐는지 몰라요. 마귀는 “끝났다. 너는 더 살 필요가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절망감을 주지만 이 처녀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혼도 잘 하고 행복하게 사는 그런 사람이 됐어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는 절대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실패한 사람이 가지기 쉬운 잘못된 의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식입니다. 패배의식입니다.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리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런 패배의식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배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가나안 땅에 사는 이 아낙 자손과는 게임이 되지 않고,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도 없다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 완전히 자기들은 그 앞에 메뚜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싸울 수 없다는 거예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되는데 하나님을 붙잡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절망에 빠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어도 하나님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마세요.
3. 그밖에 잘못된 의식
또 잘못된 의식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의식입니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믿을 놈이 없다고 생각하고 항상 의심하면서 불안하게 살다보면 완전히 꼴이 이상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으니까 다 도둑놈이고 다 사기꾼으로 보여요.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못 살아요. 이 잘못된 의식 자체가 자기 인생을 망치는 거예요. 속을 때 속더라도 믿고 사는 사람이 편한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도와줄 수 있는 마음, 베풀 수 있는 마음,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대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은 자기 마음 자체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황폐해진 인간이에요. 제가 언젠가부터 어디를 가든지 훌륭한 목사님이 많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쓰는 종이 많고, 어디를 가든지 나보다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많다는 것을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 가든지 그 마음 가지고 교회를 보고 주의 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지 몰라요. 선교지에 가서도 그 마음 가지고 선교사들을 보기 시작하니까 내 눈에 정말 훌륭한 선교사들이 너무 너무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이 악하다.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있다. 세상에 도둑놈만 있다.’는 생각은 절대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 자체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또 잘못된 의식은 <상대편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아주 악독한 생각입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남을 죽이려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죽습니다. 아니면 반드시 함께 죽습니다. 우리나라 정치가들을 보면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려고 하지만 결국은 함께 죽어요. 내가 살려면 남을 살려야 합니다. 내가 살려면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써야 해요. 내가 다른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쓰면 모든 사람이 나를 살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거예요.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망하게 하는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자기만 잘 살겠다고 속이고 빼앗고, 그래서 잘 될 것 같지만 자기 마음도 지옥이 되고 세상도 지옥이 되고 결국에는 함께 망하는 거예요. 내가 남을 죽이려고 하면 그 사람도 역시 나를 죽이려고 할 거예요. 내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사람이 다 나를 죽이려고 한꺼번에 덤빌 거예요. 결국은 내가 먼저 죽어요. 여러분 마귀가 주는 이런 의식을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싸우다가 죽는 것보다는 노예가 되는 것이 낫다>고 하는 생각은 노예근성인데 마귀가 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근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싸우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비굴한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사탄은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집어넣어 주어서 이 잘못된 생각의 지배를 받아서 그것이 완전히 자기의 고정관념이 되고 의식이 돼서 결국에는 망치고 마는 거예요. 이렇게 잘못된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저주입니다. 누구나 잘못된 의식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잘못된 의식을 다 벗어버려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의식]
1.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마가복음 9장 23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 그런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그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이기고 지는 것과 성공과 실패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홍해가 놓여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의 콧김으로 홍해가 갈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지혜가 크시고 또 능력이 크시고 사랑이 크시고 생각이 아주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골리앗과 싸운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골리앗은 상대도 안 되는 거예요. 가나안 땅 정복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 백성이 아무리 광대하고 숫자가 많아도 상관없어요. 하나님을 이길 세력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 이 믿음의 의식, 믿음의 실력,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언제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2. 과거에 아무리 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예수님만 만나면 해결된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5명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진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과거가 더럽고 부끄럽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예수님 만나니까 다 해결되는 거예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얼마나 멋지게 변합니까. 재산의 반을 다 나누어주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 5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삭개오가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예수님 만나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어거스틴이 예수님을 만날 때 성자가 된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만 만나면 과거가 어떠했든지 상관없어요. 여러분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
