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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진구님
이번 주간을 주 안에서 신실히 잘 지내셨는지요.
님께서는 창세기 32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 중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므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게 된 것과 관련해서 질문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님이 교회로부터 배워 과거에 알고 있던 내용과 저를 통해서 수요성경공부에서 배운 내용이 완전히 다름을 알고는 그중에 의문이 되고 있는 것에 질문해 주신 것입니다.
님이 말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창세기 32장이 님이 예전에 속했던 교회를 비롯해서 그동안 우리네 주변 교회에서는 심히 왜곡되어 잘못 가르쳐져 왔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있었던 하나님과 야곱과 사이의 씨름을 ‘믿음’이라는 것에서 말하든, ‘기도’라는 것에서 말하든 이것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붙잡고 놓치지 않는 것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님이 알아왔던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야곱의 회심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였다는 것을 야곱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회심사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얍복강을 건넜으나 형 에서를 크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거느린 가족과 가축을 돌보는 일꾼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각각 시간과 거리를 두고 먼저 가게 하여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하고서도 자신은 쉽게 얍복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 신현 - 께서 그 야곱과 날이 새기까지 함께 하시면서 야곱과 씨름하셨습니다.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씨름’이란 우리나라 민속 경기인 모래판에서 행해지는 샅바를 붙들고 겨루어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경기를 하고 있는 광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이죠.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또한 이삭과 하신 그 약속을 또한 야곱에게도 하셨는데, 그래서 밧단아람에서 20년간의 세월에 있는 야곱에게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하셨으며(9절), 이로 인하여 지금 야곱이 온 가족을 거느리고 밧단아람을 떠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12절) 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을 이제 이루실 것으로 야곱을 대면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실 일에 있어서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있음으로 얍복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야곱에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와 살핌 속에 있음을 야곱으로 알게 하며 얍복강을 건너 고향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야곱은 쉽게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접지 못함으로 건너온 얍복강을 일어나서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밤새도록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이 새려할 때에 이러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야곱의 이름을 물으시고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부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시는 것에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실 것인지를 나타내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지닌 뜻은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께서 겨루시다’입니다. 이것은 이 이름을 해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또한 사람들과도 더불어서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란 의미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시고 있는 것에서 일까요? 야곱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내세워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을 하였는데도 그 떼씀을 인하여 하나님이 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는지요. 야곱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였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아니지요.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거스리는 불순종을 하면서도 떼를 쓰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마침내는 받아냄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새롭게 부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야곱이 밤이 새기까지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무서움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주셔서 들어가 거주하게 하셨으며,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에게 주신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란 하나님의 전적인 신실하심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에서 야곱이 확인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한 땅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싸워 이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을 밤이 새기까지 대면하여 하나님께 갖는 믿음의 신실함은 야곱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가실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해 가실 것이란 것입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믈으시고는, “네 이름을 이제부터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고 하며 그 이름에 담아 늘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을 부름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 대면하여 주신 뜻을 앎으로써 지금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또한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존재하는지를 떠올려 하나님을 의존하게 해주심을 알았습니다. 그런 야곱은 말입니다. 자신이 형 에서에 대한 큰 두려움에 있어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 약속으로 주신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전하여 주시고 있으며,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생명이 보전되고 있는 것에서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성취 될 것이기에 그는 또한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에서도 그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살핌을 받아 보전될 것에 대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불러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이 약속을 받은 야곱이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며 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것에서이며, 그런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야곱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에서 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님이 그동안 배워오는 것에서 알고 있듯이 잘못 해석하여 설명하고 적용하는 잘못을 교회가 해 왔습니다. 즉, 창세기 32장에서의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진 씨름이 지닌 본문의 의도와 관련 없는 엉뚱한 말을 하는 설교를 해온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을 ‘야곱의 회심’으로 말해온 것입니다.
그런데요. 님께서 이곳의 내용을 주의하여 살펴 읽어본 결과 그러한 내용을 다루는 기사가 있는지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이곳의 내용을 야곱의 회심 문제로 다룬다면, 그렇다면 이전에 야곱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약속을 재차 말씀하시며 그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야곱이 이에 대하여 신앙에 있는 고백에 있어온 것은 무엇인지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야곱이 있어오지 않은 것인지요.
