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6월1일 화요일 월삭 예배 ♣
성경:사무엘하19:31-39(구497P)
제목:바르실래의 헌신
31.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32.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33.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34.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35.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36.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37.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38.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39.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왕이 바르실래에게 입을 맞추고 그에게 복을 비니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예배의부름:시46:1-5
신앙고백:(사도신경)
찬 송:413장(통470장)
성경봉독:사무엘하19:31-39
말씀선포:바르실래의 헌신
합심기도:주기도:찬양:(보혈을 지나 )
할렐루야!호국의 달! 6월 첫날을 하나님께 월삭의 예배를 드리시고 6월을 시작하시는 성도님들과 가정과 경영하시는 기업과 교회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6월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달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은 전쟁의 위기를 느끼는 때인만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군복음화를 위하여서도 많이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목}***“바르실래의 헌신”
이 세상에는 항상 두 가지 길이 있어서 우리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롯의 길>이고, 또 하나는 <룻의 길>입니다.
롯은 세상의 것이 좋아 소돔을 선택했다가 그 가정이 풍지박산 되지만 룻은 세상의 것보다 소중한 것을 선택하므로 나중에 회복의 은총을 입습니다.
룻이 은총을 받게 된 이유는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룻은 나오미를 시어머니로 여기지 않고 진짜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룻기 1장은 보면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니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많을수록 '시'자에 힘을 주어 시어머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처럼 룻은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정했는데 바른 결정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힘든 길이 충분히 예상되는 결정이었지만 그녀가 바른 결정을 했습니다. 결국 시어머니를 떠났던 오르바는 그 뒤 한번도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이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젊은 여인의 꿈과 환상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옛
날 당시에는 수십 년 중노동과 함께 고통스러운 과부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어려운 길을 좇은 룻은 결국 잘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조상의 족보에 당당히 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모습 및 이익만 보고 선택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믿는 자에게는 수시로 넓은 길과 좁은 길이 함께 제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통 넓은 길로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른 길로 가라고 합니다. 물론 좁은 길이라도 바른 길이 아니면 그 길을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좁은 길이든, 넓은 길이든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절과 선택이 분명한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을 보면 성경은 모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어떻게 모세가 부귀영화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바른 선택을 반드시 기억해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선택을 했던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가 바르실래입니다.
바르실래가 어떤 사람입니까? 길르앗 사람으로 80세가 된 거부였습니다(31-32절).
그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황급히 피신하다가 마하나임에 도착했을 때 다윗을 최선을 다해 공궤했습니다(삼하 17:27-29).
그리고 얼마 후 왕권을 회복하면서 다윗은 바르실래를 곁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정중하게 다윗의 요청을 사양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결국 다윗은 혼자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가지만 바르실래를 잊지 못합니다.
다윗이 나중에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바르실래 가정을 잘 살피라고 유언까지 합니다.
그토록 다윗이 바르실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다윗이 어려움을 당할 때 지성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도망치는 그 어려운 순간에 다윗을 후대했습니다(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구테타로 맨발로 쫓겨갈 때입니다).
사실상 힘이 없어지고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는 것이 진짜 도움입니다. 그러므로 친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더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가 잘 될 때는 멀리서 지켜보고 그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어려울 때는 나타나서 돕는 손길을 펼치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의 이런 말이 실감나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진정한 친구, 진정한 신앙, 진정한 감사를 구분하게 만든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자와 가까이 하면 어떤 유익을 얻게 됩니까?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을 느끼며, 삶의 교훈도 얻습니다. 사실상 알고 보면 어려움을 함께 하는 자리가 가장 지혜를 얻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왜 부담스럽게 생각합니까?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놓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내놓는 것이 나 자신에게 손해가 됩니까?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과 가까이 하면서 얻는 것은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면 무엇을 얻습니까? 얻는 것이 참 많습니다. 삶의 진지함을 얻습니다.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성숙함을 얻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격을 얻습니다.
그처럼 얻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지혜로운 자리를 피하려고만 하는 것! 그것은 참다운 의미의 행복을 아는 인생으로 살아가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최선을 다해 그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 말은 결국 무슨 말입니까? 서로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거의 사람들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그런 줄로 알면 큰 오해입니다. 자세히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다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알게 된 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질이 있는 사람은 물질로 도와주기를 힘써야 하고, 물질이 없는 사람은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언어를 가지고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랑이 굶주린 사람에게 사랑과 이해와 격려는 상상 이상의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의 성향을 적극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동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남이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하면 호되게 비판을 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은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못된 짓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 어려운 줄 알고 그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서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와 성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고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드셔서 외롭겠구나!"라고 생각하면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도 며느리노릇 힘들어했지!"라고 생각하면 며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돌려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얼마나 환자들이 많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힘든 처지인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잘 아프지 않는 사람들은 아파서 죽겠다는 사람의 말만 들어도 짜증납니다. 당연합니다. 크게 아파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까지 한번도 병상에 누워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쩌다 한번 병원에 눕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병자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배움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모두 하나님의 도구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자는 힘써 도와줄 수 있는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르실래처럼 말입니다!
