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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05간 전봉준생가터/동학농민군무장기포지/황토현전적지/전남해남군문내면우수영관광지/전남진도군관광기.
(여행의 계기)
2021.10.3.일부터 10.5일까지 전남고창군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전봉준씨의 생가터와 동학농민혁명군 무장기포지(=혁명군 창의문 발표 및 봉기가 시작된 곳) 및 황토현전적지(=동학농민혁명 기념관등), 전남해남군 문내면 우수영관광지, 그리고 진도군 관광여행에 나섰다.
평소에 동학농민혁명군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또 오래전부터 전남 진도군 관광의 기회를 엿보다 드디어 날짜를 잡은 것이 2021.10.3.- 05일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사적지는 앞으로도 공주시 우금치 유적과 충북보은군 북실마을 유적지도 꼭 추가로 둘러볼 계획이다.
(여행 경로와 전봉준 생가터)
10.03일 새벽 05시경에 서울시 도봉동 아파트 단지를 집사람과 함께 출발했다. 외곽순환도로 의정부ic-판교ic-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간고속도로-정안휴게소에 도착하니 06시48분이었다. 서울에서 정안휴게소까지의 주행거리는 144km였고 소요시간은 1시간48분이었다.
공주시 정안휴게소에서 우리는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조식을 먹었다. 그리고 07시37분에 다시 출발했다. 휴게소 매점에서 사온 냉커피인 카페 라떼를 빨대로 빨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공주jc-대전/당진간고속도로-공주/서천간고속도로-동서천jc에서 서해안고속도로 갈아탔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출구표지판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깜빡 지나쳐버렸다. 부득이 영광ic로 빠져 나와서 다시 고창읍내의 전봉준 생가터를 찾았다.(전봉준생가 주소=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당촌마을) 전봉준 생가터에 도착하니 시간은 09시59분이었고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주행거리는 334km였다.
(전봉준장군 생가터 풍경)
생가터는 400여평 정도의 마당이었다. 마을속에 있는 마당인데 마당 왼쪽으로는 고창역사교육관이란 건물이 있지만 출입문에는 열쇠가 채워졌다. 그 출입문 상단에는 생전의 전봉준 장군이 상투머리를 한 채 한복차림의 상반신 사진이 걸려있다.
(전봉준장군 생가터내에 있는 고창역사 교육관 입구 모습.)
전봉준 장군 생가터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쓸쓸한 마당 가운데 생가터 안내게시판과 생가터 표지적이 있을 뿐이다. 그 안내표지판의 게시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 안내판 게시글 내용)
동학농임혁명의 핵심인물이자 지도자였던 전봉준 장군 은 1855.12.3.일 이곳 고창읍 죽림리 63번지(당촌마 을)에서 서당훈장을 하던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당시엔 서당,안채,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중 모두 소실되었다. 그는 오척단신의 작은 체 구 때문에 녹누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봉준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1894.3.20.(음력)일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 기포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4000 여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갑오동학농민혁명 최 초의 봉기선언문인 창의문을 발표하고 조직적인 항 쟁에 들어감으로써 전국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 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 에 반대한 민족운동이며 제국주의적 외세침략에 맞 선 국권수호운동으로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 며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쟁 이었다.” 여기까지가 안내판 게시글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개념은 (1)동학농민들의 항쟁이라는 점 (3)봉건적 지배세력의 수탈.억압을 반대한 민족운동이라는 점 (2)청.일의 외세침략에 맞선 국권수호운동이라는 점이다. 조선왕조사의 관점에서 동학난으로 기록된 역사를 보다 객관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이란 혁명으로 역사기록을 수정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성공하지 못한 혁명도 역사의 기록에서는 성공한 혁명 못지 않다는 의미에서 동학난의 역사기록은 동학농민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봉준 장군 생가터의 전경 모습.좌측상단 하얀색이 안내판이고 그 옆에 하얀받침대위에 있는 것이 화장실. 우측 상단에 있는 생가터 안내 표지석 모습임)
(전봉준장군 생가터 안내판 게시글 모습)
(전봉준 장군 생가터 표지석 모습. 살던 집은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음.)