창세기 32장은 야곱의 회심 문제를 다루고, 그래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그의 환도뼈를 위골되게 함으로 이에 놀란 야곱이 즉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의 씨름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그 야곱은 하나님께 회심하였다는 것이 참으로 억지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교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하나님의 본의를 좇은 설교가 아닌, 지극히 자의적인 설교에 불과하며, 설교자가 자기 마음, 자기 멋대로, 자기 생각으로 지어서 만들어낸 설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설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교에 매료를 느끼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주의하며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님이 질문하게 된 궁금증을 갖는 의문은 이런 내용으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전개되는 것에서 있는 것인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것과 관련한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또는 얍복 시내)을 건너와 먼저 가족들을 여러 무리로 나누어 먼저 보내어서 형 에서를 만나게 되면 그를 위해서 준비한 예물(선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환심을 사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형 에서를 두려워하여 나아가지를 못하고 홀라 남았습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어떤 한 사람(사람/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신현’)이 나타나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러자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야곱은 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환도뼈에 붙은 큰 힘줄은 먹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님은 여기에 있어서 질문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1)“왜 하나님은 야곱에 환도뼈(개역개정성경에는 허벅지 관절/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를 치셨을까?” 하는 것이고,
(2) 또한 “어느 분들은 땡강기도 때문 혹은 12아들을 낳았기에 자녀 생산을 중단시킨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뜻이 있는가?, 아니면 아무 뜻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하나씩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왜 하나님은 야곱에 환도뼈(개역개정성경에는 허벅지 관절/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를 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개역성경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 또는 ‘환도뼈 큰 힘줄’을 쳤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또 다른 한글성경으로는 공동번역이 취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엉덩이뼈’를 쳤다며,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다쳤다고, 엉덩이뼈와 환도뼈를 혼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은 ‘허벅지 관절/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로 번역하였으며, 바른성경, 쉬운성경, 현대어성경, 현대인의성경, 표준새번역, 표준새번역성경은 ‘엉덩이뼈/엉덩이뼈(에 붙어 있는) 힘줄’로 번역하였고, 한글킹제임스성경,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은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환도뼈, 엉덩이뼈, 허벅지 관절,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은 각각 그 표현이 다를 뿐이지 사실상은 모두 같은 곳인 신체의 한 곳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의 원문이 지닌 문자적인 의미는 ‘엉덩이의 우묵한 구멍’, ‘넓적다리의, 움푹한 곳’인데 ‘엉덩이뼈’, ‘허벅지 관절’, ‘환도뼈’로도 바꿔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 신체 하반신에서 대퇴부에 소위 허벅지의 다리(넓적다리)뼈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쳐 위골, 곧 뼈가 어긋나게 하셨으므로 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이곳을 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체 이곳 저곳 많이 있는데 굳이 이곳을 쳐서 환도뼈가 위골되게 하심으로 다리를 절게 하신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야곱의 신체에서 다른 곳이 아닌 환도뼈를 치신 것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하여 추론적인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환도뼈는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 부분으로 종종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곳을 쳐서 위골시키신 것은 지금까지 육적 수단에 의지해 왔던 야곱(의 고집)을 완전히 꺾으신 것으로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케 한 것이라거나, 예표적으로는 장차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이스라엘의 운명이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게 될 때 무력해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것이라든지, 야곱의 허리를 치심으로 그의 몸을 낮춰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라든지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과연 그럴싸한 해석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의 생각입니다. 만일에 추론이 불가피하다고 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니 본문의 내용과 부합한 것으로서의 해석에 의해서, 그래서 본문의 문맥에 의한 의미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야곱이 더 이상 진행하여 나아가지 않는 그의 다리를 치시는 것에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칠 때 그의 신체에서 어느 부분도 해당되지 않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다리가 아닌 손이나 손목을 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을 안 보이게 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몸을 치시는 것에서 그의 환도뼈를 쳐 위골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는다면 그가 날이 새도록, 곧 밤이 새도록 진행하지 않는 그의 다리를 절게 하신 그 이상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님은, “어느 분들은 땡강기도 때문 혹은 12아들을 낳았기에 자녀 생산을 중단시킨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뜻이 있는지, 아니면 아무 뜻이 없는지를 질문하였습니다?
