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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2:35-40
도적 같은 예수님
(눅 12:35, 개역)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눅 12:36, 개역)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 12:37, 개역)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눅 12:38, 개역)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39, 개역)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눅 12:40, 개역)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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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하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종은 여전히 대기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이런 종과 주인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거론하시는 이유는,
그 누구도 자진해서 종이 되거나
누구의 노예로 살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점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나는 누구의 종으로 사는 것이
자유인으로 사는 보다 더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그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종의 자포자기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소유들 속에서
‘자기’라는 것을 일구어내고,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 것을 포기했다는 말은
곧 나는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할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공들여놓은 것만
애착을 가집니다.
자기로부터 나간 것만
기대하고 고대합니다.
자기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을
기다리는 법은 없습니다.
자신의 손 떼가 묻고
자신의 열정과 열정의 산물이 되는 것만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둑행세는
이러한 인간의 심보를
호응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살며시, 그리고 몰래 들어옴으로서
평소에 인간들이
다른 곳에 정신 팔려 산다는 점을
폭로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곧 인간은
그 누구의 종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본성을
자기의 태도를 통해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즉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원칙에 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지지않는
예수님의 생각을
사람들이 원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늘 살기보다는
잠시 시장통에서 만나 거래하고
곧장 자기만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를
자기 안에 두고 싶어합니다.
밖에서 얻어낸 것을
안에다 쌓아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니
누구에 종속되기 보다는
자기가 쌓아놓은 그 힘을 근거로
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둑같이 덮친다면
사람들은 남들이 불의하게 덮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그런 도둑이 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으로 사는 자들에게
도둑으로 오인되는 방식으로
방문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육으로 맺어질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육으로 이해하려는 자를 피해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으로 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깊은 강원도 골짜기에 사는 할머니에게
성령이 임했다면
비록 그 할머니가 일자무식이라고 해도
일반 육적인 사람들이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모습니다.
“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사실은 내가 달릴 그 자리다.
그 정도로 나는 평생을 살면서
죄만 남기면서 산다”는 고백은
육적인 사람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각입니다.
이럴 때, 이 할머니는 십자가에 관해서
지식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늘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게되는 겁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이 집에 늦게 온 것은
혼인집을 다녀갔기 때문입니다.
혼인이란 단순히
만남의 장이 아닙니다.
선보는 자리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영역을 가지게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혼인생활에 대해서
남녀다 양보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지금 주인집 종의 관계도
이처럼 혼인관계처럼
계속 함께 기거하는 관계입니다.
일시적으로 일하고 봉급 받는
노동자입장이 아닙니다.
즉 자신이 쌓아 둘 소유의 창고가
따로 용납될 수 없는 사이가
혼인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신부를 만들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5을 보세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라고 되어 있습니다.
10명의 처녀에게 내려진 약속은
‘신랑의 외모’가 아니라
‘기름’입니다.
신랑을 어떤 식으로 알아보느냐에 관해서
예수님은 시간을 드리되십니다.
신랑의 용모나
신랑 앞에서의 신부의 장기자랑으로
자기 신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항상 지금 신랑이 올 수 있음에
감격하며 살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이란
말씀과의 일치를 시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즉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면
그것이 곧 구원의 자격을 얻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그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본 사람은 다 느낍니다.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다짐해도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그 수준이
결코 그 말씀이 요구하는 수준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언제쯤 완전히
말씀과 자기 행위가 일치할 것인지를
보장할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늘 미흡한 실천만을 보여주게 되는데
여기서 핑계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온전하게 다 지켜내지 못하지만
언제가 일치되는 날이 올 것을 믿고
쉬지않고 시도를 되풀이합니다.”
라는 식으로 변명합니다.
결국 이것은 강원도 할머니가
그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완벽함에 근거한 자기 가치가
아직도 녹쓸지 않았음을
티를 내려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더욱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게 됩니다.
막 살지 않고
정신차려 성실하게 말씀에 임하게 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의 가치가 향상된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과 소망도 사랑도 아닙니다.
