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먼저 읽는 글
1. 노동운동은 고개를 넘는 것과 같다.
2. 더 어려운 때를 생각하자.
3. 80년대 노동운동이 남긴 것.
4. 신자유주의도 영원불멸은 아니다.
5.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깊은 뜻.
6. 희망은 언제나 떠오른다.
-----------------------------------------------------------------
<먼저 읽는 글>
구미공단 가까운 작은 교회에 노동조합 간부들이 서른 명
남짓 모였다. 차례로 일어나 서로 간단히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 아무개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며 물었다.
"위원장님들은 다 어디 가고 직무대행들이 오셨습니까?"
한 노동자가 답했다.
"위원장님들은 구속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큰 소리로 답했다.
"노동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 말은 강사인 나에게 처음부터 '엿'을 먹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강의의 제목이 '노동법의 원리와
체계'였으니 그 대답 속에는 "노동법이 노동자 때려잡는
데에나 쓰이는 세상인데 당신은 무슨 한가하게 노동법 교육을
한답시고 왔느냐?"는 불만이 숨어있는 것이다. 잠시 생각할
짬을 가진 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오늘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이 노동운동을 하실 때에는 노동조합
간부들이라면 어느날 아침에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랬답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오늘날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부르는 시기가 우리 역사에
있었다. 그 일년 동안 우리는 모두 5천 개의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5천 개라는 숫자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
40년 세월 동안 만든 노동조합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세상의
어느 나라에도 이런 역사가 없었다지 않은가... 3천7백 개의
사업장에서 동시에 쟁의가 벌어졌다. TV의 저녁 뉴스
시간에는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의 모습과 펄럭이는
현수막과 휘날리는 수백개의 깃발들이 화면에 가득찼다.
그해 가을 어느날, 나와 함께 저녁밥을 드시며 TV 뉴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어머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을 안 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을 했지. 40년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에 참여했었지. 그때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어느날 깨어 보면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기도 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했지...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25사변 때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고... 나 혼자 정말 운 좋게 살아 남았는데... 모두들
너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 생기고, 말 잘하고,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었지. 니 애비한테도 여지껏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을 했었다."
아, 이 잘난 아들놈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나의
어머니는 전평 활동가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비밀을 4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오셨던 것이었다. 우리의 썩을 놈의
역사가 나의 어머니로 하여금 한 이불 속에서 살을 맞대고
반평생을 살아 온 남편에게조차 그 비밀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나는 목이 메었다.
칠순이 다된 노파로 하여금 40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감히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 용기를 주는
세상, 바로 그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를 통 털어 이런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내가 그날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오늘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고
했던 것은 그런 뜻이었다.
<노동운동은 고개를 넘는 것과 같다>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김금수 선생님 같은 분은 이것을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라고
표현했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되게 되어 있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장명국 씨 같은 이가 오래 전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에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인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더 어려운 때를 생각하자>
지금 노동조합이 매우 어려운 때라고들 말한다. 얼마전 한 토론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민주노총의 간부는 지금의 시기를 "너무나 엄중한
시기"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요즘처럼 노동조합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대는
없었다.
내가 처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70년대 말, 80년대 초반
무렵, 우리는 노동조합의 '노'자조차 어두운 골방에서 숨 죽여가며
속삭여야 했다. 그게 불과 십여년 전이다. 그때 우리는 '노동조합이 과연
이 땅에서 노동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운동틀이냐, 아니냐'라는 문제로
머리통이 터지게 싸웠고 대부분의 활동가들은(아마 90% 이상이었을
것이다) '분단의 벽이 두터운 이 땅 위에서 노동조합은 절대로 적합한
운동틀이 아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나도 물론 그 입장에 동조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소모임 단위의 비합법 정치투쟁'이 우리가 결론 내린
유일한 대안이었다.
