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존재합니다..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해 있으며 현재는 영종도 까지 인천공항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접근이 빠르나
70년대만 해도 배타고 오래 가야겠죠...
아래지도 함 보세요..
왼쪽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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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생존자가 밝힌 ‘실미도의 진실’ document.prelistenMon = new Image; document.prelistenMon.src = 'http://www.donga.com/img/listen_Mon.gif'; document.prelistenWon = new Image; document.prelistenWon.src = 'http://www.donga.com/img/listen_Won.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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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초소 위에 모인 209파견대 기간요원들(왼쪽).실미도 부대 마크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한 요원. “실미도 대원들 죽이라는 지시 없었다”영화 ‘실미도’에서 실미도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됐다고 해서 684부대로 불렸다고 했으나,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부대 209파견대였다. 이런 식으로 영화 ‘실미도’와 현실 실미도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영화를 보면 공작원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북한으로 들어가려다 상부 지시에 의해 강제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용수씨는 “서해는 조류가 빨라 고무보트로 가면 사나흘이 걸려도 황해도 해안에 도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미도 사건이 일어날 때 209파견대에 있던 기간요원 수는 24명이었고 그중 6명이 살아남았다. 영화는 남북적십자회담 등으로 인해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상부에서 공작원을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이를 공작원들이 알아차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생존자 중 한 명인 한모씨는 “당시 하사 계급이었던 나는 상부에서 내려오는 무전을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들을 죽이라는 지시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 했다면 우리가 그렇게 무방비로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사건이 나던 날 기간요원과 공작원의 수는 정확히 24대 24였다. 사건은 월요일 발생했는데, 월요일은 주말 외출 외박을 나갔던 요원들이 풍랑 등으로 귀대하지 못할 수 있어 가장 요원 수가 적은 날이었다. 209파견대에서는 잘못을 범한 공작원들을 상당히 잔인한 방법으로 처벌했다. 특히 기간요원에게 덤빈 공작원은 가혹한 처벌을 받고 숨진 적도 있는데 이런 것이 원인이 돼 공작원소대 소대장들의 주도로 기간요원이 가장 적은 월요일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실미도 사건과 관련해 가장 궁금한 것은 버스를 탈취한 공작원들이 달려가고자 한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이들은 오류동에 있는 2325부대에 와서 공수훈련을 받았으므로 2325부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들이 서울로 달려가는 연도에 2325부대가 있었으나 지나쳤다. 또 공군본부로 꺾어지는 대방동 길도 지나쳐 노량진까지 갔다가 노량진경찰서가 쳐놓은 방어망에 걸려들었다. 이때 한 명의 공작원이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자 경찰관이 정확히 그를 저격했다. 그로 인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폭발함으로써 공작원들은 죽거나 중상으로 체포됐다. ‘붉은기’ 노래를 부르는 장엄한 장면은 없었던 것이다. 공작원들은 과연 청와대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일부 관계자들은 “공작원들은 분노와 흥분 속에무작정 달려갔던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실미도 사건과 관련해 한씨는 이런 지적을 했다.
“영화에서는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공작원을 뽑은 것으로 돼 있는데 내가 아는 한 사형수는 없었고 무기수가 한 명 있었다. 나머지는 돈놀이 등 작은 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있다가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연장자는 40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북한으로 간다는 사실도 모르고 실미도에 온 경우가 많았다. 영화를 본 사람 중에는 공작원들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피해는 우리 기간요원들도 똑같이 입었다. 사건 당시 사망한 18명의 기간요원 중에서 보상받은 유가족은 없다. 나 또한 정신적으로 큰 쇼크를 입었지만 약간의 치료만 받고 군대를 떠났을 뿐이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보상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정훈 주간동아 기자 hoon@donga.com
박 대통령이 북파공작원(실미도사건)을 양성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
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생존자인 간첩 김신조씨는 현재 목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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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비극 묻혀둘순 없었죠” |
1971년 9월15일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 37세의 강근호 의원(신민당)은 천장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사회·경제분야 대정부 질의를 시작했다.
“정부는 처음 실미도 사건을 공비출몰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특수범의 난동이라 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다. 본 의원이 알기에는 실미도사건과 관련된 특수부대는 68년 김신조일당이 대통령관저를 습격한 직후 편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도 똑같은 사명을 지닌 특수부대가 있다는 게 사실인가.”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겁없는 초선 의원이 금기시됐던 군 기밀사항을 거침없이 내뱉자 국회 본회의장은 벌집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다.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고함을 지르며 강의원의 발언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급기야 여야 의원들 사이에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이런 소란속에서도 강의원은 실미도 훈련소속부대 편성과 훈련 및 지휘체계, 부대운영예산 등을 조목조목 따졌다. 자칫 암울한 역사의 한장으로 묻혀버릴 뻔했던 실미도 사건을 정부가 공식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순간이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영화 ‘실미도’가 개봉 20일만에 관객 5백만명을 돌파했다. 당시 사건을 국회에서 폭로한 강씨(70)는 이 돌풍을 지켜보며 남다른 소회에 젖는다. 강씨는 이제 전북 군산시장이 되어있다.