인간이란 외부보다 내부에 치중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신혼여행에서 갓돌아온 신랑신부를 위해 준비한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준비한 음식을 유심히 살펴보면
투박하지만 어머니 특유의 맛과 냄새가
침이 고이게 합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채려진 상만 보기만해도 배부르지만
집안 고유의 입맛이 다가올때
우리의 내부라는 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채찍 맞으신 예수님의 사건’만 활개쳐야 합니다. 우리 죄 때문에 능욕당시는 주님만 있어야 합니다.
이 칼날이 축복입니다. 이 칼날을 가지고 성령께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성도에게 찾아 들어서, 십자가에 근거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이로서 성령은 성도 소유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된 칼날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소비용이요, 소모용으로 쓰여지는 하나님의 일터가 됩니다.
079강-눅12장35-40(도적같은 예수님)-luk1106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2장 35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5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2:35-40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해주지 않습니다. 명칭도 종이에요. 주인이 없는 종은 종이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이 민주주의시대에 자진해서 ‘나 종 되게 해주세요. 날 철저하게 주님의 노예가 되게 해 달라.’고 애타하면서 누군가의 종이 되게 해달라는 이런 식의 교육은 받지를 않았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내가 주인 되기 싫다는 자기선언과 같습니다. ‘나는 노예가 되지 주인은 안하렵니다.’ 하는 겁니다. ‘나에게는 주인이 필요하고 나는 노예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런 자세지요.
그러면 그 노예에 대해서 주인께서 혹독한 지시와 임무와 명령을 내려도 종은 그게 좋아서, 자기에게 주인이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좋아서 즐겁게, 새벽 2시에 오든 새벽 3시에 오든 오늘 말씀처럼 술자시고 오든 어떻게 오든 상관없이, 주인을 만나지 않으면 나는 잠을 못 이룬다는 그 정도가 되는 관계, 그게 바로 종의 관계라는 겁니다.
강원도 동강과도 같은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서 죽 자라온 일자무식의 어떤 분이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이 우연히 복음을 들었다고 칩시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합시다. 신학도 몰라, 성경도 읽어본 적도 없어, 성령 받아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이 그 다음에 내놓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자기 죄를 용서해주셨다는데 대한 사랑이겠지요. 그 사랑은 신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무식한 할머니 한 번 따져봅시다.’ 그것은 따질 것도 없어요. 그 할머니는 ‘나는 그냥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분을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교회가 뭐가 더 필요합니까? 뭐가 더 필요해요?
그 할머니가 완벽하게 산다? 대체 그 할머니에게 완벽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뭘 알아야 완벽하게 살지요? 법을 압니까, 뭘 압니까? 다만 성령 받아서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 외에 뭘 따질 것이 있겠어요. 그 할머니에게 만약에 성질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은 사기꾼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라고 할 경우에만 그 할머니는 화를 낼 거예요.
그것 말고 ‘할머니, 당신은 나쁜 여자입니다. 당신은 죄만 지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죄인이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요. 내가 죄인 맞으니까 돌아가신 것 맞잖아요. 십자가를 사랑하잖아요. 나중에 그 할머니가 성경을 보면 그 체험이 그대로 다 나와 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아, 그게 이런 뜻이구나.’가 다 나오는 겁니다. 성경구절 외우고 배운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이 지독한 자기사랑으로 단단한 돌멩이처럼 굳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나 잘났다.’ 이것으로 굳어질 수가 있어요. ‘나 잘났다.’ 그것이 무슨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까?
사랑 근처도 안 갔어요. 오히려 사랑 없음을 감추기 위한 신학적인 요술, 책략을 쓰는 겁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새벽 2시건 3시건 간에 주님을 보고 싶어 한다면 누가 와서 내 옷차림에 대해서, 누가 내 머리모습에 대해서, 누가 내 행동에 대해서 시비 거는 것,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에요.
본문에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안 해주시는 오늘 말씀은 결국 무슨 이야기이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네가 나를 이용해서 네 잘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나는 너를 혹독하게 대하고 아예 사람취급도 안했는데…….’