2. 다윗의 어려움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의 권좌에서 쫓겨난 다윗을 도와주는 일은 거의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옳게 살고 싶어도 목숨이 위험하면 그 정신과 기개가 꺾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인 줄 알아도 권력이 총칼을 휘두르면 보통 사람들은 대개 침묵합니다.
마음은 바른 일을 하는 바른 사람을 정말 돕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개 못합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그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다윗을 돕습니다.
그리고 바르실래가 한 지역의 족장이며 거부였다는 사실은 더욱 존경받을 일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권력에 항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정경유착).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비교적 홀가분한 모습으로 권력에 항거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있는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모든 기득권을 다 빼앗기고 완전히 파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사람들이 불의에 항거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지 않고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행위는 그가 노력해 쌓았던 모든 것을 다 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을 놉 땅의 제사장들이 도운 것을 압니다. 그때 그 일로 인해서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 땅의 제사장 85명이 몰살했습니다.
바르실래도 그 일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본인의 위험을 충분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도와줍니다. 그 고마움을 다윗이 어떻게 잊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나에게 유익인가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한 선택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우리 안의 욕심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어느 사람에게나 그런 욕심이 있겠지만 힘써 그 욕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은 "호산나!"라고 하면서 맞이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건지소서!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로마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 구원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없으니까 주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남에게 투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녀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발견됩니까? 그래서 자녀들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그런 모습이 아니면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실망을 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습니다. 배우자가 자기 뜻대로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도 내 뜻대로 해 주기를 바라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와 목사님이 내 뜻대로 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픈 말이지만 일종의 변형된 욕심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그냥 주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옳은 길을 따라 제 코스로 그냥 갑니다. 군중들이 "호산나!"라고 해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고, 십자가도 그냥 지십니다.
자세히 묵상해 보면 무엇인가 엄청난 영혼의 힘이 그 삶에서 느껴집니다. 우리도 옳은 일이라면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그 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바르실래처럼 말입니다.
3. 다윗을 도울 때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가는 다윗을 도우면서 바르실래가 대가를 생각했겠습니까?
그 속을 잘 몰라도 결코 대가나 보상을 생각하고 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교는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아주 진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대가나 보상만 바라고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바르실래는 대가나 보상보다는 그저 옳은 일에 자기의 목숨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주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이 왕권을 회복하고 그를 왕궁으로 초청했을 때 바르실래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우리는 도울 때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목숨을 버려 우리를 도우실 때 대가를 바라고 도우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도울 때 대가 없이 아름답게 도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분과 인간다움까지 생각하고 배려하며, 그냥 우리를 돕기보다 우리의 땀을 흘리게 하시고 도와주심으로 삶의 보람까지 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남을 도울 때 대가나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도와야 합니다. 바르실래처럼 말입니다.
예화)
카톨릭 신부님 중에서 막시밀리안 콜베라고 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뚜렷한 이유 없이 잡혀서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분은 연로하신 어머니에게 이런 비장한 편지를 띄웠습니다.
"어머님! 저의 사랑이 이곳에서 주님의 사랑처럼 되게 기도해 주세요."
1941년 7월 어느 날, 같은 감방에 있던 한 죄수가 탈옥을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감방에 있던 10명이 아사형 감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 콜베 신부님은 10명의 명단 중에 빠지게 되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명중에
한 명이 "부인과 아들이 있으니 살려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콜베 신부님은 그 대신 죽겠다고 나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번호가 지워지고 16670번의 콜베 신부님 이름이 올랐습니다.
결국 감방에서 보름을 굶은 후 콜베 신부님은 독약 주사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아사형 감방에서도 콜베 신부님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이 콜베 신부님의 사랑이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도 바르실래나 콜베 신부님과 같은 대가 없는 사랑을 주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정말 아무 보상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열왕기상 2장 7절에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바르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
하게 하라."
우리가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랑할 때 하나님은 더욱 보상을 주십니다. 그 보상을 우리 자신에게 주실 수도 있고, 우리 자녀에게 주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사랑과 정성을 반드시 기억해주십니다.
***{결론}***
오늘 80세 먹은 노인 바실래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 흐뭇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헌신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바실래와 같이 좋은 일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걸 수 있는 인물이 우리들의 교회 속에, 우리들의 믿음 속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우리 자신이 있는 처소에서 더욱 헌신하고 더욱 정성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때로 우리의 수고와 정성은 겨자씨 같아 사람들에게 잘 안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쓰면서 교회를 청소하지만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도울 줄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수고한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없다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수고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는 그러한 사랑과 정성의 수고 위에 세워져 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리의 수고와 정성을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더욱 큰 은총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랑의 손길을 펼침으로 여러분들을 통해서 주님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더욱 견고해지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바르실래의 헌신을 머리로만 알고 지나치지 마시고 이제는 몸으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르실래같은 인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바르실래!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바르실래와 같은 헌신의 성도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대대로 축복해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사무엘하19:35절입니다.오늘 말씀을 묵상하시고 6월 한달동안도 성령님의 인도따라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여호와닛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