(전봉준장군 생가터에서 무장기포지로 이동)
이렇게 전봉준장군 생가터를 구경한 우리는 10시13분에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소재 무장기포지를 향해서 출발했다.(무장기포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전봉준장군 생가터에서 우리가 머문 시간은 14분정도였다.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소재 무장기포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26분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357km였다. 무장기포지는 도로변에 있는 넓은 잔디밭이었다. 넓이가 1000여평은 될 성 싶었다.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입구 부근 안내판-1)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입구부근에 안내표지판이 크게 서 있는데 살펴보니 “예향 천리 마실길 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라는 명칭의 안내판이었다. 이 안내판 좌측에는 (1)무장기포지에서 고창군 관내까지의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를 표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안내판 우측에는 (2)동학농민혁명1차봉기지라는 안내게시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그림에 표시된 주요 지점은 무장기포지-소숙재-무장읍성-무장향교-첨금성바위-월중마을-끄럼재-깨진바위-사신원-임낸보-운곡람사르습지까지의 19.5km였다. 아마도 그 이후로는 정읍군 관내의 진격로라서 그림에서 표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안내판 우측의 “동학농민혁명1차봉기지”라는 장문의 안내글이 적혀있는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동학농민혁명1차봉기지)
이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는(구수마을은) 1894 년 3월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이 땅의 민 중이 떨쳐 일어나 민족과 역사의 주인됨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우리 근대사의 자랑스런 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당시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농민들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라고 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동 학교와 결합되면서 인간 본래의 인격과 존엄성을 지키 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제도 관료사회도 청산하여 새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당시 동학교 2세 교주 최시형은(북접) 충청도 보은에 좌 정하고 있었고 무장현 괴치의 손화중(남접) 대접주는 이 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 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회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10일 공음면 구수내(구암 리) 송문수 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19일 공음 면 신촌의 김성철 접주 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 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를 말하 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밈혁명을 모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은) 구적산 아홉 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 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 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으 로한 농민군은 포구문과 격문 등을 띄우고 보국안민 창 의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 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안내판 우측의 “동학농민혁명1차봉기지”안내글 내용이다.
(무장기포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예향 천리 마실길 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 라는 표지판)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입구 부근 안내판-2)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입구부근에 또다른 안내표지판이 크게 서 있다. 이 표지판의 제목은 “고창 무장동학농민혁명기포지”라고 써 있다. 그 표지판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1차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 등을 뜻하는 서학 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 족종교이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 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 다.(당뫼=고창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앞에는 큰 당 산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당뫼라 불렀다.)
1894년3월20일에 봉기하면서 밝힌 무장포고문에는 봉기와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있다. 이는 세상에 거 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 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 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 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의병운동과 3.1독립만세운 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장기포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고창무장 농학농민혁명 기포지 안내표시판 모습)
(무장기포지 넓은 잔디밭 좌측 표지석 모습)
이 넓은 잔디밭 좌측에 3개의 표지석이 있다. 3개의 표지석은 (1)동학농민혁명군 진격로표지판 (2)동학농민혁명 발상지표지석 (3)새겨진 글짜를 해독할 수 없는 표지석까지 해서 3개의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3)번의 글씨를 해독할 수 없는 표지석은 새겨진 글씨가 가로로 새겨졌는데 새겨진 글씨의 페인트가 지워져 있다. 따라서 글씨 내용을 해독할 수 없는 점이 무척 아쉽기만 했다.
(무장기포지 잔디밭 좌측 전경모습.좌측오석은 혁명군 진격로모습.중앙은 동학농민혁명군발상지표지석.맨 우측은 글씨를 해독할 수 없는 표지석 모습임)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 내용)
또 이곳 넓은 무장기포지 잔디밭의 중앙부분에는 잔디밭 가운데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산책로에는 붉은 색 아스팔트가 포장되어 있다. 이 붉은색 산책로 우측에는 (1)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을 새긴 표지석과 그 바로 우측에 (2)또 하나의 다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은 하나의 표지석에 앞면은 포고문 전면의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은 포고문 후면의 글 즉 마무리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하나의 다른 표지석은 혁명포고문 표지석보다 크기가 약간 더 커보이는데 문제는 그 표지석에 새긴 글씨의 페인트가 벗겨져서 글의 내용을 관광객이 해독할 수 없는 점이 흠이었다. 따라서 그 표지석의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점이 답답했다.