자기가 늦게 온다고 연락도 안 해줘놓고 새벽 2시에 계속 대기시켜서 문 안 열어주면 악한 종이라고 문 열어주면 ‘당연히 할 일이지.’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마땅합니다. 저는 종으로서 제 할 일을 다 했습니다.’라고 나온다는 그것은 실천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을 끊어버립니다. 만약에 내가 내 행동에 대해서 집착한다면 우리는 막 살수가 없어요. 막 살면 자기가치가 깨지잖아요. 평소에 교회 나가는 목적, 목사 장로 되는 목적이 뭡니까? 자기 가치를 높이려고 했는데 막 살면 자기가치가 떨어지잖아요. 그러면 남들 앞에 믿음 없는 것처럼 되잖아요.
주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성령 받은 것도 없고 마지막 버틸 것은 뭐냐, 자기를 남에게 견주어서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그것 하나에 목숨 거는 그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강원도 할머니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평생토록 숯이나 파는 할머니, 문자도 이해 못하고 교양이고 상식이고 전혀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와서 말씀 전하는데 성령과 더불어서 말씀을 받았다 칩시다.
이틀 뒤에 그 할머니 돌아가셨다 칩시다. 죽기 전에 그 할머니에게 남아 있는 것이 뭡니까? 순수하게 주님의 것만 남아 있는 거지요. 순수한 주님의 것, 평생 살아온 것이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자기 딴에 어른 말씀대로 산다 한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니까 구역질나는 더러운 죄뿐인 것을, 이제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 주님이 웬 사랑을 이렇게 주셨는지,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서 그 사랑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거예요.
그 할머니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랑밖에 없는 거예요. ‘사랑밖에 난 몰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에요. ‘사랑밖에 난 몰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자기가 자기를 쥐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지요. 그것은 신념이지요. 사랑은 자기사랑을 철수한 것이고 포기한 거예요. 제가 언젠가 강의할 때 자포자기라고 했는데 자포자기한 겁니다.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거나 믿을만한 가치가 없고 예수님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십자가라는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 분의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분의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분이 능욕을 받음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거예요.
항상 구원이란 것이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는데 우리의 평소 관심사는 외부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 내가 행할 수 있는 여기에 집중하고 있는 거예요. 신자가 아닙니다. 이 도적 같은 예수님, 오늘 설교제목이 ‘도적 같은 예수님’이에요. 제 어머니가 주보를 보시고는 ‘어, 도적 같은 예수님.’이라고! 예수님이 도적 같다? 생소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지요.
이해가 안 되지요. 천사 같은 주님, 이러면 다 믿을 것인데 ‘도적 같은 예수님이라니.’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도적놈을 믿는다는 뜻인데. 내 머릿속에는 도적 같은 예수가 없었는데 주님께서는 내게서는 생길 수 없는, 주님덕분에 내가 점잖아지고 주님덕분에 내가 고상해지는 노림수를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도적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도적놈이 돼요.
왜, 스승이 도둑이고 따라서 그를 따르고 믿는 사람도 도둑이고, 교회라는 곳은 도둑 같은 일을 벌이는 도적의 집단, 단체가 되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도적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자기를 소개하는 겁니까? ‘나가라.’ 그 말입니다. 나가라! 같잖으니까 좀 가줘, 그런 뜻이에요. 주님 사랑 안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좀 가줘라, 괜히 헷갈리게 하지 말고 어지럽게 하지 말고 좀 나가라, 그 말이에요.
‘나, 인간에 대해서 최소한의 배려도 해줄 마음이 없는 하나님이거든. 나에 대해 최소한의 배려도 안 해주는 그런 하나님이 밉거든 제발 나가라.’ 그 말이지요. 천국도 안가면서 간다고 고집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 상처주지 말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공들인 곳에 가치를 찾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믿느냐, 자기가 공들인 것이 아니거든요.
