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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자연과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이 교차하는 스크린. 간간이 터져 나오는 탄성과 비명, 그리고 박수. 아이들은 넋을 잃은 채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그랬다. 알듯 말듯 모호한 줄거리가 몰입을 방해했고 판타지라는 걸 알면서도 '말도 안되는' 장면들이 불편했다. (나는 영화란 모름지기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세대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앉아있자니 내가 쌀독의 돌멩이나 된 것처럼 자꾸만 버성겼다. 이런 걸 세대차이라고 해야 하나.
이튿날 집에서 아이와 함께 또 한 편의 영화를 봤다. 도서관서 빌려온 '포레스트 검프'였다. 1994년 개봉. 톰 행크스 주연. IQ 75 주인공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 영화다. 웃음과 눈물이 있고 사랑과 인생이 있었다. '그래 영화는 역시 이래야 돼.' 10년 만에 다시 보는 영화지만 나는 또 다시 가슴을 쓸었고 콧잔등을 씻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니었나 보다. 나의 강권에 못 이겨 같이 보긴 했지만 지루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란다. 열어 보기 전에는 무엇을 집을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이 따위 대사에 감동하는 나를 아이가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요즘 아이들을 흔히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이라 부른다.
그들에겐 컴퓨터와 첨단 휴대전화, 인터넷, MP3 같은 디지털 기기가 삶의 일부다. 이와 비교해 나 같은 기성세대는 디지털 이주민(Digital Immigrants)이라 불린다.
물론 인터넷을 즐기고 이메일도 주고받고 스마트폰도 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가슴으로가 아니라 머리로 받아들인 세대라는 점에서 디지털 기기는 여전히 작심하고 덤벼야 하는 '도전'의 대상이다. 아무리 영어를 공부해도 '네이티브' 장벽 앞에 늘 주눅 드는 이민자들처럼 말이다.
이주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적 기준을 필사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1세들은 숨이 찬다.
거기다 아날로그 세대로서 디지털 세대를 건사까지 하려니 더 버겁다. 그렇지만 새 환경 새 가치관에 익숙한 아이는 부모 세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늘 당당하기만 하다. 대견하면서도 답답하고 이해는 하지만 때론 섭섭한 까닭이다.
그나마 나로서는 아직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이 앉아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희망이다.
이마저 없다면 부모 자식 세대를 가르는 틈은 더욱 벌어질 지 모를 일이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