하나의 표지석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에는 3개의 주요내용이 새겨져 있다.
첫째는 우리는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왕조내의 부패 관리와 지방의 부패 관리가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파탄시켜 나라를 멸망시키고 있다고 본다. 셋째 그래서 우리는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하고자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일어섰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표지석에 새겨진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동학농민 혁명군 포고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함은 오로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의 의리는 인륜중의 자못 큰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아비 에게 효도한 연후에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무한 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백성에게 자 애로우시며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시니 만약 아래로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 힘을 더하여 그 총명 을 돕는다면 요순의 덕화와 한나라 문제 경제의 치세 를 가이 해를 보듯이 바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일은 생 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온갖 아부와 아양만 을 일삼으며 충성된 이 옳은 말로 간하는 선비를 가 리켜 요망한 말을 한다고 이를 물리치며 착하고 정직 한 사람을 도리어 비도로 몰아 세운다.
안으로는 나라 일을 보살필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백성 을 괴롭히는 벼슬아치가 많아서 온 백성의 마음이 내 키지 않고 나가도 한몸을 지탱할 계책이 없다. 포악 한 정치는 날로 더해가는 원망하는 소리는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 이 드디어 모두 무너지고 말았도다. 관자가 말하기를 사유 즉 예의염치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 하고 만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형세는 오히려 옛날보 다도 더욱 심하다 하겠다.
공경이하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치르는 마당은 마치 물건을 사고 파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다. 백성에게 서 거둔 세금과 물건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세도가의 사복만 채우고 있으며 나라에는 빚이 쌓여 있는데도 이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 와 음란한 생활만을 일삼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 나 꺼릴줄을 모른다. 이에 이르니 온나라가 짓밟힐 대로 짓밟혀 결단이 나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 고 있다. 고을아치들의 탐학이 이러하니 어찌 백성 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 인데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멸망하고말 것 이다.
이러한 이치인데도 국가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할 방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향제를 꾸며 오직 일신의 온전만을 도모하며 헛되이 국록과 지위를 도 적질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옳은 일이라 하겠는 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지만 이 땅 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또 옷을 얻어 입고 사는 터 어찌 앉아서 나라의 멸망하는 꼴을 보고만 있겠는가.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 창생이 뜻을 모아 이제 의기를 들어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케하 고자 사생을 같이 하기를 맹세하고 일어섰으니 오늘 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이기는 하겠으나 결코 두려 워 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각자의 생업에 충실할지며 함께 다가올 태평성세를 빌어 성상의 덕화를 고루입게 되었으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서기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
(무장기포지 잔디밭 중앙산책로 전경.우측 2개의 오석판중 좌측작은것은 포고문내용이고 우측 큰 오석표지석은 글씨 페인트가 벗겨져 내용을 해독할 수 없는 표지석임)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 전면 모습임.)
(동학농민혁명군 포고문 후면 표지석 모습)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좌측-동학농민군훈련장 표지석)
이곳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은 창의문을(=혁명포고문) 발표한 장소로서 혁명군이 지방관아를 향해서 진격을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이 넓은 잔디밭은 농학농민혁명군의 군사훈련장이기도 했다. 넓은 잔디밭 좌측 공간에는 “동학농민군 훈련장”이란 표지석이 있다. 지방관리들의 부당한 행패에 농민들이 얼마나 분노했으면 이렇게 집단적으로 모여 군사훈련을 받고 봉기 했겠는가. 물론 그 기저에는 동학이란 종교집단의 힘이 작용했겠지만 말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행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농민들의 분노를 이렇게 촉발했겠는가. 가장 유명한 것이 동진강 만세보 사건이다. 고창군 고부읍 북쪽의 동진강 만세보는 멀쩡한데도 그 아래에 농민을 동원하여 신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보이용 수세를 상등논에는 쌀 2말 하등논에는 쌀1말의 거둬들여 쌀 700여석을 사취했다는 등의 비리가 농민들을 분노시켰다.