사람들이 헌금내기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가 공들인 것이 막 날라 가거든요. 내가 계획 잡고 내가 시도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을 제거해버립니다. 사람들은 내가 공들이지 않은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 힘이라는 것은 사람은 자기를 인하여 자기가 살아요. 자기 때문에 자기가 힘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내 것 아닌 것에 힘을 주고 거기에 신경 쓸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께서는 도적같이 오십니다. 도적같이! 여러분, 사는 것이 심심하고 권태롭습니까? 사람이 권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로또복권을 사시기 바랍니다. 복권을 사면 거기에 기다림이 있어요. 몇 등이든 관계없습니다.
그 기다림 자체, 내가 돈 주고 산 복권이 떨어지든 되든 관계없이 내게서 나온 그 기다림이 있기에 기다리는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는 힘은 계속 발생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는 이유는 그 인간에게서 나온 노선을 비켜가 버리는 겁니다. ‘네가 기다리지도 않고 네가 계획 잡지도 않은 것에 내가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주님께서는 납득이 안 되는, ‘나는 도적같이 온다.’는 표시를 한 겁니다. 도적이 온다는 것은 내 집에 타인이 침입한다는 거지요. 그만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든 뭘 믿든지 간에 내 집 내가 지키는 식으로 줄기차게, 내 교인 내가 관리하고 내 재산 내가 관리하고, 내 집 내가 지키는 식으로만 나서기에 ‘나 예수는 너희에게 아마 도적 같은 존재로 계속해서 굳히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강원도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자기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내 것이라고 우겼던 그것이 십자가에 달려죽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제 sbs에서 문경에서 있었던 십자가해프닝을 재현해서 보여주는데 그 십자가로 자살했던 50대 아저씨가 거기에 뭘 하나 붙였으면 멋졌을 거예요.
뭐냐, ‘내 죽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간다.’ 하면 그 사람 죽고 난 뒤에 추종자를 몇 명 생깁니다. 그 분이 바로 재림 예수였다, 이런 식으로 미친놈 몇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빠트렸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고, ‘너희들의 각자의 집, 내 집, 내 가정, 뭔가 내게서 나온 것만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들에 의해서 내가 버림’받은 거예요.
버림받은 분이 우리 허락도 안 받고 다시 오니까 결국 본의 아니게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만 보내버렸는데, 당신 같은 인간은 죽어서 가는 것이 옳다 하고 보냈는데, 죽여 버렸으니 이제는 두 번 다시 안 나타날 것이라고 마음을 푹 놓고 있는데 죽고 난 뒤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놀랠 거잖아요.
그 모습이 마치 도적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도적 같은 상황으로 오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가 공들인 것에서 눈 돌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믿습니다.’해도 자기가 한 것을 믿고 ‘사랑합니다.’ 해도 자기와 관련된 것만 사랑하지요. 사람들이 기다림에서 어떤 힘이 생기는데 인간들이 기껏 기다리는 것은 자기가 신경 쓰는 그것을 기다려요.
아무리 남편이 애먹여도 밤에 늦게 들어오면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기껏해야 학원에서 늦게 오는 애를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기다리는 것, 목사는 교인 기다리고. 우리 기다림 항목 속에 예수님이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나는 나로 인하여 살지 누군가의 종이 되기 싫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기다림이 내가 예상하고 싶은 어떤 기다림이 있어야 되는데 예상치 않은 난데없는 것이 왔을 때 그것을 가지고 지옥이라 하는 겁니다. 왜 부자가 그토록 지옥이 무서웠느냐 하면, 자기가 미리 예상한 적이 없는 거예요. ‘난 이런 것을 예상하지 않았는데, 난 이런 것을 안 기다렸는데…….’ 기다리지 않은 예상 밖의 기다림이 올 때 그것이 지옥이고 예상 밖의 큰 기쁨이 오는 그 기다림이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예상하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에요. 그것은 가짜입니다. 천국은 탕자가 ‘아마 내가 이런 몰골로 집에 들어가면 몽둥이를 들고 기다릴 거야.’라고 예상했던 그 아버지와 전혀 다른,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자비,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자비, 내가 생각한 긍휼보다 더 큰 긍휼, 내가 예상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반겨줄 때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예상을 항상 뛰어넘어요. 그것을 저는 제 3의 속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결혼관계라고 해요. 본문 36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라고 되어 있어요. 왜 혼인집이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하셨을까?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결국 인간이 실천과 행함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란 육, 인간의 실천과 행함으로서 내놓을 수 없는 것을 내놓을 때 그것을 영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내 놓을 때.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자기가 예상하고 기다렸던 것의 결과를 기다리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가 많이 나오지요. 그 명령과 지시가 나올 때 성령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보고 어떤 포부를 가져요. 어떤 포부냐, ‘내가 이 말씀대로 비슷하게 모방해서 실천하면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고 잘 지키면 잘 지켰다는 보상으로 천국도 가고 상급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지킬 때……, 예를 들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 말씀을 지킬 때 23살 때 지켰다고 자부했는데 27살 때 군대 갔다 와서 23살 때 지킨 그것을 보니 그것은 지킨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철이 없어서 그랬어요. 32살 때 다시 27살 때 지킨 것을 보니까 그것이 미흡해요.