“진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게 대정부 질문을 결심하게 된 첫째 이유였죠. 정부가 실미도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언론도 입을 닫았지만 일본이나 미국 등 외신은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문공위 소속이던 내가 국방위 관련 질문을 한 것 자체가 뚝심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요즘 영화가 만들어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진실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깁니다.”
강시장은 대정부 질문이 던진 파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건의 진상을 모두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의 주동자들이 군 특수부대 요원이었음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정래혁 국방장관이 사임하고 오치성 내무장관 불신임안이 국회사상 처음으로 통과되기도 했죠.”
그러나 강씨 본인은 이 발언 이후 모진 역경을 겪었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빨갱이 아니냐’는 추궁과 함께 전기고문을 당했다. 이 때문에 그는 지금도 오른쪽 다리가 성치않아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강씨는 이후 각종 선거에서 14번이나 낙선 고배를 마시는 등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2001년 4월 군산시장 재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나서 당선됐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재선됐다. 같은 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는 그가 ‘민주화 투쟁 유공자’임을 인정했다.
강시장은 “실미도 사건은 남북분단과 냉전논리가 빚어낸 역사적 비극으로 정치적 치명타를 입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며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없이는 독재정권이 저지른 상처를 치유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근기자 yk21@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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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실미도에 흐르는 ‘위험한 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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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남북관계 연구자로서 <실미도>가 탐탁지 않은 까닭… 역사성 간과해 평화통일 정책의 희생자로 묘사
나는 영화는 쥐뿔도 모른다. 하지만 684 북파부대를 다룬 영화 <실미도>에 대해 쓰려고 한다. 주제넘게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 연출이나 연기력, 캐릭터 분석이나 평가 등은 하지 않겠다. <실미도>에 대한 영화적 분석은 영화평론가 같은 영상문화 전문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이 글의 목적과도 거리가 멀다.
‘감정의 과잉’ 혹은 ‘역사의 빈곤’ 평소 거의 영화관 출입을 않다가 얼마 전 <실미도>를 본 이유는 분단과 전쟁, 남북관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마음이 불편했다. 나의 <실미도> 감상평을 요약하면 ‘감정의 과잉’ 혹은 ‘역사의 빈곤’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다. <실미도>는 개봉 15일째인 1월7일 전국 400만 관객을 넘어서는 등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관객들은 살인적 훈련을 이겨낸 684부대 훈련병들의 불굴의 의지, 끈끈하고 거친 남성들의 동료애에 박수를 치고, 개인의 삶을 무자비하게 허물어뜨리는 국가 권력의 난폭함에 분노한다. 나는 <실미도>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판단을 존중한다. 내가 느낀 불편함이 타인이 느낀 감동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 <실미도>를 보고 난 뒤 극장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화장실에서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10대 두명이 볼일을 보면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야, 김일성 목을 딸 수 있었는데, 아쉽다.” “맞아, 그랬으면 통일도 되고 좋았을 텐데.” 영화 중반쯤 고된 훈련 끝에 살인병기로 완성된 684부대 부대원들이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해 고무보트를 타고 평양 주석궁을 향해 출동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북파 작전 취소 명령을 듣고 부대원들은 바다 위에서 “제발 북으로 보내달라”고 절규한다. 10대들은 개인을 무자비하게 망가뜨린 국가나 전쟁을 선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김일성 암살 계획을 취소한 국가의 ‘변덕스러운’ 명령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실미도>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우리는 31명의 람보를 잃었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그토록 중요했던 것인가’ 같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대중의 관심사에 예민한 한 스포츠신문은 684부대 소대장 김방일(59·영화 속 조 중사 실제 인물)씨를 만나 “만약 김일성 암살 계획이 시도됐다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특히 실미도 31명을 영웅시하는 10대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김일성 모가지를 따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일부 관객들의 ‘위험한 감동’은 자칫 남북관계를 대립과 갈등으로 돌리려는 수구세력에게 악용될 수도 있다. 숱한 난관을 뚫고 최근 남북관계는 적대와 대립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전제 위에서 교류를 통해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화해와 협력 관계로 돌아서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국군 탱크가 평양 주석궁을 밀고 들어갈 때 통일이 이루어진다’며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수구세력들이 있다.