우선 “어느 분들은 땡강기도 때문(에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는 앞에서 설명드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참으로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얍복강을 건너와 그 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이 날이 새기까지 무슨 기도를 하였는지요. 그 기도를 땡강쓰기까지 하면서 한 게 무엇인지요.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3-15)라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에서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의지함에 있는 야곱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라는 믿음에 있는 신앙고백을 한 야곱이, 마침내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이 있는 땅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 받아서,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창 32:9)라고 말한 야곱이, 그리고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12절)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며 그 의지에 있는 야곱이 가족들을 앞서 보내고 나서는 정작 자신은 여전히 형 에서를 두려워하여 가지를 못하고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야곱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대면하여 있었던 것에서 그러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가 무엇을 땡강쓰면서까지 기도했는가요? 아닙니다. 창세기 32장에서의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진 씨름은 그의 기도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곱에게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또한 야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 나가실 것인지를 나타내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부친 이삭과 맺은 언약에 따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님은, “.......혹은 12아들을 낳았기에 자녀 생산을 중단시킨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뜻이 있는지, 아니면 아무 뜻이 없는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해석이 나오는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이는 본문과 이와 관련한 전후 문맥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만난 시점은요 하나님께서 아직도 야곱에게 자녀를 생산케 하시는 것으로 그의 부인의 태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여 나가고 계시고 있는 때에서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언니 레아, 그리고 이 둘의 몸종인 빌하와 실바를 통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11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모두 12명의 아들이 있게 됩니다. 그 막내인 베냐민을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벧엘이라고 불렀던 곳에 이르고 이곳을 떠나 에브랏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라헬이 해산할 기한이 되어서 난산 중에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환도뼈가 위골된 사건이 있은 후에 야곱은 베냐민으로 불리는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12아들 중에 막내인 베냐민은 라헬의 소생인데, 라헬이 난산으로 죽어 가면서 낳은 아들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는 세상을 떠서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습니다(창 34:16-19).
해서 말입니다. “혹은 12 아들을 낳았기에 자녀 생산을 중단시킨 것이다”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자녀를 생산하는 생식력과 관련하여 환도뼈가 언급되고 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창세기 32장에서가 아닌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신뢰하고 있는 충직한 나이 많은 종을 불러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해서 이삭의 아내를 얻게 할 것을 약속하게 하는 것에서 자신의 환도뼈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게 한 것에서입니다. 이렇게 이곳에서의 환도뼈의 경우를 자녀를 생산하는 생식력과 관련하여 보는 것은 여기서는 생식기에 대한 완곡어의 표현으로 보는 때문인데 번성과 능력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얻는 것에서 이 일을 맡는 종의 손을 자신의 환도뼈에 손을 넣게 하여 맹세시킨 것은 이삭의 ‘후손’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은 그의 생식력을 막은 것으로 보는, 그래서 그가 12 아들을 낳았기에 자녀 생산을 중단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에서 벗어난 전혀 틀린 말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잘 가져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오늘 밤, 주 안에서 평안하실 것을 주께 구하며
내일 주일을 주의 복음과 신실한 믿음의 식구들과 더불어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목사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대해 너무 잘못알고있음에 화가납니다.
수 십년을 교회 다녔으면 뭐합니까,제대로 알아야 되는데 불쌍한분들 넘 만은데...감사해요!
노중에 계실 김 찐구 딥다님

비 마니 오는데 저속 운전 하시구 잘 댕겨 오샤유


고마운 하마님.연말에 상 받을 준비하셔.
찐구하니까 학창시절이 생각납니다.별로 좋치안은 기억으로...
울 동네 " 전 찐구 " 란 아해 가 있었슈~~~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