이런 것이 모아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 쓴 것을, 노력한 것을 말씀 지킨 것으로 간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표정들이 좀……. 말씀과 내 행동이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을 어느새 감 잡아요. 감 잡게 되니까 아무리 말씀대로 살아도 그 진짜 말씀과 일치될 수가 없는 겁니다.
지켰다고 우겨도 몇 분 가지고 않고 돌아서면 또 헤헤거리면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을 가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 하나하나 그 모든 말씀을 지킬 때 그 말씀을 완전하게 100퍼센트 못 지킨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으니까, 그리고 남들 앞에 믿음 있음의 모양새를 내야 되고 성령 받은 척도 해야 되니까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언젠가는 지킬 때가 있겠지요.’라는 그 때를 기다리는 그것으로 현재 지킨 것이라고 대신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행함주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할 때 그렇게 이야기해요. 제발 경건하게 사는 사람 구경 좀 해보자. ‘말씀 지키라.’고 하는데 말씀 지키는 그 사람 좀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말씀 지키는 사람 이야기 들어보세요. 전부 다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나오는 이야기라니까요.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 할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을 내놓아야 되는데 자기가 말씀 지켰다고 애썼다는 그 내용을 보면 전부 다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윤리나 도덕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안 믿는 사람도 다 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제가 따져 묻지요. ‘그러면 이런 것을 다 지킨 것이 다 맞습니까?’ 하면 ‘애쓰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지향성이 그겁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지켰습니까?’ ‘애쓰고 있는 그것도 성령의 은혜로 행한 것으로 간주해 달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소유한다든지 우리의 행동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그 뒤에 선이 연결되어 있는데 십자가 피로 연결되어서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 뭐냐, 우리가 이 말씀을 지켰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것을 따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네가 지킨 것 맞아? 그것이 온전히 지킨 거야? 오! 내가 탄식한다. 탄식을 해!’ 성령의 탄식입니다. ‘그것도 의라고 해 낸 거야?’ 죄와 의와 심판에 근거해서 날마다 우리를 책망하는 그 능력이 성령의 책망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계속 죄인 되게 만들어서 십자가의 사랑, ‘너는 이런 종류밖에 안 돼. 너는 백날 해봤자 죄인밖에 안 돼.’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서 십자가 주님의 채찍 맞는 소리와 주님의 신음이 담겨서 그것이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의가 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연결된 성령을 가지고 사람들은 ‘성령 받았으니까 성령에 합당한 행동을 내놓아야 되는데 이 근호 목사는 그것을 가지고 막 살라고 가르친다.’고 해요. ‘그러면 막 안 사시는 그것을 보기나 해 봅시다.’라고 하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노력을 해야지요.’ 노력하는 것과 일치하는 그것과 같습니까?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막 살라고 하면 노력도 안하잖아요.’
