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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金甲) (1889 ~ 1933)】 "1930년 11월까지 4년 동안 임시정부의 재무장"
1889년 1월 7일 경상남도 동래(東萊)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경남 지역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활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 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4월 22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7월에는 경상도 출신 의원이자 군무위원회 이사에 이어 법제위원을 지내며 1920년 2월까지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1920.1.1) [판형4] |
국민대표회의 선언서 [판형4] |
1920년 말부터 ‘위임통치설’의 책임을 물어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을 비판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 세력이 베이징에 모이는 데 가담하였다. 1921년 4월 27일 베이징에 모인 박용만(朴容萬)을 비롯한 17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군사통일회의 선언」에 내지노동당(內地勞動黨, 또는 국내노동당)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안창호(安昌浩)가 앞장서서 국민대표회의를 상하이에서 열자,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이 회의에 ‘13도총간부’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22일 대표자격심사위원 5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2월 8일 이진산(李震山)·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선서’, ‘선언문’ 수정위원 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새로운 국가 수립을 선언한 창조파를 성토하는 데 합세하였다.
국민대표회의를 마친 뒤에는 임시정부에 적극 참가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이 제2대 임시대통령을 맡은 시기인 1924년 5월 법무총장 대리 겸 차장을 맡았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노동총판(勞動總辦)을 지냈다. 이어서 대통령제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뀌며 1926년 12월 김구(金九)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자, 재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재무장을 맡아 1930년 11월까지 만 4년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을 책임졌다.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좌우 세력을 통합하여 오로지 하나의 최고기관인 정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쳐가자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를 위해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에 이어, 이듬해 상하이에서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1929년 말에 좌파가 통합을 깨고 나가자 우파 세력은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유일 여당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상하이에서 이동녕·안창호 등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병세가 악화하여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인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던 광제의원(廣濟醫院)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9년 1월 7일 경상남도 동래(東萊)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경남 지역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활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 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4월 22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7월에는 경상도 출신 의원이자 군무위원회 이사에 이어 법제위원을 지내며 1920년 2월까지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1920.1.1) [판형4] |
국민대표회의 선언서 [판형4] |
1920년 말부터 ‘위임통치설’의 책임을 물어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을 비판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반대 세력이 베이징에 모이는 데 가담하였다. 1921년 4월 27일 베이징에 모인 박용만(朴容萬)을 비롯한 17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군사통일회의 선언」에 내지노동당(內地勞動黨, 또는 국내노동당)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 안창호(安昌浩)가 앞장서서 국민대표회의를 상하이에서 열자,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이 회의에 ‘13도총간부’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22일 대표자격심사위원 5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고, 2월 8일 이진산(李震山)·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선서’, ‘선언문’ 수정위원 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새로운 국가 수립을 선언한 창조파를 성토하는 데 합세하였다.
국민대표회의를 마친 뒤에는 임시정부에 적극 참가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이 제2대 임시대통령을 맡은 시기인 1924년 5월 법무총장 대리 겸 차장을 맡았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노동총판(勞動總辦)을 지냈다. 이어서 대통령제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뀌며 1926년 12월 김구(金九)가 국무령으로 선출되자, 재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재무장을 맡아 1930년 11월까지 만 4년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을 책임졌다.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자,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좌우 세력을 통합하여 오로지 하나의 최고기관인 정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쳐가자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를 위해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에 이어, 이듬해 상하이에서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된 것이다. 하지만 1929년 말에 좌파가 통합을 깨고 나가자 우파 세력은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유일 여당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상하이에서 이동녕·안창호 등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하였다. 그러던 중 병세가 악화하여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인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던 광제의원(廣濟醫院)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본관은 김녕(金寧). 아버지는 김석련(金石鍊)이고, 어머니 박옥(朴玉)이다. 1921년 작은아버지인 김세주(金世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조금이(趙今伊)와 결혼하여, 딸 김미리(金美理)와 아들 김정욱(金正旭)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갑(金甲)[1889~1933]은 1889년 1월 7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103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진원(金瑨源)이다. 1906년 4월 개양학교[1907년 12월 동명학교로 개편]에 입학하여 1910년 3월 동명학교를 2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이 무렵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에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한 민족주의 청년들이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결성한 영남 최초의 비밀 결사이었다.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일은 항일 독립운동가 김갑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
1917년 5월 20일 베이징대학[北京大学] 입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2년에 신규식(申圭植)이 주도하여 결성한 상하이 최초의 독립운동인 단체인 동제사(同濟司)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제사에는 대종교 신자가 많았다. 김갑도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정(參政)·지교(知敎)·상교(尙敎) 등을 역임하였다. 김갑은 이후 대종교 본사가 국내에서 만주로 옮기자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할 정도로 대종교에 심취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회 격에 해당되는 임시 의정원의 경상도 대표 의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22일 교통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군무위원회 이사를 맡았으며, 법제위원회 등에 소속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업무 수행에 공헌하였다. 1919년 11월에 의열단(義烈團)이 결성되자 김갑도 가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에서 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무력파, 즉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하는 계파에 속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 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 독립 노선에 대한 비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군사 통일 회의가 개최되자, 김갑도 참여하여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부정하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안으로 제시된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에서 재무 총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대조선공화국은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1923년 1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포함한 독립 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려는 국민 대표 회의가 개최되자 김갑은 13도 총간부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국민 대표 회의 참가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자격 심사 위원, 선언문 및 선언서 수정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양분되자 개조파 간부로 활동하였던 김갑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수파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개조하는 길에 매진하였다.
이에 1924년 4월에 법무 총장 대리 차장, 12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노동 총판, 1926년 2월 14일 국무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서 새로운 약헌의 기초 위원으로 선출되어 개헌 작업에 참여하였다. 1927년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재정을 마련하려고 몹시 애를 썼다.
이 무렵 동북아시아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항일 통일 전선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김갑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1927년 4월 11일 상하이촉성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결국 좌우가 분리되고 대립되면서, 1930년 1월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흥사단(興士團)을 중심으로 창당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에 동분서주하던 김갑은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광제의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김갑의 나이 불과 45세이었고, 조국 독립의 여망을 품고 이역만리 중국으로 떠난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김갑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민장으로 엄수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6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