의식 있는 활동가가 노동현장에 들어가 어찌어찌 해서 소모임을 하나
만들면 '근로조건 개선'이나 '노동조합' 따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화장실에 낙서 하나를 하더라도 '대머리'를 직접 깨부수는 내용의
낙서를 해야 한다... 노동조합 따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라고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에 대해 이견이
별로 없었다. 다만 우리가 먼저 공격해야 할 대상이 '대머리'인가 아니면
'코쟁이'인가에 대한 다툼이 치열하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불과 몇 년 후를 내다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으로
가슴을 쳤다. 지금은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그 가치를 부인하는 사람은
감히 없다. 그리고 사회·변혁 운동 세력이 모두 힘을 합하는 조직,
이를테면 '통일전선'의 중심에 노동조합이 우뚝 서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또한 별로 없다. 그러니 불과 몇 년 후
우리 사회의 모습이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노조간부들이 지금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와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말인가?. 87년, 88년 이후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지금 "어렵다. 어렵다." 한들 87년 이전 '비합의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아침이면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했던 우리 부모님들의 시대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80년대 노동운동이 남긴 것>
80년대 10년 넘는 세월 동안 노동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다가, 징역을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기도 하다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기도 하다가, 피가
마르는 토론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을 뒤로한 채, 생활에 쫓기는
월급쟁이가 되거나, 자격증 시험에 매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현재와 미래는 지난 시기의 눈물겨운 삶과 잘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바로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지금의 국민의
정부, 지금의 노동조합, 지금의 민주노총, 전직 대통령을 두 사람씩이나
감옥에 집어넣었던 국민 정서는 모두 그들의 몫이다. 어느 후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리 '깡보수'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도 그 '투쟁의 세월'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완고하다. 그 세월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국민교육헌장'으로 엔지니어링된 산업로보트들로 가득 차고
말았을 것이다. 박정희가 만들었던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병적인(pathological) 구조였다. 그 병적인 측면들을 이만큼이라도 극복한
것은 모두 그 '망해버린 세월' 덕분이다. '끝나버린 잔치' 덕분이다.
우리는 승리한 사람들이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성공적인" 발전을 이루게 한 그 썩을 놈의 병적인 구조를
'인간화'시킨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우리들의 지난한 삶은 지금 잠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우리 사회 정서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그 정서가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추운 겨울 두껍게 얼어붙은 강물 밑으로도
강물은 흐르고, 그러다가 봄이 오면 그 물은 다시 얼음을 녹이고 출렁이는
강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도 영원불멸은 아니다>
'신보수주의'의 가면인 '신자유주의'는 한 때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장 만능 신화'는 벌써부터 전세계적으로 거듭되는 금융 위기를 겪으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고 자본의 치열한 경쟁은 국경을 넘어 정부의 통제가
잘 먹혀들지 않는 정도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바로 신자유주의의 발원지인 미국과
영국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굳이 '참스키' 교수의 지적을 끌어다댈
필요도 없이, 골수 자유무역론자인 미국 컬럼비아대의 '자그디시
바그와티' 등이 자본 이동의 자유를 통렬히 비판하기 시작했을 때 세계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처리즘에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던 영국 런던 정경대학의 '존 그레이'가 "다양한 사회·정치적
배경을 지난 세계 각국을 자유시장경제라는 단일체제로 통합하겠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 지적할 때부터 '신자유주의적 합의'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후 급격하게 대두되었던 "자유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테제는 현실 속에서 다시 한번 후퇴를 시작했고, 그 신호탄은
아무래도 92년말 스페인의 사회당 집권과 노르웨이의 노동 진영 재집권
성공이었다. 구 공산권 선거에서의 공산당 집권은 차치하고라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모두 노동당, 사회당 등 노동자가 중심이
된 정당들이 집권에 성공했다. 99년 프랑스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네셔날
대회에는 유럽 선진국의 총수가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세계는 다시
거대한 진보의 물결에 들어선 것이다.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와 소비에트
해체 이후 몰락하리라던 서구 사회주의 진영이 오히려 의연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확대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 발전의 방향은 노동자가 경제적,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는 과정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디 한국 사회뿐이랴,
역사의 과정이 곧 그것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소수에게 부를 집중시키고
국민 대부분인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수백년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깊은 뜻>
98년 8.15 특사로 나온 박노해 시인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실패하면 우리 사회는 87년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굳이 87년을 분기점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자랑스러운 87년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울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권용목 동지가 현대엔진에 노동조합의 깃발을 최초로 꽂으면서...