인간의 육은 노력해도 육입니다. 노력하는 육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노력하는 육도 육입니다. 7도 8도 5도 아니고 그냥 육(肉)이에요. 강원도 할머니 이야기 세 번째 다시 이야기해 드릴까요? 신학교 나오지도 않았어요. 성경조차 본 적이 없어요. 무식해요. 교회 가서 예배드린 적도 없어요. 그런데 성령 받고 말씀 알고 보니까 그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왜, 성령 받았으니까.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영이거든요.
‘아무개야. 네가 평생 살아온 것이 모아져서 나를 이렇게 죽게 만들었구나.’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네 평생의 죄를 내가 다 씻어줄게.’ 그 할머니에게 남아 있는 것이 뭡니까? ‘나는 주님의 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들이고 남편이었습니다. 집 나간 남편 30년째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만 이제는 돌아오든 말든 네 맘대로 하세요. 나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모습 아닙니까? 옛날에는 젊은 사람이 부럽고……, 그 할머니가 TV 보면서 소녀시대 춤추면 ‘나도 한 때 저렇게 춤추면서 놀 때가 있었지. 슈슈슈, 나도 몸만 받쳐주면 나도 못할 것 없는데.’ 하면서 전에는 회춘을 기다렸지만 이제는 회춘이고 회충이고 간에 지금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동안 얼마나 주변사람 원망했겠습니까? 내가 던진 공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그토록 기다렸는데, 자식에게 그렇게 투자하고 남편에게 그렇게 투자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나를 버리고 나를 못났다고, 가난하다고, 늙었다고 무시하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화내고 스트레스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채찍 맞아야 될 죄에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 사실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무도 나를 반길 사람 없다.’는 겁니다. 각자 자기 살림 꾸리느라고, 교회 나와도 다 자기살림, 자기 것, 자기자식, 자기교회, 내 새끼, 그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데 오직 애 잘되는 그것만 고대하는데 난데없이 내 집인데 담벼락 뚫고 들어왔어요.
‘누구십니까?’ ‘주님이다.’ ‘왜 내 허락 없이 들어오십니까?’ ‘너도 내 허락 없이는 천국 못가.’ 각자 각자의 허락이 있어야 소통이 되는 그것을 가지고 만남이라 합니다. 노사연의 만남, 그것이 만남입니다. 그런데 결혼은 그것이 아니에요. 결혼은 만남이 아니고 제 3의 속성입니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은 결혼이 아닙니다.
만남은 시작에 불과하고 같이 죽 사는 거예요. 그것이 결혼이에요. 여기 집 주인이 새벽에 오는 것은 만남의 장, 미팅 장소에 갔다가 밤늦게 온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 혼인집에 갔다 왔어요. 혼인집에서 혼인의 의미가 계속해서 자기 집의 종과 자기의 관계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종이란 한 번 주인이고 그 다음에는 독립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종은 영원히 종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과 계속 살고 싶은 사람, 손 한번 번쩍 들어보세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결혼식 하는 것이 그냥 한 번 맞선보고 헤어지는 것, 커피숍에서 잠간 만났다 헤어지는 사이가 결혼이 아닙니다. 간 한 번보고 살만 하면 살고 아니면 곧장 헤어지겠다는 그것이 결혼식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은 젊은 애들 언약식이고.
결혼을 한다는 것, 우리 성도는 결혼을 두 번 해야 돼요. 두 번 해야 된다는 말이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육적으로 혈연관계를 맺어서 결혼을 했으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 주님 섬기는데 아주 소홀할 것이다.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져서 이제는 주님은 뒷전이고 남편이 우선이고 남편도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낫다.’ 하지요.
그런데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그것도 문제에요. 언젠가는 좋은 남자 나오겠지, 하는 기다림이 또 있다니까요. 주님이 말한 결혼이라는 것은 완벽한 관계, 안 헤어진다는 넉넉함, 그 넉넉함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이 언제 오셔도 반길 수 있는 혼인관계에 들어간 겁니다.
아파트 경비실에 방송할 때나 촌의 작목반 혹은 이장님이 방송할 때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여기 혹시 나하고 결혼관계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렇게 광고하고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신랑이 나오고 처녀 열 명이 나와요. 이 신랑 보세요.
