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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얕은 둔덕에 자리한 간신 임사홍묘. 잡목을 헤치고 찍은 현장이다. |
임사홍의 아버지 묘. 사신사를 고루 갖춘 명당으로 명성왕후 생가 근처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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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기록으로 전하는 당사자의 행적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어느 누구도 당대의 그 인물과 동시대를 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고대 삼국은 삼국사기가 있으며 고려·조선에는 왕조실록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에는 인물사전이 편찬돼 있다. 사학자들에 의해 쓰인 역대 인물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커다란 경책과 울림이 되기도 한다.
훈구파의 거물로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의(而毅). 아버지는 좌찬성 원준(元濬)이다.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도 각각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했다.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때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특히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했다. 〈서거정묘비명 徐居正墓碑銘〉·〈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 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월산대군이정비명 月山大君李婷碑銘〉 등 여러 금석문이 전한다.
이의(而毅) 임사홍(任士洪·1445~1506)은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1476~1506) 때의 난신적자다. 사우당(四友堂) 임원준(1423~1500)은 그의 아버지고 풍원위(尉·임금의 사위) 임숭재(?~1505)는 그의 넷째 아들이다. 이들 조손(祖孫) 3대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충격적이다.
아버지·아들의 사서 기록도 충격적
▲풍수와 의복(醫卜)에 통달했던 사우당은 종1품 좌찬성(현 부총리급)을 지낸 세조·성종 때 권신이었는데 성품이 교활하고 간사해 국사를 그르쳤다 ▲이의 임사홍은 사화를 일으켜 무고한 선비를 죽이고 연산군의 악행과 패륜적 만행을 부추긴 간신이다 ▲풍원위는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아비보다 더했으며 충신을 추방하고 남의 첩을 빼앗아 연산군에게 바친 조선 중기의 간신이다.
사학계서는 당대 권력을 장악했던 이의 3대가 사심 없이 국가에 충성을 다했으면 조선 초기의 사회발전이 큰 진전을 이뤘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본관이 풍천(豊川)인 임사홍은 효령대군(1396~1486·태종의 둘째 아들)의 셋째 아들 보성군 사위로 일찌감치 왕실의 척신이 됐다. 이의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광재는 현숙공주(제8대 예종의 딸)의 남편으로 풍천위(尉)가 되었고 넷째 아들 숭재도 휘숙옹주(제9대 성종의 서녀)한테 장가를 가 풍원위(尉)가 되는 경사가 겹쳤다. 중종 때 영의정으로 사화를 일으켜 후일 관작을 삭탈당한 남곤(1471~1527)도 임사홍의 외사촌 동생이다.
임사홍의 관운은 타인을 시기하면서부터 어긋났다. 성종 8년(1477) 간신 유자광과 공모해 서원군(효령대군 둘째 아들) 사위 현석규를 탄핵한 것이 모함으로 들통 나 둘 다 유배되면서 권력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이들은 자신보다 더 나은 인재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했고 분란을 일으켜 국정을 어지럽혔다.
무오·갑자사화 터뜨린 주범
성종 재위기간(1469~1494) 내내 절치부심하던 이들 모리배들에게도 때가 왔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이 19세로 등극하던 해 임사홍은 50세였다. 연산군은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림파들을 기피했다. 어린 임금의 이런 자질을 충동질해 유자광이 일으킨 것이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다. 눈엣가시 같던 김종직 김일손 등 사림파가 제거되자 연산군은 안하무인이 됐다.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도 기고만장했다. 각각 채홍사와 채홍준사가 되어 전국 부녀자와 준마를 뺏어 임금께 진상하며 온갖 아첨을 다했다. 못된 짓은 자주 할수록 심도가 깊어지는 법이다. 극에 달한 주색잡기에도 연산군은 곧 싫증을 냈다. 임사홍이 마침내 연산군의 뇌관을 터뜨렸다. 생모 폐비 윤씨가 사사당한 내막을 신수근(연산군 처남)과 짜고 밀고해 갑자사화(연산군 10년·1504)를 일으켰다.
성종이 승하하며 앞으로 100년 동안 거론치 말라고 신신당부한 유명(遺命)을 어긴 것이다. 또다시 수많은 사림파와 당시 연루자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이미 죽은 김종직 한명회 한치인 등 권신들 시신까지 들어내 부관참시했고 임사홍의 셋째 아들 임희재(1472~1504)도 김종직 문하생이란 이유로 참형당했다.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 이의는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렸다. 연산군이 내시를 시켜 이 광경을 엿보고는 임사홍에 대한 신임과 은총을 더했다. 이후 “임사홍의 비위에 거슬리면 살아남을 자가 없어 대신들은 승냥이나 이리보다 더 무서워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죄인으로 무덤엔 잡목만
역사에 영원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없다고 어진 이들은 일러 왔다. 성난 민심은 망종들의 그릇된 통치를 좌시하지 않았다. 연산군 12년(1506) 9월 2일 밤 중종반정으로 혼군(昏君) 왕정은 몰락하고 새 임금이 용상에 올랐다. 악에 받친 반정군은 맨 먼저 도망치는 임사홍과 아우 임사영을 붙잡아 몽둥이로 격살했다. 반정군은 또 이미 죽은 임원준의 시신을 꺼내 추살하고 시호를 비롯한 모든 관직을 추삭(追削)했다. 승자의 기록으로 남아지는 게 역사지만 사우당은 아들 이의를 잘못 둬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임사홍 조손 3대의 무덤(향토유적 제13호)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 25-5번지에 있다. 명성황후 민씨(고종 왕비) 생가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황학산의 내룡맥이다. 묘 자리의 명당 여부 판정을 위해서는 매장된 인물의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 관건이다. 자좌오향(정남향)의 사우당 묘 터는 임사홍 권력이 하늘을 찌를 때 당시 신풍을 동원해 점지한 명당이다. 풍수 전문용어이긴 하나 해룡(서북향)으로 굴절 기복한 계축룡(동북향)이 좌선회하면서 우수좌도(右水左倒)한 당판에 병오(남향)득수, 을진(동남향)파수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명당 혈처다. 묘 뒤의 용맥에는 바위로 내려온 용골맥이 우렁차며 내·외청룡과 내·외백호가 첩첩이다.
사우당 묘 내백호 끝자락에 자좌오향(정남향)으로 용사된 임사홍 묘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잡초가 우거진 숲속의 얕은 둔덕에 있다. 1997년 15대 후손이 세운 묘비도 잡목을 헤쳐야 겨우 비문을 판독할 수 있다. 이 자리선 명당을 운위함이 부질없다. 임숭재 묘도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할퀴고 간 조손 3대의 무덤가엔 무성한 잡초가 키를 넘겨 세월의 장탄식만 무섭게 내뱉고 있다. 임원준→임사홍→임숭재의 3대 권신이 역사 앞에 드리우는 교훈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