삽시간에 태화강 둔치에 5만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며칠 후에는
공설운동장에 10만명의 노동자가 모이면서... 2박3일 동안 울산이라는
도시 하나를 노동자들이 완전히 점령하다시피 되어 파출소와 동사무소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그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 광화문에서 껍적대고 있었는데, 노동운동을 지원한다는
놈이 울산에 5만명의 노동자가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허겁지겁 울산에 내려가 저녁나절에 울산에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나서 물었다.
"오늘 5만명이나 모였었다는데, 뭐 나온 자료 있으면 좀 줘봐."
예나 이제나 '자료'부터 찾는 게 배운 놈들의 못되먹은 속성이다.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하지 않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료 몇 개로 실태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폐단은 정부의
산하기관 감사에서 거의 극치를 이룬다. 예전에 문교부가 교사들의 잡무를
덜어준다면서 각종 서류의 폐지를 지시했다가 두어달 후에 감사하러
나와서는 그 서류철부터 보자고 했다지 않은가...
내 말을 듣고, 한 친구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유인물을 한 장
꺼내서 주었다. 조악한 글씨로 '우리의 요구'라고 크게 써진 제목 밑에
'어떻게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구호가 모두 21개나 적혀있었다.
어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그런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어떻게 해달라!'는
요구 사항만 1번부터 21번까지 스물한 개가 적혀 있었다. 요즘은 조합원이
50명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노동조합도 홍보물을 그렇게 유치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5만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발표한 홍보물이 그
수준이었다.
그 21개의 요구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무엇이었을까?
십수년간의 개발독재 밑에서 지나친 저임금에 시달려 왔으니 임금을 몇십
퍼센트 인상하라! 그것이었을까? 물론 임금 인상 요구도 있었으나 그것은
순번이 저 아래 10번쯤이었다. 잠시 각자 맞는 답을 생각해 보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구호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은 때로 지나치게
무식해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쳐도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를 모른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만 알아듣는다. 당시 5만명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첫 번째로 외쳤던 구호가 무엇이었을까? 그 서툰 글씨체로 맨
처음에 적혀 있었던 구호...
그것은 바로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달라!"였다. 그 뒤에 '(두발자유화)'
이렇게 괄호치고 부연 설명까지 되어 있었던 그 홍보물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그 당시 5만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외쳤던 첫 번째 구호가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
달라!"였다니... 대기업일수록 더 그랬다. 노동자들이 머리를 자기
마음대로 기를 수 없었다. '몇 센티미터 이하' 이렇게 회사가 정해 놓으면
해고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절대로 그것보다 더 길게 기를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겠으나 그때는 그랬다.
그럼, 두 번째 구호는 무엇이었을까?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두발자유화' 뒤에 이어지는 구호는 당연히 '복장자율화'이다.
그렇다. "출퇴근시만이라도 사복을 착용하게 해달라!"는 것이 두 번째
요구사항이었다. 그 뒤에 '(복장자율화)' 이렇게 토를 달고 있던 그
구호를 나는 12년이나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작업복 입기를 창피해하지 않는다. 대기업 노동자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 현대자동차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울산의
어느 수퍼마켓에서도 외상을 주고, 포항제철의 황토색 작업복을 입고
나가면 그 회사에 다니는 것이 평생 소원인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의례
'공돌이' '공순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마디 못할 때였다. 출퇴근
시간만에라도 자신이 노동자인 것을 숨기고 싶어했다.
"안전화 신고 쪼인타 까지 마라!", "주머니에 손 넣고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눈물겨운 구호도 꽤 높은 순위로 적혀있었다. 십수년간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노동자를 그 지경으로까지 만들었다. 위대한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87년
이전의 한국 노동자는 지금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의 노동자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87년부터였다. 우리가
제대로 된 점심을 회사 식당에서 먹을 수 있게 되거나,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스스로 인간인 것을 잠시 잊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은 비로소
그때부터였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고
관리자로부터 뺨을 맞거나, 말끝마다 육두문자가 들어가는 무수한 욕을
배가 부르도록 얻어먹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나 집시법으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목줄이
뻣뻣해지면서 골방에 숨어 숨 죽여 노동조합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 역시 그때부터였다.