신랑이 아내가 한 명이 아니고 열 명입니다. 대단하지요. 이 결혼식이 세상적인 결혼식일수가 없어요. 어떻게 한 남자가 열 명하고 결혼합니까? 그러니까 이 결혼식 비유는 ‘인간의 머리, 인간 육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내가 할 테니 진짜 자기 자신이 죄인이며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이 비유를 설명한 겁니다.
행함에 의해서 잔뜩 준비한 사람은 절대로 이 어리석은 처녀, 지혜로운 처녀의 이 비유를 이해 못해요. stupid한 아가씨와 smart한 아가씨, 이 비유를 이해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이 본문, 밤중에 신랑 오는데 기름 준비했다는 이 비유는 자기가 죄인인 사람에게만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육적인 사람도 납득이 되는 것으로 그동안 해석을 해 왔었습니다.
뭐냐, 기름을 준비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졸지 말고 눈을 뜨라는 겁니다. 졸지 말고 눈 뜨려 하면 눈 안에 성냥개비 넣어서 눈꺼풀 받쳐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 떴다고 해서 잠이 안 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마태복음 25장 5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대목이 나와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쌔.” 다 잔다는 말이지요.
주님 오실 때 주님을 반길만한 일체의 행함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같이 졸며 자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그 중에 한 명이라도 안자고 버티면 어떻게 합니까?’ 한 명 안자고 버티면 주님께서 망보다가 그 마지막 한 명이 잠잘 때까지 오지를 않습니다. 다 졸며 잔다면 다 어리석은 여자가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오신 것은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의 신부 티를 내는 자가 아니고……, 참 이런 이야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 그것은 지옥 갑니다. 예수님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예수님이 결정한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뭐냐, 주님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신랑으로 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기름이란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기름을 준비하는 시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 시점을 자꾸 기다리지 말고 지금 주님께서 나와 함께 있다고 느끼고 지금 주님이 왔다면 우리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준비해야 되는 거예요. 주유소 가까운데 있잖아요. 지금 주님이 안와도 나는 왔다고 할 때 나는 내 곁에 계신 주님 앞에서 매일 같이 누구를 사랑해야 됩니까?
주님 밖에 없지요. 그 강원도 할머니가 십년을 산다면 십년 째 가서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에요. 십자가를 아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기다림이 계속 되는 거예요. 꾸벅꾸벅 졸아도. 기름을 준비한 그 지혜로운 처녀에게는 기름을 준비한 것이지 자기 행함을 준비한 것이 아니에요. 졸든지 자든지 막살든지 관계없어요.
주님과 나와 느낄 수 있는 주님이 약속하신 그 무엇, 그 무엇은 뭐냐, 지금 주님이 있을 때 네가 내 신부 맞다고 표 낼 수 있는 그 물건, 그 물건은 소유용이 아니고 소비용입니다. 기름은 환하게 밝히는 용도입니다. 기름을 준비한 것은 그 기름에 불을 지피지 않더라도, 라이터를 켜지 않더라도 항상 기름이 품고 있는 그 인물, 신랑이 그 여자에게는 그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지금 졸고 있다 할지라도.
소유용이 아니고 소비용이에요. 나라는 인생은 주님을 대변하기 위한 소비용입니다. 내가 성령을, 주님을 갖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불태워져야 될 소비용이에요. 우리 몸은 주님의 일터입니다. 성령님의 일터에요. 날마다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내고 다시 한 번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비용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혼인, 이런 주종관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소유용입니다. 제가 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할머니가 탔어요. 제가 한 정의 하잖아요. 남에게 안 지려고 일어났어요. ‘할머니 앉으세요.’ 했어요. 그 할머니가 앉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야야, 여기 앉아라.’ 하고 다 큰 자기 손자를 거기에 앉히는 거예요.
나는 소비했는데 그 할머니는 소유했어요. 예수님은 채찍 맞아 십자가에 피 흘렸는데 인간은 그것을 소유해버립니다. 자기 잘났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 안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남들에게 티내기 위해서.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할 때 이랬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계란과 같아서 항상 그 딱딱한 껍질이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고 했어요.
