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812주일설교 사도행전17:1-15(마음이 트인 사람)
제목: 마음이 트인 사람
본문: 사도행전17:1-15
오늘은 사도행전 17:1-15절의 말씀을 가지고 “마음이 트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트인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에 일이 있어서 용인 동부 경찰서를 가 보았습니다. 민원실에 일이 있어서 들어갔습니다. 처음 가는 곳이어서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때 여순경이 다가 오더니 무슨 일로 왔냐고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 목적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하면서 안내 해 주어서 일을 처리해 주어서 일을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자세하게 친절하게 잘 안내해 주었고 내 일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물론 요즘 관공서들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경찰서에서 그러니 어리둥절하였고 그런 그들의 행동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니 기분이 좋았고 경찰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부드러운 것은 참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누가 나에게 부드럽게 대해주면 참 좋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줄 수 있다는 마음도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늘 듣는 소리가 부드럽지 못하다는 소리입니다.
웃어주어야 좋다고 하는데 나는 참 웃어 주지 못합니다. 웃는 시간보다는 웃지 않는 시간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 힘들어하고 마음이 상해하는데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일행들이 데살로니가 지방과 베뢰아 지방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말씀을 전할 때마다 듣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이 들었고 어떤 사람이 듣지 않았는지를 살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듣지 않는 사람들
데살로니가에 간 바울의 일행들은 그곳에서 회당을 찾아 갔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 교육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10가정만 되면 회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던지 먼저 회당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말씀을 가지고 토론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동족을 찾아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동족에 대한 마음이 극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동족인 유대인에게 먼저 전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느 도시에 가든지 회당을 찾아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늘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어디에서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런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 받게 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진리는 늘 반대와 핍박을 가져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의 그런 복음전파는 온 시를 뒤집어 놓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파급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전파로 인하여 믿게 된 자들이 있자 그것을 시기한 자들로 인하여 온 시가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파로 인하여 유대인 몇이 받아 들였고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많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사람들이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같은 유대교 신앙이었지만 그 중에 적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랐고, 그리스 인들은 상당수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바울이 전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그 전한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시기심은 내가 없는 것을 남이 가졌을 때 생깁니다. 시기심은 내가 누려야 할 것은 남이 누린다고 생각 되었을 대 생깁니다. 시기심은 남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생깁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시기심은 그 사람을 거부하게 됩니다. 시기심은 그 사람이 옳고 그름에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누리지 못하고 내가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오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을 거부하게 됩니다.
시기심은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시키심을 미움을 가져오고, 미움은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의 시기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선동합니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도록 동요를 일으킵니다. 혼자 행동하지 않습니다. 세를 만들고 세를 불려서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불량배를 동원합니다.
불량배를 통해서 소요를 일으키고 성읍의 관원들에게 읍소하여 그들을 움직여 자신의 편에서 행동하도록 합니다. 그냥 불량배와 관원만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과 술수를 써서 계속 선동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잃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자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참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 속에 그런 시기심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하는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여 행동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열을 내어서 말하고 주장하는 것이 혹 시기심 때문에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도 누리고 싶은데 내가 누리지 못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도 가지고 싶은데 내가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진정 싸워 할 대상을 잘못 잡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시기심을 일으키는 상대방이 아니라 내 안에 일어난 시기심이 문제입니다. 그 시기심을 일으키는 사탄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기심을 일으킨 사람과 갈등하고 모함합니다. 더 나가서는 시기심을 일으키게 만든 사람을 제거하거나 누르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싸움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싸움이 되어 더 문제가 커지고 더 문제만 꼬여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어야 합니다. 오직 우리를 흔들려고 하는 사단과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나누어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사단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그 마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2.마음이 트인 사람들
두 번째로 살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이 없이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데살로니가에도 조금 있었지만 베뢰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서 신도들이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바울의 일행은 역시 베뢰아에서도 회당에 갔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달랐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 달리 너그러웠습니다. 시기하는 태도로 바울의 일행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받아 들이려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남을 용납하려면 너그러워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큰 그릇이 작은 그릇을 담을 수 있습니다.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담을 수 없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남이 말할 때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남이 말할 때 무조건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문제요,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면 너그러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새 번역 성경을 보면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말을 더 고결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정역 성경을 보면 신사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마음이 트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그럽다. 고결하다. 신사적이다. 마음이 트였다. 다 좋은 말입니다. 좋은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마음이 트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고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마음이 트여야 가능합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발전 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새로워지거나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이나 너그럽다는 말이나 고결하다는 말은 다 마음이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길을 진리의 길을 생명의 길을 가려는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그런 좋은 길이 있는지 진리의 길이 있는지 생명의 길이 있는 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려 있고 그래서 부드럽게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만 그렇게 좋은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열려 있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 또한 좋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들은 말씀을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살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살피면서 들은 말씀 곧 바울이 전한 진리 복음을 성경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었을 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을 우리는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달콤한 말이라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실상 우리에게 달콤한 것들이 몸에 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입에는 쓰지만 우리 몸에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이 쓰든지 달든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르게 듣고 바르게 행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이렇게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트여서 말씀을 듣고 상고하였습니다. 성경에 비추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전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성경에 비추어 보니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믿음은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성장은 그들에게도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에 많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전해서가 믿는 자들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베뢰아 사람들에 증언을 통해서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두 도시의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히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을 닫고 시기심으로 살려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사적인 태도로 고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시기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부정적이 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선동하여 다 같이 부정적이고 소란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고 소동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내 말로 인하여 내 행동으로 인하여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지만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듣고, 말씀에 대해서 신사적인 태도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대해서 고결한 태도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성장 시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듣고, 특별히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겠습니까? 두 길은 분명 사탄에 이끌리는 길과 성령에 이끌리는 길의 차이입니다.
지금 나는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성령을 좇아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길입니까? 아니면 사탄을 좇아 나를 죽이고 남도 죽이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베뢰아 성도들처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너그러운 마음으로, 고결한 마음으로, 신사적인 마음으로, 트인 마음으로 살아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복된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