87년 그 무렵, 나는 노동운동과 관련된 일을 해 온지 7년이나 되었을
때였지만 '생산직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다'라는 생각이 싹 가시지는
않아서,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조합에 갈 때에는 심드렁한 마음이 전혀
없지 않았다. 나를 오라고 부르면, 가기는 가면서도 '자기들이 언제부터
노동자라고... 노동자라고 하면 적어도 때 절은 작업복에 피땀 흘리며
일을 하는 기름밥 노동자라야 진짜 노동자지.' 하는 생각으로 떨떠름했다.
87년 8월이었나... 우리나라 최초로 어느 백화점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며
나를 불렀다.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간 나는 강의 첫머리에서
사람들에게 질문부터 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노동조합 생기고 뭐 하나라도 달라진 게 있어야 노동조합이 좋은 거
아니겠소? 여러분이 대답하지 않으면 저도 강의 안하고 그냥 가는 수가
있습니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자꾸 대답을 재촉하자 맨 뒤에 앉아 있던 여성이
일어서더니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일을 합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려도, 나에게 인사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니까, 나한테도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함께 농성을 했던 조합원들도 반갑게 인사하고,
회사의 관리자들도 인사치레 한 마디씩은 하고 내리더군요. 노동조합이
생기고 나서 나는 인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받았다.
"그게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하루 종일 일해도 따뜻한 인사 한 마디 받지 못했던 노동자를 비로소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래서 인간 대접받도록 하는 것, 그것이
노동조합입니다. 우리가 돈이나 몇 푼 더 받자고 하는 것이 결코
노동조합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동안 나는 목이 잠겼다. 그 동안 내가 가졌던 부끄러운
편견에 대한 뼈아픈 참회였다. 그 후에도 한 동안 그 일만 생각하면
습관처럼 목이 잠겼다.
87년을 분기점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87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식당의 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문
앞에 모여서 "의샤!"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었다. 당시 공단에 가
보면 줄줄이 늘어서 있는 회사들마다 차례로 '농성' '파업'이었고 그
사이에 가끔 '바보 같은' 회사만 하나씩 정상 조업 중이었다. 그 다음날
가 보면 그 회사 역시 파업을 하고 있었고...
문민정부 말기의 지난 총파업 투쟁 당시 가장 열기가 고조되었던 1월 중순
경 전국적으로 동시에 파업에 참여한 사업장이 1천 개 남짓이었다. 그
정도의 열기에도 김영삼 대통령은 "있는 것을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명언과 함께, 국회에서 자신들이 통과시켰던 법률을
스스로 취소하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87년에는 동시에
쟁의에 돌입한 사업장이 무려 3천6백 개였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와 비례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불과 87년
이후부터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해결사'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해결사병'이라고 부르는 깊은 병이 우리 노동자의 정서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조합은 해결사가 아니라 그 본래적 태생이 '어려운'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희망은 언제나 떠오른다>
노조 간부들을 만나면 노동조합 활동하기가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얼마 전, 포항지역 노조간부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임기가 끝나면 다시는 노동조합 간부는 안 하겠어. 노조 간부 1년
동안 남은 것이라곤 위장병하고 빚 200만원밖에 없다구. 매일 회의다,
교육이다, 연대모임이다, 뭐다 해서 집에 늦게 들어가지...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지... 회사에서는 팍 찍혀서 죽어라 뛰는데 조합원들은 안
따라주지... 이 짓을 누가 하겠느냐구."
모두들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았던 다른 노동조합의
간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해. 현장에 가서 팍 박혀 있어봐. 자꾸자꾸 또 하고
싶지. 나 보라구. 결국 5년만에 다시 올라왔잖아."
내려가기도 하지만, 올라오기도 하는 것... 그게 노동운동이다. 그게 바로
노동운동의 합법칙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