(동학농민혁명군 훈련장 표지석 모습.이곳이 농학농민군들의 훈련장소이었음.)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좌측-소나무 3그루와 안내판)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맨 좌측 앞쪽에는 소나무 3그루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안내표지판 게시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소나무 3그루)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은 1894년3월20일 동학 농민혁명 무장창의문을 선포한 유서깊운 곳으로 동학농 민혁명이 지역민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출발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나무는 변함없이 늘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역 경에 처했을 때 더욱 푸른빛을 발하는 꿋꿋한 절개, 미 래지향적인 군민을 상징하는 군목이다. 소나무 3그루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대장 전봉준(중앙) 중간팀 김개 남(좌장) 웅견팀 손화중(우장) 등 3대 지도자를 상징하 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고 창현 무장현 흥덕현을 의미한다.
기념식수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비롯하여 기관단체장 전봉준 증손 전성준 김개남 증손 김상기 손 화중 손자 손몽일 등 20명이 참여 동학농민혁명 무장기 포지 제115주년을 맞이하여 매듭짓고 전국의 흙과 동학 농민혁명 유적지의 흙을 합하는 합토의식 등을 통하여 지역적 갈등을 해소하고 조국의 번영을 염원하는 의식 을 거행하였다.
2009.4.25.
고창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
(무장기포지 잔디밭 좌측에 있는 소나무 3그루와 안내표지판 모습,.)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좌측-당산나무와 안내판)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좌측의 소나무 3그루에서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당산나무(=느티나무) 한 그루와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의 게시글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당산나무)
1894년4월25일(음력 3월20일) 무장기포가 일어난 공음 면 구암리 구수마을은 예부터 당산마을로 불려진 곳으 로 마을의 상징성을 반영한 당산나무를(=느티나무) 이곳 에 식수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유구히 계승하 고 무장기포지를 지켜주기 바라는 상징적인 의미를지 니고 있다.
무장기포 제116주년을 맞이하여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 사업회 이사장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3대장군 후손 및 유가족 기관단체장 주민 등이 참여하여 동학농민혁 명 무장기포의 뜻을 기리는 기념식을 갖고 기념식수를 하였으며 세계적인 농민혁명운동으로 선양되기를 기원 하였다.
2010년 4월 25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무장기포지에서 고창군아산면용계리372-8번지 소재 인천가든식당으로 이동해 보리새우탕으로 점심식사)
이렇게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점심식사할 곳으로 이동했다. 이곳 무장기포지의 넓은 잔디밭에서 머무른 시간은 27분 정도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보리새우탕으로 유명한 아산면용계리 인천가든 식당으로 이동했다. 무장기포지 주차장에서 인천가든식당으로 출발한 시간은 11시53분이었다. 인천가든식당에 도착하니 시간은 12시37분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385km였다.
너무 유명한 식당이라서선지 차량이 20여대쯤 집결되어 있다. 식당안에서는 대기표를 받고 30여분간을 기다렸다. 보리새우탕 2인분을 시켜서 점심을 잘 먹었다.(보리새우탕소1개*25천원+공기밥2개=27천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뜨거운 보리새우탕을 젓갈과 김치를 섞어서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정읍시 황토현 전적지 구경)
이렇게 아산면 용계리 인천가든 식당에서 점심을 잘 먹고 13시42분에 우리는 정읍시 황토현전적지로(=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산2번지) 출발했다.
황토현전적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14시42분이었다. 황토현전적지는 온통 공사판이었다. 대형 토목공사가 진행중이고 그 사이를 뚫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들어가 보니 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토현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로 관군과 맞붙어 격전을 치루어 관군이 대패하고 혁명군이 대승을 거둔 장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군기념관을 세운 것 같았다.
(황토현전적지내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모습)
(공사중인 황토현전적지 모습.지금은 공사 때문에 무척 어수선한 상태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에 전시된 사진과 설명문들은 (1)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들 사진.(2)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사진. (3)공주시 우금치 전투 소개글 (4)동학농민혁명의 의의 (5)조세제도의 모순 등을 상세히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내에 전시된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들의 사진 모습.좌측부터 전봉준.손화중.김개남 순임.)