국가주의 비판이 아니라 매몰이었다 강우석 감독은 개봉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실미도>는 국가주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비극을 그려냈다고 말했다. 강 감독은 교육대장역을 맡은 안성기가 중앙정보부 간부에게 “중앙정보부가 국가냐”는 말을 하는 장면을 찍을 때 기분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감독은 국가주의를 비판한다고 했는데, 일부 관객은 국가주의에 매몰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관객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영화에서는 ‘윗대가리’의 김일성 암살작전 취소 명령에 맞서 ‘김일성 목을 따게 북에 보내달라’며 훈련병들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장면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실미도를 탈출한 훈련병들이 서울 대방동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진압군인들과 대치하며 최후를 맞는 순간에 남북 적십자 회담을 알리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영화에 나오는 훈련병들과 ‘김일성 목 따기=인생역전’이란 정서적 일치감을 이룬 일부 관객들이 정부의 변덕스러운 평화통일 정책이 실미도 영웅 31명을 죽였다는 ‘함정’에 빠질 장치가 영화 도처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영화는 훈련병들이 실미도로 끌려오게 된 1968년의 적대적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영화 홍보 문구처럼 32년 동안 묻힌 실미도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면, 현역 군인도 아닌 31명의 시민들이 왜 1968년 봄에 실미도로 모이게 되었고 끝내 처절하게 숨지게 됐는지를 주목해야 했다. 실미도 사건의 뿌리는 분단과 이로 파생된 적대적 남북관계이고 1968년의 구체적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1968년 한해는 한국전쟁 이후 휴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였으며,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주한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 ‘정전협정과 관련된 중대사건 일지’ 중에서) 1968년에는 남쪽으로 침투하던 321명의 북한 무장요원들이 사망하고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181건의 남북충돌이 벌어졌다. 이 결과 145명의 국군, 18명의 미군, 35명의 민간인 등 198명이 전사하고, 240명의 국군, 54명의 미군, 16명의 민간인 등 310명이 다쳤다. 1968년 남북은 이틀에 한번꼴로 군사분계선에서 대포까지 동원해 교전을 벌이던 사실상 전시상태였다. 만약 일부 관객의 소망처럼 684부대원들이 김일성의 목을 땄다면 남북통일이 됐을까. 끔찍하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당시 한반도 상황을 감안하면 십중팔구는 한반도 전면전으로 번졌을 것이다. 1970년대 접어들어 미국과 중국의 화해 등 동서 냉전의 긴장이 풀어지고 북한의 잇단 대남침투 작전이 실패하자 남북관계는 대결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환한다. 한반도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간신히 넘기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궁금해졌다. 북한은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최정예 현역 장교 31명을 남파해서 청와대 습격 사건을 일으켰는데, 왜 한국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밑바닥 인생들로 684부대를 꾸렸을까. 684부대 막내 훈련병 민호의 대사처럼 국가는 ‘아무도 모르게 써먹고,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릴 계획’이었을 것이다.
작전통제권 없는 나라의 서글픈 현실 또 다른 구조적 원인은 당시 한국군의 전·평시 작전통제권이 모두 주한유엔군 사령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대간첩 침투작전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대응 작전도 유엔군사령부 사령관의 책임 하에 수행됐다. 그런데 1968년 1월21일 청와대 습격 사건과 1월23일 발생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처리를 두고 한국과 미국이 충돌했다. 유엔군사령부 사령관이 청와대 습격 사건에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다가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에 대해서는 데프콘2를 발령하고 전쟁 직전 단계까지 갔다.
이런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이 보복공격의 일환으로 북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당황한 유엔군사령부는 한국군 단독 북진을 막으려고 한국군에 대한 유류보급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군에도 최정예 특수부대 요원들이 숱했지만, 중앙정보부가 1968년 4월 실미도에 계급도 군번도 없는 민간인들을 급하게 모아 김일성 암살훈련을 시킨 것은 작전통제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실미도>에는 684부대원 31인의 처참한 운명과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이방인에 맡긴 1968년 대한민국의 처연한 모습이 겹쳐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 |
1968. 1. 21 청와대 기습 사건
침투준비
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연습을 하기도 했다.
124군부대 - 침투 그리고 노출
1968년 1월16일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대전차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개성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위장(僞裝)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특수전(特殊戰)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바닷물이 만조(滿潮)때마다 밀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바닷물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오인(誤認)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구형 철조망이었기 때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족으로 개수(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철주(鐵柱)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대적하려는 한국군의 대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은 몹시 지쳐있어 이날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가면(假眠)상태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후 2시경,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우성제(禹聖濟·현 파주경찰서 보안계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 한명이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시속 10㎞의 중무장 산악 질주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군들이 동무들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사진설명] 북한산 비봉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강인덕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眞寬寺)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비봉(碑峰)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전력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최다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포함(砲艦)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 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 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 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 분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 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 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 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 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 명이 사망하고 25 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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