처음 은혜 받을 때 말랑말랑한 심령도 한주만 지나버리면 그 껍질로 해서 그 표정이 올라가요. ‘나는 지난 주 십자가 은혜 받았다.’ 그래놓고는 한 주 지나면 ‘한주 동안 지난주에 받은 은혜 유지한다고 했는데 나 괜찮지요?’ 은혜 받을 때는 물렁물렁한 심령이 은혜 받은 그것을 소유해 버리니까 ‘나 은혜 받았는데 나를 무시해?’ 해서 딱딱한 껍질이 되지요.
그것을 홀라당 까버립니다.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까야 돼요. 뭐냐, 횟집에 가면 회 뜨는 칼이 있지요. 날카로운 사시미 칼로 그것을 썰어버리지요. 내 몸이 전부 다 회감으로 떠버리면 그 내용이 다 껍데기 밖에 없어요. 더 얇게 또 썰면 계속해서 껍데기로 나누어지겠지요. 이렇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뭔가 덩어리라고 내세울 것이 있지만 주께서는 날마다 썰어서 그 칼날, 사건으로서 회를 뜨게 되면 남는 것은 껍데기 밖에 없어요.
하나의 바깥으로밖에 남지 않아요. 칼날이 중요한 겁니다. 그 칼날이 사건입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주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 부활사건, 재림사건, 말씀으로 죄를 지적하는 사건, 사건이 우리 몸을 관통해버리면 칼날이 왔을 때는 ‘나는 뭔가 되었다.’ 합니다만 그 칼날이 와서 몸뚱이를 작살내 버리면 우리는 다 하나하나가 주의 말씀으로 된 말씀의 날선 칼들에 의해서 새로 조립된 것이고 주님이 일하시는 일터가 된 거예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우리 속에서 활약을 해야 됩니다. ‘오늘 밤에 와도 너 신랑 맞을 수 있나?’ ‘아, 또 기름 잊었다. 기름 준비 해야지.’ 또 믿음을 준비하고 또 다음날 까불다가 또 믿음 준비하고 소망 준비하고 또 사랑 다시 되새기고, 그렇게 하게 하는 그 칼날이 늘 상 우리에게 오는 성령의 예리한 지적, 책망하심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행함을 건질 것이 뭐가 있습니까? 행함을 다 잘라버리는데. 사시미 칼로 전부 다 회쳐버리는데. 주님이 회를 쳐서 갈라놓으면 우리는 뭉쳐서 그것을 ‘나’라고 우기고 회쳐놓으면 또 괜찮은 나라고 우기고. 이 싸움이 평생 계속 가는 거예요. ‘주님은 다시 도적같이 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20년 기다렸는데 난 이제 안속아 넘어갑니다.’ 그 말 나옵니다.
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소유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그것에 의해서 날마다 우리가 난도질당하고 우리는 소비당할 주님의 일터,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차서 주님의 말씀으로 변해가는,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주님이 말씀을 활용하는 자리로 양도해야 되고 우리 속에 이 성경말씀, 도적같이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주님과 종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이, 종아! 너희 주인 아직 안 왔나?’ ‘아직 안 왔다.’ ‘그럼 그냥 자라.’ ‘아니야, 우리 주인이 새벽 2시에 오실지도 몰라.’ ‘주님은 사전에 너한테 늦게 온다고 전화라도 했나?’ ‘아니, 전화 같은 것 없어.’ ‘그럼 그냥 자라 그만.’ ‘아니야, 기다려야 돼.’ 왜, 주님 기다림이 이 종의 특혜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네 것 내 것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것이고 나는 그 분의 말씀을 증거 하는 종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육으로 예수 믿으라면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가치 있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율법을 지킬만한 신념과 노력과 성실함과 인격과 윤리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 십자가인지, 웬 피 인지, 웬 채찍인지, 그게 왜 동원되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난도질당해서 우리 뼈 마디마디마다 주의 피가 스며들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