(압송되는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 모습)
(우금치 전투)
우금치전투는 충남공주시에 있는 우금치 언덕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게 몰살당하다 싶이 대패한 전투장소이다. 여기서의 패배로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막을 내린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우금치 소개글은 아래와 같았다.
“(우금치 소개글)
우리가 일으킨 봉기의 시작은 탐관오리에게서 벗어나 기 위해서였지만 조선의 국왕을 위협하고 청일전쟁까 지 일으키는 일본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다. 우리 다시 힘을 합쳐 일본군을 몰아내자”
이곳의 우금치 소개글 안내판 사진은 아래와 같다.
(황토현전시관에 전시된 공주시 우금치에서 전투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 글임)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평등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끝이 났지만 영원히 사리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민중이 중심이 되어 부패한 사회와 정부 또는 외세의 침입에 맞서 일 어난 우리나라의 여러 민중운동에 정신적 뿌리가 되었 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1919년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 항하여 일어난 3.1운동이후 부패한 정부를 향해 일으 킨 1960년의 4.19혁명과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이 있어요”
황토현 전시관에 전시된 평등사상 홍모글 전시관 사진은 아래와 같다.
(황토현전시관에 전시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로 평등사상의 뿌리로 설명함)
(동학농민혁명은 세계혁명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에서 일어난 여러혁명들과 닯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동학농민혁명,독일농민전쟁, 중국태평천국 운동)
*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바꾸자(=동학농민혁명,독일농 민전쟁,프랑스혁명,러시아혁명)
* 지나친 세금 때문에 살 수가 없다.(=동학농민혁명,독 일농민전쟁,프랑스혁명)
* 외국의 강한 나라들이 침입해서 백성을 괴롭히지 못 하도록 하자(=동학농임혁명,인도네시아 자바전쟁,베 트남농민전쟁)
이렇게 황토현 전시관에 전시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혁명과의 공통점을 설명하는 전시관 사진은 아래와 같다
(동학농민혁명은 세계혁명과의 공통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홍보하고 있음.)
(19세기 조세제도의 모순)
“18세기 중엽이후 조선의 조세제도는 전정 군정 환곡으 로 삼정체제가 기본이었다. 삼정체제는 직접생산자인 소작농에게 세금이 집중적으로 부과된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정은 토지주인이 아닌 소작인이 납부했다.
군정은 16세-60세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는데 양반은 면제되었다 16세이하의 자나 60세가 넘은 자 죽은 자 에게까지 군포를 거두거나 군역을 피해 도망간 자 납 부능력이 없는 자 지방관리와 결탁해서 군역에서 빠진 자의 몫까지 일반 농민에게 부과했다.
환곡은(환정은) 보릿고개 때 농민들에게 곡물을 관에서 값싸게 빌려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일종의 빈민구제 대책인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가의 고리대 형태로 변질되어 농민들을 수탈했다. 지방수령과 아전들이 수 량을 속이거나 강제로 대여하고 거짓으로 장부를 꾸미 는 수법 등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다.
황토현전적지의 동학농민혁명기념전시관에 전시된 조세제도의 모순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판 사진은 아래와 같다.
(조선후기의 조선 조세제도가 모순이 많은 농민수탈 구조였다는 점을 홍보하고 있음)
이렇게 정읍시 황토현전적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부를 둘러보고 우리는 영광군 영광대교로 향했다. 우리는 15시07분에 정읍시 황토현전적지를 출발해서 영광대교로 향했다.
영광대교는 영광군 서부 해안가인 홍농읍쪽에서 법성포 포구 바다를 다리로 연결한 곳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영광군 백수면의 백수해안도로로다. 백수해안도로는 영광군 서해바다의 유명한 칠산바다를 구경할 수 있는 관광도로다. 칠산바다의 조기잡이는 우리가 유년시절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유명한 조기잡이 바다다. 이 칠산바다에서 잡은 조기가 법성포로 실려와 법성포에서 유명한 영광굴비가 생산되는 곳이다.
(2부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영광군백수해안도로-칠산대교전망대-목포시-해남군문내면 우수영관장지-진도관광 이야기는 2부에서 설명하겠습니다.)