여러분 과거에 매이지 마세요. 과거를 믿지도 마세요. 회개하고 바르게 살면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하나님은 기억도 아니하시겠다고 그러셨어요. 아무리 죄가 많아도 그 죄를 하나도 기억치 아니하시고 그가 돌아와 회개하고 의를 행하면 그 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어요.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아무리 의롭게 살고 좋은 일만 했다고 할지라도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면 과거에 행한 의는 하나님이 하나도 기억치 아니하시고 현재에 행하는 그 악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에스겔서에 나오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현재를 보신다. 하나님은 현재의 나를 보신다.” 과거의 죄 때문에 자꾸 고민하고, 그 죄에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로 돌아갑니다. 생각하는 대로 되는 거예요. 제일 좋은 것은 불행했던 과거는 잊어버리세요. 과거의 죄도 회개했으면 완전히 없는 것으로 돌리세요. 마귀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의식을 통해서 자꾸만 과거의 죄를 생각하게 하고 과거로 고민하게 하고 회개하면서도 고민하게 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이는 거예요. 절대로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과거의 죄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 죄 사함 받았습니다. 다 해결된 겁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버리고 과거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4. 생각대로 된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고 나쁜 생각을 가지고 살면 나쁜 일이 많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으면 그 사람이 기분 좋을 리가 있어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근심되고 화가 나고 걱정이 되고 “부도나면 난 어쩌나. 집 날아가는 것은 아닌가. 길거리로 나앉는 것은 아닌가.” 별별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들어오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해도 그 생각이 얼굴에 다 써 있어요. 그래서 얼굴 자체가 안되게 만드는 얼굴이 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도 일이 안 돼요. 얼굴만 보면 정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 많이 하고 말씀 듣고 은혜 받고 “분명히 오늘은 된다. 잘 될 것이다.”라고 믿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고 혈액순환이 잘 되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잘 된다. 잘 될 것이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신뢰를 얻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의 물건을 팔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된다는 그 생각이 잘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생각은 성령께서 축복으로 주시는 것이고 나쁜 생각은 마귀가 저주로 주는 것입니다. 당장 죽더라도 좋은 생각하고, 당장 망하더라도 잘 되는 생각을 하세요. 복된 생각을 하세요.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나쁜 생각을 갖지 말고 좋은 생각만 가지기 바랍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나는 행복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것이다.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 언제나 이렇게 좋은 말을 자꾸 하세요. 자기가 자기에게 하세요. 그래서 완전히 좋은 생각이 의식을 사로잡게 하세요. 항상 좋은 말, 축복의 말을 자신에게 하시기 바랍니다.
5.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붙잡으면 살 길이 열립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산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해결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다.> 언제나 이 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하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체험하고 그러면 의식이 완전히 고정의식이 되어서 마귀가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어요.
또 늦었다고 생각이 될 때 바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두 아들의 비유를 보면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해라.”고 했을 때, 큰아들은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해놓고 일은 안 했어요. 작은 아들은 “싫어요. 안 갈래요.” 해놓고는 실컷 놀다 보니까 죄송한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버지 말씀 듣고 일했으면 좋았을 것을... 불효자식이구나. 이제라도 가서 일하자.’ 뒤늦게 후회하고 가서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늦더라도 시작하는 사람이 앞서게 되는 거예요. 제가 강도사고시 칠 때에 첫 시간이 조직 신앙인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가만히 보니까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나 같은 사람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도 아는 것이 없겠지.’ 내가 어려우면 다른 사람도 어려운 거예요. 쉬우면 다른 사람도 쉬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강도사 포기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기도하면서 성령의 지혜를 구하고 대학 4년과 신학교 3년 동안 공부한 것을 종합해서 서론, 본론, 결론을 썼습니다. 끝난 뒤에 친구들이 같이 맞춰보는데 다 답이 달라요. 나중에 보니까 저만 됐는데 아무래도 글씨를 잘 써서 봐준 것 같아요. 여러분,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어떻게 보면 가장 빠를 때입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모든 게 늦었다고 생각될 때 빨리 시작하세요. 알고 보면 그 사람이 제일 빨리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인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참고 견디면서 계속 가는 사람이 이깁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처럼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거예요. 재판관 찾아가서 아예 문 앞에 서서 아침 저녁으로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졸라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매달리세요. 아브라함은 25년 만에 독자 이삭을 낳았습니다. 25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큰 축복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울부짖었겠습니까? 그 기도가 13년 만에 응답이 됐어요. 중요한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끈기 있게 물고늘어지고 참고 견디면서 매달리는 겁니다. 계속 하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이 성공하고 그 사람이 이깁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어요. 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느냐고 물어보니까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셨다는 거예요. 이미 지나가셨으면 끝난 상황이지만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나 목이 터져라 외쳤는지 아마 죽을 힘을 다해서 외쳤던 것 같아요. 옆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시끄럽다고 하는데도 더 크게 부르짖는 거예요. 왜요? 예수님 놓치면 끝나니까. 이 바디매오처럼 여러분도 절대로 물러서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하면 아직 기회는 있는 겁니다. 내가 죽는 날이 끝나는 날입니다. 죽지 아니하는 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기회가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달라질지 모릅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마세요. 성공했다고 자만해도 안 되고, 실패했다고 단언해도 안 됩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잘못된 의식은 버리고 올바른 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그 말씀을 믿고, 말씀이 주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